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관∥
고암 이응노 생가기념관은 2011년 11월 8일 개관 하였습니다.
이응노의 집은 용봉산을 바라보고 월산의 품에 안긴 호젓하며 소박한 모습입니다. 고암 이응노가 그림의 꿈을 품었던 공간위에 그의 예술적 삶과 닮게 서있습니다. 낮은 구릉 위의 네모난 건물은 주변의 풍경과 어느 한곳 모난데 없이 정겹게 어울립니다. 기념관의 넓은 창은 밖의 모든 풍경을 안으로 끌고 들어와 모든 것을 눈에 담고 싶어 했던 고암 이응노의 시선과도 닮아 있습니다.
고암 이응노가 세계에 우뚝 설 수 있었던 모든 원천은 고향이라는 토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생가기념관은 그의 삶과 예술의 궤적을 완성하는 의미 있는 곳이 됩니다. 그의 예술을 세계화하고자 노력했던 아틀리에, 대전과 수덕사에 있는 미술관, 이들을 모두 이으며 하나의 완성된 궤적을 그리게 되는 최초의 장소적 의미가 이곳 고향의 생가기념관이 됩니다.
고암 이응노 생가 기념관은 그가 화가였기 때문에 그의 작품 세계를 오롯이 담을 수 있는 전문미술관으로 지어졌습니다. 건축물 역시 완성도가 매우 높아 건축이라는 작품을 보기위해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습니다. 생가를 비롯하여 전시동과 부속동(자료실, 북카페)이 있어 책을 보며 휴식을 취할 수가 있고, 전시동은 로비와 4개의 전시실, 교육이 가능한 기획전시실로 이루어져 있어 고암의 작품세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외부공간은 연지공원과 조망대, 산책로, 야외전시장이 있습니다. 소장하고 있는 작품은 유족과 개관을 축하해 주신 분들의 기증과 구입한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응노 기념관은 고암의 삶과 예술을 선양하고, 지역문화를 향상시키고자 합니다. 현재 어린이를 대상으로 자연 환경과 예술을 함께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과, 성인대상으로 미술, 역사, 건축 등의 인문강좌가 진행 중입니다. 지역민의 지속적인 참여를 유도하며 홍성지역의 문화예술 대표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관 람∥
09:00~17:00
관람료∥
어 른(25~64세) 1000원 (단체 700원)
어린이·청소년(7~24세) 500원 (단체 300원)
유공자·6세이하·65세이상·장애인 무 료
휴 관∥
월요일
기념관 - 1.237.46㎡ (본동, 부속동)
본동 - 전시실 4실, 기획전시실 1실, 부속동 - 북카페, 자료실
생가 - 75.06㎡ (안채, 헛간채)
기타 - 조망대, 연지공원, 주차장, 야외전시장
착공일 - 2009. 6. 26
준공일 - 2010. 8. 26
개관일 - 2011. 11. 8
유품․작품 - 756점
(생가 기념관 전경)
∥고암안내∥
고암(顧菴) 이응노(李應魯)는 1904년 1월 12일 충남 홍성의 월산 자락에서 출생하였습니다.
1910년 부친의 서당에서 한자를 익히다가 보통학교에 입학하게 되지만 일본식 신식 교육을 거부했던 집안의 뜻에 따라 3년 뒤 학교를 그만둡니다. 17살에 충남 당진의 송태회에게 서화을 배우며 화가의 길로 들어섭니다. 1922년에 더 넓은 곳을 찾아 서울로 상경하여 해강 김규진의 문하에 들어가게 됩니다. 고암은 해강에게 서화를 지도 받으며 필법은 날로 발전해 제3회 선전에서 입선하고, 1926년 스승의 품을 떠나 전주에 내려가 개척사(開拓社)라는 간판점을 차려 독립생활을 시작합니다.
1934년 전주의 생활을 청산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갑니다. 고암은 동경의 혼고회화연구소에서 수학하였고, 당시 남종화의 대가 마츠바야시 게이게츠(松林桂月)의 덴코화숙에 입문하였습니다. 일본화원전에 작품을 출품하여 특선에 오르기도 합니다. 1945년 초 고암은 일본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고암은 수덕여관을 인수하여 운영하다가 해방 후 서울로 상경하여 고암화숙을 개설합니다. 1948년 그의 나이 45세에 전통화단에서의 좋은 평가로 초창기 홍익대학교의 주임교수로 임용되어 1950년6월까지 동양화부를 지도합니다.
1957년 프랑스 평론가 쟈크 라센느의 초청으로 1958년 도불기념작품전을 성황리에 마친 뒤 프랑스로 떠났습니다. 1960년 파리 파게티화랑과 전속계약을 맺으며 작품 활동에 몰입하던 중 1967년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2년 반 동안 옥고를 치르는 고난 속에서 창작욕은 더욱 크게 나타납니다. 석방 후 수덕여관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프랑스로 돌아가 창작에 몰입을 하던 중에 또다시 1977년 두 번째 정치적사건에 연루되게 됩니다. 두 번째 사건이후 국내에서의 작품발표와 매매가 공식적으로 금지되어 한국에서 고암이라는 이름은 점점 잊혀졌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제자를 양성하는 등 꾸준한 활동을 하였습니다. 1983년 한국국적을 포기하고 프랑스로 귀화하였습니다.
1989년 고암의 국내활동에 대한 모든 금지조치가 풀리고 호암갤러리에서 대규모 전시가 열렸지만 한국으로 돌아오기 며칠 전 1월 10일 그의 나이 86세에 심장마비로 별세했습니다.
고암은 다양한 재료로 작품을 만들었으며 대표적인 작품은 <묵죽>, <풍경>, <문자추상>, <구성>, <인간-군상시리즈> 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