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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인 찍힌 예술가

심성연

낙인 찍힌 예술가


심성연 tlatjddus00@naver.com


  요즘 북한군의 러시아 파병 이슈에 뉴스와 언론매체가 떠들썩하다. 엄연히 한국도 전쟁이 끝나지 않은 나라이기 때문에 남일 같지 않다. 2년간 지속되고 있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속 무수한 목숨이 희생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오늘날 예술은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이 행위를 멈추라는 목소리로 대변하여 희생자들을 지지하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과거 역사를 살펴보면 전쟁 국가에서는 예술을 선전의 도구로 사용하였고, 정권의 통제 아래 혁명으로 보여지는 작품들을 퇴폐미술로 낙인 찍혀 활동하지 못하게 앞을 막아섰다. 이처럼 전쟁과 예술은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음과 동시에 가장 암울하고 침체되는 시기를 겪기도 한다. 


  가장 널리 알려진 용어 퇴폐미술(Degenerate art)은 반나치 성향의 미술과 비아리아인의 미술 활동을 탄압하기 위해 나치가 만든 말로 나치 정권시기에 세기의 예술가인 피카소, 칸딘스키, 키르히너 등이 블랙리스트 명단에 올려졌고, 이들을 포함하여 20세기 일부 아방가르드 예술이 그 대상이 되었다. 가장 논란이 되었던 전시인 《퇴폐미술전》(1937)이 독일에서 열리면서 많은 예술가들이 독일을 떠나 미국으로 망명하거나, 키르히너의 경우 압박에 못 이겨 생을 마감하는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 독일에서 처음 쓰여진 용어였지만 사실상 시대상에 따라 그들이 바라는 사회 발전을 저해하고 문화를 어지럽힌다고 생각되는 예술들을 낙인 찍고 예술활동을 방해하는 단어로 넓게 쓰여졌다.  


바실리 칸딘스키, <즉흥 No.217 회색타원>, 1917, 캔버스에 유채, 105.5×134cm, Ⓒ예카테린부르크 미술관


  “예술은 정신적 활동이고, 예술은 예술로서 남아야 한다” 라고 입장을 밝힌 칸딘스키가 대표적 예로 들 수 있다. 1866년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칸딘스키는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이전과는 다른 형태의 미술작품을 선보이며 화단에 혁명을 일으킨 인물이다. 1917년 사회주의라는 정치적 이념을 가지고 등단한 소련은 예술을 그저 정치 도구로 여기며, 러시아 아방가르드를 퇴폐미술로 낙인 찍었다. 칸딘스키도 그의 대상이었다. 러시아 미술계에서 활동할 수가 없었던 칸딘스키는 1921년 독일로 망명하게 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에서는 나치 정권이 들어서면서 독일에서조차 퇴폐미술로 또 한번 낙인 찍히고 만다.


  예술 탄압은 비단 서구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한국 역시 식민지와 전쟁, 그리고 독재를 거치며 예술가들의 자유로운 표현이 억압받는 암흑기를 겪었다. 나치 정권과 비슷한 시기 한국은 일제통치 하에 식민지 생활을 겪으며 많은 통제와 억압을 받아왔다. 특히 1930년대 말살문화통치로 우리의 고유 문자인 한글과 미술이 그 대상이 되었고, 탄압받고 통제되었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미술 공모전인 조선미술전람회 즉, 선전이 우리 미술계 화단에 정착되면서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으로까지 이어져 한국 근대 미술의 기준이 되어버리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특히 필자는 국전이 일제의 잔재라고 생각한다. 국전의 수상이 작가의 중요한 업적이 되어버리고 수상한 작가의 화풍이 국전의 기준이 되어버리면서 본인만의 화풍을 제쳐두고 그 기준에 따라가는 예술가들이 허다했다. 그러다 국전으로 대표되는 아카데미즘이 활개를 친 1960-70년대 한국 화단에 실험미술, 전위미술이 등단하면서 한국미술의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한국은 한국전쟁 이후 군사독재와 유신정권 아래 모든 제도가 통제 받았고, 철저한 제도권 아래 출품해왔던 국전은 권위적인 힘을 더욱 키워나갔다. 복종을 요구하는 이런 사회에 반발하여 권위와 형식에 도전한 실험미술은 퇴폐예술로 낙인 찍혀 사라지고 점점 잊혀져 갔다. 


<한강변의 타살>, 1968.10.17


  대표적인 예로 강국진, 정강자, 정찬승의 <한강변의 타살>을 들 수 있다. 1968년 10월 17일, 오후4시, 서울 제2 한강교 밑에서 펼친 집단 해프닝이다. 행위예술가 3인이 모여 한강에서 물을 길어온 후, 모래사장에 한 사람씩 자신이 들어갈만한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들어가면 관객들이 모래로 구덩이를 메우고 그 위에 물을 퍼붓는다. 그리고 구덩이에서 나와 몸에 비닐을 걸치고 그 위에 문화사기꾼, 문화기피자, 문화곡예사 등을 쓰고 난 후, 큰소리로 읽은 다음 그 비닐들을 모아 화형식을 했다. 이 작품은 당시 한국 사회의 억압적인 분위기와 문화적 통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퍼포먼스였다. 자신을 매장하는 행위를 통해 예술가들은 당시의 억압된 표현의 자유와 통제된 예술 활동에 대한 저항을 표현했다. 그러나 이러한 실험적인 시도는 기존 화단과 정부로부터 심각한 비판을 받았고, 결국 많은 실험미술가들은 활동을 중단하거나 해외로 떠나야 했다.


  이처럼 20세기 중반까지 정치권력은 예술을 통제하고 검열하는 수단으로 '퇴폐미술'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이는 단순히 미적 기준의 문제가 아닌,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권력의 통제 수단으로 작용했다. 나치 독일에서 시작된 퇴폐미술의 개념은 전체주의 국가들에게서 광범위하게 활용되었고,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결국 이러한 예술 탄압의 역사는 전체주의와 함께 반복되어 왔음을 보여준다. 독일에서 아방가르드 예술이 그 퇴폐미술의 대상이 되었다면, 한국은 서구의 아방가르드와 플럭서스 등에 영향을 받아 설치, 비디오, 해프닝 등의 새로운 매체를 도발적으로 사용한 실험미술이 대상이 되었다. 즉, 동서양을 막론하고 퇴폐미술이란 시대상에 반하는 새로운 예술 사조를 지칭했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으로 볼 때, 21세기 현재에도 우리는 경계를 늦출 수가 없다. 특히 오늘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이러한 역사가 반복되고 있을 수 있다. 우리 모르는 사이 정권의 압박 속에서 자신의 예술적 가치를 부정 당하고 있는 예술가들이 있지는 않을까? 이들의 목소리는 어떻게 기록되고 있으며, 우리는 이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가? 퇴폐미술이라는 낙인은 동시대에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 그것은 시대와 장소를 바꿔가며 계속해서 등장할 것이다. 우리는 이제 이러한 목소리들에 더욱 귀를 기울이고, 예술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할 때이다.



참고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2030610530000019

http://www.koreatimes.com/article/1501966

https://kangkukjin.com/portfolio/murder-at-the-han-riverside-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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