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은 지금의 자기와 눈앞의 세계가 만날 때 태어난다. 이 세상 속에 존재하는 자신과 자신이 대면하는 세계를 나와 너의 관계로 규정할 때, 세계를 인식하는 나에 대한 너로 관계를 맺을 때 비로소 풍경은 발생한다. 따라서 풍경은 무엇보다도 관계의 미학이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느 한쪽의 일방적이고 우월한 관계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 생물과 무생물의 구별이나 차이 없이 온전한 평등의 관계로 사유하고 살아가는데서 가능한 일이기도 할 것이다.
풍경이란 대지의 투사 형태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계기로 하여 인간의 내부에서 발생하는 이미지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풍경이라는 현상에는 대지라는 물리적 실체와 그것을 시각상으로 포착하는 사람, 이 양자의 존재가 필수적인 것이다. 우선 인간의 풍경 체험은 외계의 시각상을 눈으로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한다. 서구의 경우 풍경화landscape란 토지가 그림 속에서 감상된다는 의미다. 그러니까 토지와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 사이의 일정한 거리 관계에 의해 형성되는 이미지를 말한다. 애초의 의미는 중세시대에 특정한 영주가 지배하는 구역 또는 특정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지역이었단다. 그것이 우리의 경우 경관으로 번역되어 쓰여졌다. 따라서 사물을 객관적인 시각상을 의미하는 지극히 과학적인 용어로 자리하였고 이는 근대 이후의 세계관인 세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의도가 깃들어 있음을 보여준다. 원래 우리의 풍경이라는 말보다 경관이 우세하게 쓰여진 것이다. 바람과 태양에 의해 순간적으로 드러나는 아름다움을 지시하는 풍경이라는 언어보다 객관적인 시각상인 경관이라는 언어가 득세하게 된 이유는 균일성과 환원성, 등가성이라는 세계 해독의 문법을 국토의 시각상에서 적용해야 하는 시대적 요청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풍경 체험은 단순히 외계사물의 시각상을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의 표정을 읽는 것이다. 풍경이란 말이 본래 함축하고 있는 특유의 가치를 잃어버리고 다만 기계적으로 차갑게 그려오거나 관습적인 제스처로 마감시켜온 풍경화의 궤적이 자연을 다룬 한국 근. 현대미술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나 풍경은 바람과 세계의 시각상으로 된 언어다. 배의 돛대와 바람에 실려 이리저리 비행하는 벌레가 바람이고 그것은 비가시적 존재이지만 사물의 몸을 빌어 나타난다. 그러니까 바람은 타자의 몸을 빌어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다. 풍경화란 바로 그런 미세한 기운, 호흡, 생명, 모든 만물의 감촉, 섬세한 주름까지도 잡아내고 이를 형상화하려는 지난한 시도에 다름 아니다. 이렇듯 사물에서 인격적 풍모를 느끼는 이른바 애니미즘 체험은 이 세상을 무(無)로 돌리지 않으려는 지성의 장치(베르그송)이다. 무기적인 사물에 자기를 투영하여 보는 것이 바로 애니미즘 지각인 것이다.
구은영은 그렇게 자연/숲을 바라보고 있다. 군집의 나무를 그리다가 최근에는 숲을 전면적으로 다룬다는 인상이다. 원근이 부재하고 중심과 주변의 구분이 없는 이 전면적인 숲의 초상은 촉각적으로 숲을 더듬게 한다. 바라보는 체험은 단순한 시각상의 지각에 머물지는 않아 보인다. 숲을 이해하고 숲에 대한 기억을 더듬고 숲의 문화와 역사를 깨닫고 숲을 하나의 생명체로 인식하는 일이다. 그녀는 숲을 보기를 좋아하고 즐겨 찾는다고 한다. 풍경, 숲은 보는 사람 각자의 기억과 감각을 짊어지고 시각상으로 만나는 곳에서 발생하기에 보는 사람의 수만큼의 풍경이 거기에 있다. 그러니까 이 그림은 구은영만이 본 숲이다. 숲의 깊이와 비릿한 내음과 숲을 이루는 모든 생명체들의 완벽한 유기적 조화와 공생, 무수한 인연으로 얽혀있는 촘촘한 관계망을 바라보면서 그것과 자신의 몸을 함께 생각해본다. 즐거운 마음으로 보고 깨달았던 풀과 나무와 신선한 공기, 차가운 기운, 수런대는 생명체들의 부산함, 냉엄한 자연법칙, 장엄한 죽음과 경이로운 탄생, 영성을 불러일으키는 신비로운 체험을 형상화하고 싶다는 바램이다. 그 세계는 유동적이고 없으면서도 있고 있으면서도 없으며 서로가 서로에게 기생한다. 차별과 차등이 없이 공존하는 세계, 식물과 동물의 구분도 지워지는 그런 경계 없는 장면이며 결국 모두들 공으로 돌아가지만 어김없이 살아 돌아오면서 환생과 순환을 거듭하는 그런 숲이다. 여기에는 생태와 환경에 대한 관심의 일단도 스며들어있다. 여러 인연과 관계의 망들이 촘촘히 직조된 자연, 숲을 보는 시각은 그에 조응하는 방법론을 추구한다. 이렇듯 구은영의 숲은 무수한 인연과 기생의 관계를 보여주듯이 여러 겹으로 밀려 올라온다. 바탕에는 바람결 같은 붓자국이 무심하게 흐른다. 바람결이나 숲의 호흡, 생명력 같은 것이리라. 촘촘하고 조밀한 붓질, 바탕 면부터 채워나가면서 형상을 비워내는 투명하게 밑그림을 비쳐주면서 얹혀지는 잎새와 줄기 등의 이미지들은 숲의 깊이를 은연중 투영한다. 우리 온몸의 가지런한 감각기관들이 감각의 밸브를 모두 열어 젖히면서 숲을 받아들이고 함께 하기를 권하는 그림이다. 몸으로 체험한 숲의 감각화, 촉각화가 납작한 평면에 올려져있다. 순간 화면은 식물성 육체로 화하고 생명의 서식지로 슬쩍 자리바꿈을 한다. 아울러 작가는 유화물감을 통해서도 이렇게 맑고 투명한 깊이를 충분히 보여줄 수 있음을 시연한다. 따라서 여기에는 유화의 전통적인 기법과 재료체험이 우선적으로 고려된다. 계획적인 작업과 신중한 재료구사, 기름의 선택과 농도, 올려지는 방법의 차이 등으로 인해 그림들은 저마다 조금씩 다른 뉘앙스를 풍긴다. 상당히 전통적인 유화기법의 구사, 방법론은 숲에 대한 자신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부분과 얽혀있다. 그렇게 해서 드러난 그림이 역설적으로 상당히 동양화적인 분위기와 맛을 준다. 화선지에 스민 선염효과나 선의 맛, 자연과 생명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태도의 형상화 같은 것들 말이다. 전작과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앞서 언급했듯이 여러 생명체들이 공존하는 모습을 숲과 함께 겹쳐 놓았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이번 숲 그림에는 사슴과 새, 혹은 암시적인 형상들이 오버랩 되어 있다. 이는 숲에 사는 다양한 생명체를 보여주는 동시에 숲을 통해 그런 환영을 보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앞서 언급한 애니미즘적 시각과 동질의 것이다. 애니미즘의 세계관이 세계를 의인적 환영으로 보는 것이라고 한다면, 무성한 숲을 통해 어떤 사물과 닮게 여기는 상사적 지각은 그 사물의 형태적 특징을 보다 인상깊게 지각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세상의 어떤 것에 비유함으로써 보다 더 확실하게 사물의 실재감을 획득하는 것은, 사물의 실체란 이 세상의 다른 사물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비로소 가능하다는 사실에 다름 아니다. 여기에 또 다른 관계의 미학이 개입하고 있다. 풍경과 생명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구은영의 시선과 태도가 현상적인 자연계에서 이제 또 다른 관계성의 추구로 나가고 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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