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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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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작가: 김진관
전시장소: 팔레 드 서울 1F
전시기간: 2012. 09. 11-2012. 09. 20
전시오픈: 2012. 09. 11. 화 5:00pm
관람시간: 월-금 11am-09pm, 토-일 11am-07pm

 

 

 

 

 

김진관의 회화

맑고 투명한, 여리고 소소한 그림

 

  김진관의 그림은 정적이다. 그런데, 정적인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수런수런 소리가 들린다. 풀잎 사이로 부는 바람소리며, 풀섶에 숨은 여치 우는 소리, 흙 알갱이를 밀쳐내며 개미가 떼 지어 지나가는 소리, 콩깍지가 터지면서 콩들이 흩어지고 부닥치는 소리. 그런데, 정작 그림에서 소리가 날 리가 없다. 그만큼 암시적이고 생생하다. 생생한 그림이 소리를 암시하는 것.
  그런데, 생생한 것으로 치자면 자연도감 만한 것이 없다. 그런데, 정작 자연도감에선 소리가 나지 않는다. 그 실체가 손에 잡힐 듯 생생하고 실체 그대로를 옮겨 놓은 듯 사실적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가 않는다. 소리가 나려면 소리가 지나가는 길이 있어야 하는데, 조직이 지나치게 치밀한 그림, 불투명한 막으로 덮씌워진 그림이 그 길을 막아버린 것이다. 극사실적인 그림이 오히려 비현실적이고 초현실적으로 와 닿는 이유이며, 박제화 된 그림이 현실의 형해며 표본을 떠올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소리가 지나가는 길이며 바람이 흐르는 통로를 만들기 위해선 그림의 조직이 상대적으로 느슨하고 헐렁해야 하고, 맑고 투명해서 그 깊이며 층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림 속에 공기를 머금은 깊이를 조성하고, 공기와 공기 사이에 층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공기와 공기 사이에 층(차이)을 만들어야 비로소 그렇게 달라진 밀도감을 통로 삼아 공기가 흐를 수 있게 된다.

 

  작가의 그림은 맑고 투명하다. 그리고 사실적이지만, 의외로 극사실적이지는 않다. 여백의 경우에 거의 담채를 떠올리게 할 만큼 묽은 채색을 여러 번 중첩시켜 맑고 투명한 깊이를 조성한다(근작에선 아예 종이 그대로를 여백으로 대신하기도 한다). 그리고 모티브를 보면 의외로 한 번에 그려 미세한 붓 자국이며 물 얼룩과 색 얼룩이 여실하다. 미세 얼룩이 오히려 암시력을 증가하는 것인데, 이처럼 암시에 의해 보충되지 않으면 실제감은 어려워진다. 실제와 실제감은 다르고, 실제가 실제감을 보증해주지는 못한다. 그림은 결국 감이며, 실제가 아닌 실제감의 문제이다. 마찬가지로 그리는 것보다는 그리지 않는 것, 그리지 않음으로써 그리는 것을 암시하는 것, 채우는 것보다는 비우는 것, 비움으로써 채워진 상태를 암시하는 것이 더 어려운 법이고, 그 만큼 결정적이다. 이 모두가 그저 수사적 표현이 아닌, 암시력을 증대시키기 위한 실질적인 방법이며, 그림 속에 암시공간을 조성하기 위한 실질적인 계기이다.
  그림은 결국 조직의 문제이다. 조직을 촘촘하게 짤 것인가, 아니면 느슨하게 짤 것인가. 느슨하게 짜야 비로소 공기가 흐르는 길이 열리고, 바람이 지나가는 통로가 열린다. 그리고 작가가 소지로 쓰는 한지는 그 조직이 느슨해서 이런 공기의 길이며 바람의 통로를 내는 데는 그만이다. 섬유조직이 허술한 탓에 오히려 통풍성이 뛰어나고 덩달아 암시적인 그림에 어울린다는 말이다. 여기에 작가는 엷은 채색을 여러 번 덧 올려 바른 중첩된 색층으로 하여금 이렇듯 느슨한 조직 사이로 충분히 스며들게 하고 깊이감이 우러나게 한 것이다. 종이와 채색이 일체를 이룬 나머지 마치 종이 자체에서 배어난 것 같은, 종이 속에서 밀어올린 것 같은 색층이며 색감의 느낌을 주는 것. 그리고 종이는 채색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소리마저도 이렇듯 뱉어낼 것이다.
  나아가 사실주의도 여러 질이다. 즉물적인 사실주의가 있고 암시적인 사실주의가 있다. 즉물적인 사실주의는 자연과학의 인문학적 전망과 관련이 깊고, 암시적인 사실주의는 감각적 경험이며 예술의 특수성에 관련이 깊다. 문제는 자연현상에 대한 물적 증거와 표상형식이 아니라, 어떻게 자연현상을 감각적으로 추체험하고 자기 경험으로 거머쥘 수 있느냐는 것이며, 그 경험을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여백은 이런 암시적 사실주의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여백에도 여러 질이 있다. 그저 텅 빈 공간이 있고, 오히려 꽉 차 있는 텅 빔 곧 충만한 텅 빔이라는 모순율의 경우가 있다. 비어있어야 담을 수가 있고 찰 수가 있다. 바로 관객에게 할애된 몫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매번 똑같은 것을 담지 않는다. 상황논리에 따라서, 저마다 다른 것을 담고 매번 다른 것으로 채운다. 의미를 결정적으로 세팅하지 않는 것, 의미를 붙박이로 붙잡아두지 않는 것, 의미의 망을 느슨하게 짜 헐렁한 망 사이로 설익은 의미들이 들락거리게 하는 것, 그려진 의미가 미처 그려지지 않은 의미를 불러오게 하는 것이 모두 여백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작가의 그림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작가는 말하자면 자연을 그리고 생명을 그리고 생태를 그리지만, 그것도 꽤나 세세하게 그려내지만, 정작 이를 통해서 자연이며 생명이며 생태의 의미를 결정화하지는 않는다. 자연을 어떤 결정적인 의미며 정의로 한정하지도 환원하지도 않는다. 정작 중요한 것은 계몽주의가 아닌, 자연을 매개로 한 경험이며 추체험임을 알기 때문이다. 해서, 그저 그림과 더불어 바람결을 느낄 수만 있다면, 공기의 질감을 감촉할 수만 있다면, 그리고 그렇게 경험된 것을 추체험으로 분유할 수만 있다면 그 뿐이다. 소박할 수도 있겠고, 그 만큼 결정적인 경우로 볼 수도 있겠다.  

  그림 속에 공기의 길이며 바람의 통로를 내는 일, 헐렁하면서도 결정적인 감각으로 자연의 숨결을 암시하는 일, 그래서 마치 내가 그 숨결과 더불어 호흡하고 있다는 착각 속에 빠지는 일은 소박함이 아니고선 이를 수도 이룰 수도 없다. 여기서 소박함이란 무슨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태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것은 대상의 물적 형식 외의 영역과 범주에 할애된 몫이며(대상을 느슨하게 잡는다? 대상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그 몫이 잘 표현돼야 비로소 대상의 물적 형식 자체도 더 잘 드러나 보일 수가 있게 된다. 모든 존재는 관계의 망에 속해져 있다. 문제는 모티브 자체가 아닌, 모티브와 여백과의 상호작용이며 상호간섭이다. 모티브도 존재고 여백도 존재다. 여백은 더 이상 여백이 아니다. 공기며 바람이다. 공기가 지나가는 길이며 바람이 흐르는 통로다. 그 실체감이 희박한 존재(여백)를 포착해야 비로소 상대적으로 실체감이 또렷한 존재(모티브)도 포획할 수가 있게 된다.

 

  다시, 소리로 돌아가 보자. 어떤 사람은 봄에 밭에다 귀를 대고 있으면 새싹이 움트는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대단한 귀를 가졌다고도 생각되지만, 그저 귀의 문제라기보다는 예민한 감수성의 문제로 보인다. 작가의 그림에서 들려오는 소리도 알고 보면 그림은 고사하고 실제 자체도 여간해서 그 소리를 들어보기는 어려운 것들이다. 둔감한 감수성에는 거의 불가능한 경우로 봐도 될 것이다. 결국 관건은 실제로 소리가 들리는지 유무보다는 감수성의 문제이다. 자연을 대하는 주체의 감수성과 태도의 문제이다. 그리고 감수성과 태도에 관한 한 작가가 들을 수 있는 소리를 우리도 들을 수가 있게 된다. 여하튼 이처럼 실체감이 희박한 것들이 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으려면 느릿느릿 걸어야 한다. 발터 벤야민의 산책자처럼 할 일없이 걸어야 하고, 칸트의 무목적적 만족에서처럼 목적의식을 내려놓고 걸어야 하고, 장자의 소요유에서처럼 개념 없이 걸어야 한다. 소리통이 잡소리로 가득 차 있으면 다른 소리가 들려올 공간이 없고 틈이 없다. 더욱이 이처럼 여린 것들이 내는 소리라면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작가의 투명하고 맑은 그림은 이처럼 소소하고 여린 것들이 내는 소리로 소란스럽다.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나도 언젠간 작은 씨앗이 움트면서 내는 소리를, 실체감이 희박한 것들이 실체감이 또렷한 것들을 밀어 올리면서 내는 소리를, 그 여리면서 치열한 소리를 들을 수가 있을 것이다.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Kim Jin-kwan’s painting


Clear and lucid yet tender and delicate painting


 

Kim Jin-kwan’s painting appears static. While looking into this static painting, a babble is heard: sound of breezes blowing between leaves; chirping of grasshoppers; sound of ants in groups passing through, pushing grains of clay; and sound of spreading and clashing of beans bursting. However, painting can never make sound. As such, his painting is so suggestive and vivid. His vivid painting implies sound.

Nothing more vivid than an illustrated plant or animal book: but it makes no sound. Although animals and plants depicted are so realistic, as if being transferred from nature, no sound is heard from them. A path of sound is necessary if sound is to come into being. Such a path is blocked by pictures with compact tissue or covered with an opaque membrane, and so hyper-realistic pictures rather look unrealistic and surrealistic. To create a path through which sound passes or a passageway through which wind flows in a painting, its texture has to be loose. It also should be clear and lucid for fathoming its depth and layers. A depth of air has to be engendered, and a layer has to be made between. Air can flow through a passageway made by a gap of density when this layer is created.

Kim’s painting appears clear and lucid. His work is realistic yet not hyper-realistic. An overlap of thin coloring reminiscent of light coloring generates a clear, transparent depth. But, as his motifs are drawn without overlaps of brush touches, the brush marks, water stains, and color smudges appear strikingly vivid. His painting presents much connotation and suggestion with such delicate stains. Reality differs from the sense of reality, and reality cannot ensure the sense of reality. Painting depends on feeling and sense, and a sense of reality. Depicting something is more difficult and decisive than depicting nothing. Indicating something depicted by depicting nothing; emptying then filling, and indicating a state filled by empting is more difficult. All are practical ways to increase the power of suggestion, and a practical opportunity to create space for suggestion.

Painting is ultimately a matter of texture, whether the texture should be close-woven or loose-woven. When loosely woven, a path opens for air to flow and for wind to pass. The hanji (traditional Korean paper) he uses is an ideal material to engender such a way and passageway for air and wind as its tissue is loose. As its tissue is loose, it has outstanding ventilation and is proper for suggestive painting. The layers of paint created by light-coloring permeate such loose tissues, thereby exuding profundity. In his work layers of color and color sensations derive from paper itself it seems, as the paper and coloring become one. And, the paper is likely to bring forth sound, not to mention color.

There are diverse types of realism: among them are practical realism and allusive realism. Practical realism is deeply associated with natural science’s humanistic perspective whereas allusive realism is deeply involved in sensuous experience and artistic specialty. The problem is not physical evidence into natural phenomena or the form of its manifestation but how to sensuously experience natural phenomena and grasp it as one’s own experience, and how to share and sympathize with such experience.

Blank space should be understood in the context of allusive realism. Its quality varies: simply-empty-space and not-empty-yet contradictorily fill space. When something is empty, it can put and fill. Putting something is for viewers, but they do not put the same every time. They put and fill the space with different things every time depending on circumstance. Taking place in blank space or in his paintings is the setting of meaning, capturing meaning indeterminately, letting meaning come in and out through loose nets, recalling meaning depicted, recalling meaning not portrayed.

The artist minutely depicts nature, life, and ecology, which do not determine meaning. He never confines or reduces nature to decisive meaning. He knows what’s really significant is experience within the medium of nature. All we have to do is feel the texture of air and breeze in his painting. Our experience of such things may be simple and can be decisive. I never attain such a state without purity: creating a path of air or a passageway of breeze; indicating the breath of nature with a loose yet decisive sense; misunderstanding that I breathe with nature. Purity here is nothing to do with an ethical, moral attitude. It is included in the arena or category outside the physical form of objects, setting objects loosely; maintaining a certain distance from objects? As this arena is well represented, the physical form of objects is revealed.
 
All beings belong to a net of relations. The problem is not the motif itself but an interaction or mutual interference between motif and blank space. Both the motif and blank space are beings. Blank space is air or wind, the way air passes or a passageway where a breeze blows. When a being without clear substance (blank space) is captured, a being with clear substance (motif) can be captured. Let’s talk about sound again: one says he can hear the sound of sprouting in the fields, due to a keen sensibility rather than a keen eye.

 

The motifs of his paintings make sound, but the sound is actually hard to hear. The problem is not whether the sound is really heard or not, but the sensibility and attitude of the subject. If we have a keen sensibility and attitude, we can hear the sound the artist can hear. We have to walk slowly to hear the sounds from things with obscure substance. We have to walk like Walter Benjamin’s stroller, without doing anything; walk like Kant to feel purposeless contentment; and walk without purpose like Zhuangzi’s free and easy wandering. If a sounding box is filled with miscellaneous sounds, other sounds like feeble, faint sounds cannot be heard. His transparent, clear paintings are clamorous with sounds from such feeble, trivial things. Paying attention to the sounds, we might hear the sound of sprouting seeds and the faint yet fierce sound with or without clear substance make.


By Kho Chung-hwan, Art Crit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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