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철
김상철 | 동덕여대 교수.미술평론
차분하고 안온한 화면, 그리고 그 틈새로 비춰지는 일상의 풍경들은 작가 유진희의 작업에서 느낄 수 있는 일차적인 인상이다. 그것은 대단히 평범할 뿐 아니라 일상적인 소소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마치 삶의 한 부분을 순간적으로 채집한 듯한 작가의 화면은 심각한 조형의 원리나 작위적인 이념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것은 일상이 그러하듯 자연스럽게 보는 이에게 다가온다. 마치 유기농의 채소처럼 풋풋하고 싱그러우며 여유로운 화면은 소박하고 진솔한 삶의 온기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안온한 서정의 온유함이다.
정적이고 꾸밈없는 화면은 담채의 반복적인 필치로 다듬어져 특유의 밀도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밀도는 지나치게 자극적인 농도로 눈을 자극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풋풋하고 싱그러워 오히려 담백함을 더한다. 그것은 마치 일상을 적어 놓은 진솔한 일기같이, 혹은 생활의 단편을 기록한 에세이처럼 여유롭다.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스러운 주제와 내용을 취하거나, 지나치게 사변적인 것으로 흘러 단순한 형식주의의 화면이 난무하는 현실에서 작가가 보여주고 있는 삶과 이상에 대한 솔직하고 진지한 관찰과 사유는 오히려 반가운 것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작가의 화면을 구성하고 있는 내용들은 극히 일상적인 것들이다. 그것은 특정한 상황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소소한 사물들을 통해 상황을 제시함으로써 연상과 공명의 폭을 넓히고 있다. 익히 익숙한 채소와 주방의 소품들, 그리고 소파를 비롯한 일상의 사물들은 무작위적인 나열을 통해 일상의 부분들을 서술하고 있다. 그것은 살림을 주도하는 여성으로서의 입장과 어머니로서의 감상, 그리고 민감하고 섬세한 감성을 지닌 작가로서의 시각이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치열한 일상이 이처럼 정제되어 함축적으로 표현될 수 있음은 바로 예술이 지닌 덕목일 것이다. 당연히 이는 그것을 포착하여 표현해 낸 작가의 섬세하고 예민한 감각에 힘입어서이다.
화면은 평면적인 표현을 전제로 공간의 운용을 적극 활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작가의 관심이 사물 자체의 표현이나 상황의 설명에 있지 않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소소한 사물들을 무작위적이고 분방하게 배열하여 공간과 공간간의 유기적 조화를 모색하고, 이에서 파생된 시각적 자극이 화면의 물리적 범주를 벗어나 확장되게 함은 특징적인 것이라 여겨지다. 이는 작가가 취하고 있는 일종의 패턴화된 화면 구성에서 파생되는 조형적 효과이다. 유사한 사물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함으로써 화면에 일정한 운동감과 더불어 연속성의 여운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여운은 은근하지만 부단히 제시됨으로써 증폭과 확산을 이뤄내고 있다. 그것은 마치 잔잔한 감동이 있는 해맑은 수필을 읽는 것과도 유사한 것이다. 이는 결국 회심의 미소로 마무리되며 가슴으로 전해지는 그러한 이야기와도 같은 것이다. 작가의 화면이 친근하고 익숙하며 경계심 없이 보는 이에게 전해지는 소이가 바로 그것인 것이다.
작가의 화면은 수많은 붓질을 통한 안료의 집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수용성 안료 특유의 번지고 스며드는 효과가 두드러지는 화면은 일종의 무작위적인 질서가 두드러진다. 윤곽을 분명한 선으로 규정하여 표현한 사물들은 담백하고 소박한 맛이 두드러진다. 이러한 정연한 형태감에서 비롯될 수 있는 경직성을 완화시켜 화면에 보다 내밀한 깊이를 지니게 하는 것은 바로 수용성 안료의 물성을 이용한 독특한 표현이다. 무수한 시간과 노동의 집적을 통해 비로소 이루어지는 작가의 작업 방식은 다분히 구축적인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비로소 형성된 화면은 표현되어진 사물과 여백으로 존재하는 공간 사이에 독특한 질서를 형성한다. 형상을 통해 드러나는 부분은 당연히 실(實)의 부분이며, 색채로 마무리된 공간은 허(虛)의 여백이다. 그러나 작가의 화면에서 이들은 상호 작용을 바꿔 허가 실이 되기도 하고, 실이 허가 되기도 한다. 이는 특유의 방법을 통해 구축해 낸 공간의 깊이와 심미가 단순한 여백으로서의 제한적 기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러한 방법을 통해 작위적인 형태의 사물들을 무작위적인 질서 속에 수렴해 냄으로써 그 표현의 폭을 넓히고 있다. 엄정한 형태는 무수한 무작위적인 색채의 축적을 통해 그 경직된 틀이 무뎌진다. 더불어 작위적인 것과 무작위적인 것은 상호 작용을 통해 보완과 대비의 묘를 드러낸다. 색채로 매워진 너른 공간이 공백이 아닌 여백으로 작용하며 조형의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기능과 역할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화면에는 정형화된 나뭇잎 무늬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그것은 식물성으로 상징되는 삶에 대한 작가의 이해를 반영하는 동시에, 작가 자신이 자신의 삶에 건네는 하나의 위안과 안식의 표징이 아닐까 여겨진다. 이는 비록 치열한 삶이지만 그것의 내면에 흐르는 것은 따뜻하고 평화로운 정서와 감성이라는 이해의 반영이며, 이러한 내용들에 대한 작가의 감사와 긍정의 표현으로 읽혀진다. 작가는 분명 현실적인 삶의 양태와 순간, 그리고 이러한 내용들의 집적으로 이루어진 삶 자체를 작업의 근간으로 삼고 있지만, 자신이 삶 자체에 함몰됨을 경계하고 있음이 여실하다. 그것은 삶 자체에 대한 일정한 관조적 시각을 통해 얻어진 지혜일 것이다. 삶을 마주하고 직시하되 그것에서 한 걸음 벗어나 관조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삶은 예술에 의해 다시 가공되고 해석되어 표출될 수 있는 것이다. 적어도 작가의 작업은 삶을 통해 자신의 실존을 확인하고 삶에 대한 사유를 개진할 수 있는 최소한의 간극을 확보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더불어 이러한 내용들을 조형화하여 표출할 수 있는 나름대로의 일관된 조형체계 역시 확보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문제는 이러한 내용들을 여하히 보다 심화시켜 보다 주관적인 시각과 관점을 구체적으로 표출해 낼 것인가에 있다 할 것이다. 이는 소재와 표현이라는 지엽적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보다 진지한 사유와 성찰을 통해 점차 확보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