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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공장>에게 던지는 물음
백곤
..... 작가 송계영은 바이오테크놀로지(생명공학)에 관심이 많으며 동식물의 유전자, 염색체, 세포 등을 인간이 작위적으로 변형하는 것에 주목한다. 자연적 상태에서 변형된 유전자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종으로 새로운 삶을 요구한다. 송계영은 바로 이 지점 ‘유전자 조작이 과연 새로운 종의 탄생을 축하하는 차원으로 가고 있는가?’라는 점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녀는 인간을 위한 자연 질서의 변형 혹은 변경이 인간을 이롭게 하는 최선의 길인가, 아니면 인간이 생존하기 위한 필연의 길인가에 대한 질문을 우리 스스로에게 던져야 한다고 말한다. 산업혁명 이후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 위로 수없이 쏟아져 나온 대량생산의 제품처럼 21세기 우리는 살아있는 생명체의 몸뚱아리를 제품으로 생산하고 있다. 오이와 고추를 이종 교배한 식품이 식탁 위에 올려지고 있고, 돼지의 세포에서 단백질을 추출하여 인간의 의료용으로 사용하며, 인간의 장기가 실험실 유리관에서 배양되고 있다. 그뿐인가? 빨간색 프리지아 꽃에 행복해하고, 수박만한 사과에 허기를 달래며 유전자변형 옥수수를 동물의 사료로 주고 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생명공학의 눈부실 발전 덕분이다. 대량생산의 메커니즘은 살아있는 생명체를 이미지화하여 무한복제로 마구마구 찍어낸다. 송계영은 이를 21세기 ‘생명체 공장 시스템’이라고 말한다. ‘공장’은 식물과 동물, 인간 종을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수용하고 생산한다. 복제는 이제 수단이 아니라 방법이 되었다. 상품가치가 변형과 복제를 결정한다. 그녀는 <식물세포공장>, <동물공장>, <프랑켄슈타인> 등 유전자재조합기술(Recombinant DNA technique)에 의해 탄생한 유전자변형생물체(GMO)를 작품으로 선보였다. 작품은 한지를 컷팅하여 표면에 흑연을 도포한 것인데 이는 그녀가 표현하고자 하는 유전자 변형의 개념과 맞닿아있다. 그녀에게 한지는 매우 특별한 재료인데, 종이의 응축력, 긴장과 이완, 강도 등 자연의 살아 숨 쉬는 유기적 섬유질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유기적 구조를 가진 종이 자체에 왁스나 기름, 흑연 등을 바름으로써 자연 상태가 아닌 인위적인 상태, 즉 현대사회의 생산품이 된다는 것이다. 그녀에게 종이의 인위적인 상태는 바로 유전자 조작과 같은 비자연적인 상태로의 이행과 같다. 흑연을 입힌 유전자 변형의 이미지는 결코 되돌아갈 수 없는 비자연의 상태, 환원 불가능한 비유기적인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녀의 <식물세포공장>은 돌이킬 수 없는 유전자 조작의 상태를 잘 보여준다. 각종 식물세포들의 셀이 합쳐진 거대한 식물덩어리는 미래 자연환경을 구성하는 나무와 숲이 될 것이다. 이제껏 자연계에 없었던 생명체를 ‘프랑켄슈타인 생명체’라고 부르듯이 그녀의 작품 안에서 무수히 많은 생명체들이 뒤섞여 거대한 ‘괴물’이 되고 있다. <SPF(specific pathogen free)동물>, <키메라(chimera)> 등 실험용 동물이나 접목을 통한 변형된 생명체의 운명은 복제를 통한 소멸로 향한다. 여기서 소멸이란 인간에 의해 자행되는 파괴의 다른 말일 뿐이다. 새의 날개와 곤충, 뱀과 기능만 살아있는 살덩어리인 다리, 내장과 장기, 식물과 동물 등 모든 생명체들의 집합소인 <복제공장>에서 각각의 생명덩어리는 완전한 개체가 아닌 단지 부분으로만 작용한다.
송계영은 오랫동안 자연에 가하는 인간의 파괴적인 행위에 대해, 특히 동물에게 행해지는 몹쓸 실험들에 대해 연구해왔다. 왜 그녀는 오랜 시간 동안 길고도 지루하게 평면의 종이 한 장을 끊임없이 자르고 뚫고 있었던가? 그녀가 칼로 종이를 오리거나 바늘로 구멍을 뚫고 기름이나 왁스를 바르는 행위는 단순히 유전자변형의 이미지를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비자연적인 행위에 대한 물음을 몸소 체험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유전자변형이 인간에게 해로움을 주어서가 아니라, 인간이 세상의 중심이자 모든 만물의 중심에 서서 인간 이외의 것들, 아니 타자화 된 인간의 몸뚱이까지 통제하고 조정하려는 인간 의지가 스스로를 무너뜨리고 있다고 경고하기 위함이다. 자연을 대하는 데카르트적인 사고방식은 과학이라는 미명아래 가혹하지만 공인된 폭력을 가하면서 그것이 사랑이요, 인간애라고 강요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미래사회 복제인간들이 자신의 주체를 주장하면서 우리들 자신을 복제 몸뚱아리로 규정짓는다면 우리는 과연 그 논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머리가 둘 달린 뱀에게 어느 것이 진짜냐고 묻는 바보스러움을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묻고 있다. 당신은 복제인간인가요? 아니면 단지 이미지인가요? “Never Let me go”를 외치며 우리들 스스로를 인정받고자 하는 소리침이 단지 메아리로 들리지 않기 위해서 우리들은 <프랑켄슈타인 공장>을 의미 있게 반성해야 한다. 송계영의 종이작업에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백곤
홍익대 미학과 석사 졸업, 대안공간 루프 큐레이터, 대안공간네트워크 사무국장, 토탈미술관 에듀케이터, 스페이스 캔 전시팀장. 현 한빛미디어갤러리 전시팀장. 선무_세상에 부럼 없어라, 캔캔프로젝트 Show me your potential 전 등을 기획
전시평론
<프랑켄슈타인 공장>에게 던지는 물음
..... 작가 송계영은 바이오테크놀로지(생명공학)에 관심이 많으며 동식물의 유전자, 염색체, 세포 등을 인간이 작위적으로 변형하는 것에 주목한다. 자연적 상태에서 변형된 유전자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종으로 새로운 삶을 요구한다. 송계영은 바로 이 지점 ‘유전자 조작이 과연 새로운 종의 탄생을 축하하는 차원으로 가고 있는가?’라는 점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녀는 인간을 위한 자연 질서의 변형 혹은 변경이 인간을 이롭게 하는 최선의 길인가, 아니면 인간이 생존하기 위한 필연의 길인가에 대한 질문을 우리 스스로에게 던져야 한다고 말한다. 산업혁명 이후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 위로 수없이 쏟아져 나온 대량생산의 제품처럼 21세기 우리는 살아있는 생명체의 몸뚱아리를 제품으로 생산하고 있다. 오이와 고추를 이종 교배한 식품이 식탁 위에 올려지고 있고, 돼지의 세포에서 단백질을 추출하여 인간의 의료용으로 사용하며, 인간의 장기가 실험실 유리관에서 배양되고 있다. 그뿐인가? 빨간색 프리지아 꽃에 행복해하고, 수박만한 사과에 허기를 달래며 유전자변형 옥수수를 동물의 사료로 주고 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생명공학의 눈부실 발전 덕분이다. 대량생산의 메커니즘은 살아있는 생명체를 이미지화하여 무한복제로 마구마구 찍어낸다. 송계영은 이를 21세기 ‘생명체 공장 시스템’이라고 말한다. ‘공장’은 식물과 동물, 인간 종을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수용하고 생산한다. 복제는 이제 수단이 아니라 방법이 되었다. 상품가치가 변형과 복제를 결정한다. 그녀는 <식물세포공장>, <동물공장>, <프랑켄슈타인> 등 유전자재조합기술(Recombinant DNA technique)에 의해 탄생한 유전자변형생물체(GMO)를 작품으로 선보였다. 작품은 한지를 컷팅하여 표면에 흑연을 도포한 것인데 이는 그녀가 표현하고자 하는 유전자 변형의 개념과 맞닿아있다. 그녀에게 한지는 매우 특별한 재료인데, 종이의 응축력, 긴장과 이완, 강도 등 자연의 살아 숨 쉬는 유기적 섬유질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유기적 구조를 가진 종이 자체에 왁스나 기름, 흑연 등을 바름으로써 자연 상태가 아닌 인위적인 상태, 즉 현대사회의 생산품이 된다는 것이다. 그녀에게 종이의 인위적인 상태는 바로 유전자 조작과 같은 비자연적인 상태로의 이행과 같다. 흑연을 입힌 유전자 변형의 이미지는 결코 되돌아갈 수 없는 비자연의 상태, 환원 불가능한 비유기적인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녀의 <식물세포공장>은 돌이킬 수 없는 유전자 조작의 상태를 잘 보여준다. 각종 식물세포들의 셀이 합쳐진 거대한 식물덩어리는 미래 자연환경을 구성하는 나무와 숲이 될 것이다. 이제껏 자연계에 없었던 생명체를 ‘프랑켄슈타인 생명체’라고 부르듯이 그녀의 작품 안에서 무수히 많은 생명체들이 뒤섞여 거대한 ‘괴물’이 되고 있다.
, <키메라(chimera)> 등 실험용 동물이나 접목을 통한 변형된 생명체의 운명은 복제를 통한 소멸로 향한다. 여기서 소멸이란 인간에 의해 자행되는 파괴의 다른 말일 뿐이다. 새의 날개와 곤충, 뱀과 기능만 살아있는 살덩어리인 다리, 내장과 장기, 식물과 동물 등 모든 생명체들의 집합소인 <복제공장>에서 각각의 생명덩어리는 완전한 개체가 아닌 단지 부분으로만 작용한다.
송계영은 오랫동안 자연에 가하는 인간의 파괴적인 행위에 대해, 특히 동물에게 행해지는 몹쓸 실험들에 대해 연구해왔다. 왜 그녀는 오랜 시간 동안 길고도 지루하게 평면의 종이 한 장을 끊임없이 자르고 뚫고 있었던가? 그녀가 칼로 종이를 오리거나 바늘로 구멍을 뚫고 기름이나 왁스를 바르는 행위는 단순히 유전자변형의 이미지를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비자연적인 행위에 대한 물음을 몸소 체험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유전자변형이 인간에게 해로움을 주어서가 아니라, 인간이 세상의 중심이자 모든 만물의 중심에 서서 인간 이외의 것들, 아니 타자화 된 인간의 몸뚱이까지 통제하고 조정하려는 인간 의지가 스스로를 무너뜨리고 있다고 경고하기 위함이다. 자연을 대하는 데카르트적인 사고방식은 과학이라는 미명아래 가혹하지만 공인된 폭력을 가하면서 그것이 사랑이요, 인간애라고 강요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미래사회 복제인간들이 자신의 주체를 주장하면서 우리들 자신을 복제 몸뚱아리로 규정짓는다면 우리는 과연 그 논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머리가 둘 달린 뱀에게 어느 것이 진짜냐고 묻는 바보스러움을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묻고 있다. 당신은 복제인간인가요? 아니면 단지 이미지인가요? “Never Let me go”를 외치며 우리들 스스로를 인정받고자 하는 소리침이 단지 메아리로 들리지 않기 위해서 우리들은 <프랑켄슈타인 공장>을 의미 있게 반성해야 한다. 송계영의 종이작업에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