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항섭
김순영의 소나무 : 심미세계를 지향하는 소나무의 초상
신항섭(미술평론가)
소나무는 한국을 대표하는 상징목이라고 할 수 있다. 한반도 어디를 가나 소나무가 없는 곳이 없을 만큼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수종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로부터 한국의 가옥은 모두 소나무로 지어졌다.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을뿐더러 목질이 질기고 단단하며 벌레에 강하기 때문에 가옥을 짓는 가장 중요한 건축재로 이용되었다. 또한 일상생활에 필요한 각종 생활기물에도 널리 쓰였다. 한마디로 한국인의 삶과 관련해 소나무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아주 귀중한 존재였던 셈이다. 그래서일까. 한국인에게 소나무는 각별한 정서적인 대상이기도 하다. 문학과 미술의 소재 및 제재가 되는 일이 흔한 것도 이와 같은 정서적인 공감대 때문이리라.
김순영은 적지 않은 시간을 소나무를 소재로 하여 작업해왔다. 소나무를 그리게 된 것은 어떤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단지 사철 푸른 자태를 유지하는 그 형태적인 아름다움에 매료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소나무를 처음 그리기 시작하는 단계에서는 주어진 상황, 즉 눈에 보이는 사실의 재현에 충실했다. 그리하는 것만으로도 소나무가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을 충분히 즐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그 때까지만 해도 사실적인 묘사에 대한 기술적인 완성도를 높여가는 시점이었다.
어쩌면 그런 과정이야말로 소나무라는 소재가 가지고 있는 형태적인 특징 및 생장에 관한 특성 등에 대해 좀 더 깊은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을까. 사실적인 묘사력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은 소재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를 위한 면밀한 관찰의 시간일 수도 있다. 집중적인 관심 및 관찰과 그에 상응하는 실제 작업을 통해 기술적인 완성도를 높여가는 것은 소재주의 작가에게는 필수적인 과정이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소나무의 형태가 심상에 명확히 맺히게 되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소나무를 직접 보지 않더라도 심상만으로 능히 구체적인 묘사가 가능해지는 단계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이 단계에 이르면 눈에 보이는 대로 충실히 묘사하는 것만으로는 무언가 갈증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즉, 심상이 요구하는 무엇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달리 말해 창의적인 욕구가 발동하게 마련이다.
실제로 최근의 작업에서는 확실히 현실과는 다른 자의적인 시각이 덧붙여진다는 사실을 간파할 수 있다. 주어진 그대로의 소나무나 상황에서 벗어나 인위적인 표현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실적인 묘사를 지양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사실적인 묘사에 충실하면서 부분적으로 생략하거나 인위적으로 보태는 등 일련의 조형적인 모색이 이루어진다. 눈에 보이는 사실에 충실하는 사실주의 조형개념으로서는 자의적인 해석의 여지는 없는 듯싶다. 하지만 그의 경우 소재를 생략하거나 또는 실재하지 않는 나무를 끼워 넣는 등 그 자신의 미적 감각이 의도하는 대로 화면을 재구성한다.
이렇듯이 최근 작업은 주어진 조건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그 자신이 추구하는 회화적인 이상에 따라 자의적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자의적인 해석이 지나치게 인위적이어서는 곤란하다는 점을 직시한다. 사실주의 미학 그 본령을 고수하는 가운데 어딘가에 그 자신만의 조형적인 공간을 마련하는 식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요구에 순응함으로써 소나무가 자리하는 그 상황을 현실에 일치시킨다. 거기에 인위적인 해석이 덧붙여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없도록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실주의 미학에 철저히 자신의 존재를 숨긴다. 소나무라는 소재 이외에 그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는 표현을 배제한다. 적어도 형태묘사라는 측면에서는 사실주의에 충실하고자 한다. 따라서 소나무라는 소재가 존재하는 상황을 실제처럼 자연스럽게 처리한다.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하는 사실 자체부터 인위적이지만 감상자가 그러한 사실을 알아차릴 수 없음은 물론이다. 사실주의 미학은 어디까지나 현실의 충실한 재현이어야 하는 까닭이다. 그는 이러한 점을 부단히 의식하면서 작업한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 자신만의 미의식 및 미적 감정을 개입시킴으로써 실제보다 더 아름다운 회화적인 이미지에 도달고자 한다. 사실묘사를 통해 이룰 수 있는 시각적인 아름다움과 함께 내면세계를 반영하는데 의미를 둔다. 눈에 보이는 사실 그 이면에 자리하는 작가적인 의식세계를 투영시킨다. 이를 위해 추상적인 공간의 설정이라는 교묘한 방법으로 의식세계를 침투시키는 것이다.
실제로 50호 크기의 캔버스에 소나무 한 그루만을 세운 작품의 경우 사실적인 형태임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비현실적인 느낌이 든다. 분명히 소나무인데도 어쩐지 사람과 같다는 느낌이 든다. 소나무에 인격을 부여한 결과일까.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하나의 나무에 불과한데도 왠지 말을 걸어오는 듯싶은 착각에 빠져든다. 이러한 느낌은 소나무를 에워싸고 있는 공간, 즉 배경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자세히 보면 배경에는 실재하는 상황이 생략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다만 거기에는 추상적인 공간이 존재한다. 그 추상적인 공간이야말로 그 자신의 존재감이 차지하는 부분이다. 실제의 상황에 존재하는 사물 대신에 의식적으로 열어둔 공간이기에 그렇다.
어쩌면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소나무의 초상을 표현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아름다운 형태미를 가지고 있는 소나무가 인물초상화를 연상케 하는 이미지로 자리하고 있기에 그렇다. 그러고 보면 그는 소나무에 인격을 부여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마치 소나무가 사색하는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렇듯이 그의 소나무 그림은 이제 사실의 재현이라는 단계를 넘어서고 있다. 자연미로서의 대상이 아니라 사유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200호 대작인 겨울 소나무, 즉 하얀 눈 속의 소나무를 소재로 한 작품에서도 소나무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이 생략되고 있다. 즉, 소나무만을 묘사하고 그 주변에 존재하는 잡목을 제거한다. 따라서 순정한 소나무만이 밀집한 상황을 보여주게 된다. 여기에서는 자연스럽게 자리한 소나무의 존재감이 한층 강조되는 경향이다. 줄기에 내린 눈으로 인해 눈과 소나무라는 두 개의 이미지가 교차하면서 간결한 인상을 남긴다. 뿐만 아니라 화면구성에서 줄기 부분만이 드러나고 가지는 화면 밖으로 나감으로써 유연하면서도 힘찬 기상이 느껴지는 소나무의 존재감이 한층 강화되고 있는 까닭이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그의 소나무 그림은 초기의 사실의 재현이라는 견고한 사실묘사를 중심으로 했다. 그러다가 점차 소나무에 대한 진지한 관찰과 사색을 통해 이해가 깊어짐은 물론이려니와 치열한 작업으로 마침내 소나무를 의인화하고 동시에 그 자신의 내면세계를 투영하는 단계에 이르고 있다. 동시에 소나무를 통해 공유되는 민족적인 정서까지도 반영하고 있다. 문인묵객들이 소나무를 탐미의 대상으로 삼았듯이 그 또한 그러한 시각으로 작업하고 있다.
그는 사실주의라는 경직된 조형공간을 탈피하여 자의적인 해석을 덧붙임으로써 단순히 그림의 소재로서 그치지 않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즉 작가적인 미의식이 침투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둠으로써 소나무를 사유의 대상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의 소나무 그림은 오랜 여정을 거쳐 비로소 심미의 세계에 안착하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