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정보
48.2x37.6cm, watercolor on paper, 1986
맥향화랑 개관 38주년 기념전으로 이경희 화백의 九旬 招待展이 맥향화랑에서 개최됩니다.
1986년 8월 울릉도 일주 스케치 여행을 하시며 남기신 40여점의 '보석같은 작품들'과 대한민국 국전 초기(1949년) 특선 작품을 비롯한 이 화백의 대표작 20여점의 대작들이 출품됩니다.
47.9x39cm, watercolor on paper, 1986
玄牛 李景熙 畵伯 九旬展을 개최하면서
참으로 감개무량합니다.
지금부터 약 40년 전, 맥향화랑의 개관기념전(1976.4.7-4.23)에 선생님을 모신 이후, 다시 선생님의 九旬展을 초대한다는 사실에 저희들은 매우 기쁘고 행복합니다.
선생님과의 世俗的인 인연은 1950년대 말 미술교사와 학생의 신분으로 시작되었지만, 그보다 저희 맥향화랑이 대구에서 처음 화랑 문을 열 때, 선생님께서는 마치 자신의 일처럼 앞장서서 잡무까지도 마다않고 기꺼이 도와주셨습니다. 특히, 이런 와중에 선생님께서 보여주셨던 “미술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모습에서 저희는 지금까지의 화랑경영의 살아있는 지표가 되어있으며 저희 역시 미술과의 숙명적인 인연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번 九旬展에 출품되는 작품들의 내용은,
첫째, 1986년 8월, 선생님을 모시고 울릉도 일주여행을 갔었습니다. 당시 선생님은 잠시도 쉬지 않고, 섬에서나 배안에서나 때묻지 않은 “아름다운 울릉도의 자연 풍광”을 하나하나 스케치 하셨다가 40여 점의 멋진 작품을 탄생시켰습니다. 이제 30여년이 되어 비로소 오늘에야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 작품들은 선생님의 원숙기 시절에 화려하게 표출된 수채화 작품들로 실로 보석과 같은 작품들입니다.
둘째, 선생님의 지난 76년간의 畵歷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1940년대 초창기 국전 작품에서부터 각 시기 마다의 대표작 20여점이 오롯이 출품되어 특별 전시됩니다.
한국 근・현대 회화의 큰 흐름과 시대를 증언하는 대구가 낳은 국민 수채화가 이경희 화백의 九旬展에 애호가 여러분들의 깊은 관심과 관람 仰請합니다.
2014. 3
맥향화랑 김성희, 김태수 올림
56.4x40.3cm, watercolor on paper, 1986
대구 수채화의 전통을 현대적으로 계승한 이경희 화백
사생에 기초한 조화로운 세계상
김영동(미술평론가)
“한국수채화의 전통은 이상하게도 대구를 중심으로 이어져왔다. 수채화에서 날카로운 지성을 보여준 이인성, 그리고 굳건한 구조적인 뒷받침을 보여준 손일봉, 거기에다 이 전통을 누구보다 잘 살린 이경희 등 모두가 영남 출신화가들이다.” 이 말은 이경희 선생의 수채화가 대구화단의 역사와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뜻한다. 대구는 오랜 전통 속에 많은 수채화가들의 활동과 업적이 축적된 고장이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먼저 이인성을 떠올릴 수 있겠지만 그보다 앞서 이 지방에 수채화를 들여온 선구자들이 있었고 그들의 뒤를 이은 서동진과 박명조 같은 초기 수채화가들의 활약이 있었다. 그 외에도 대구사범을 나와 교단에 섰던 금경연, 김수명, 권진호와 같은 작가들이 선전을 통해 이름을 떨쳤고 그 명맥은 해방 이후까지 이어졌다. 유화가 본령이었지만 손일봉의 수채화도 영향력이 컸다.
이경희는 비록 독학으로 출발했지만 이런 배경을 뒤로하고 1949년 국전 첫 회에 수채화로 특선을 기록하면서 해방 후 한국화단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를 수채화가로 당당히 인정한 첫 국전의 심사위원이 바로 이인성이었다는 사실 또한 특기할만한 일이다. 두 사람의 직접적인 인연은 짧은 순간이었지만 당시 이경희의 작품에 대한 이인성의 평은 어쩌면 이후 그의 예술이 나아갈 먼 길에 방향타가 되어 왔기 때문이다, 비록 직접 영향은 아니더라도 그의 출발과 긴 도정에 매우 특별한 상징성을 띠는 것은 틀림없다.
이경희도 처음 대상의 재현에 충실한 자세로 출발하지만 사실주의적인 묘사에 치우치지 않았고 표현의 감각적인 면에서나 소재를 선택하는 뛰어난 개성으로 일찍 당대의 칭송을 받은 점이 서로 닮았다. 또한 전통적인 수채화의 현대화를 지향하면서도 항상 심미적인 태도를 견지해왔다는 점에서도 역시 이인성을 계승한 작가로 평가할만하다.
일찍이 개발된 재능
작가의 재능을 짐작할만한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1938년 그의 13세작이라고 하는 작은 그림 한 장이 있다. 그림책이 귀하던 시절 교과서에 실린 삽화를 참고해 공작새를 붓으로 모사한 것인데 수채 물감으로 채색한 이 그림은 동양화에 더 가깝다. 그는 한학자이신 조부와 서도에 관심이 많았던 부친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글씨와 그림에 취미를 가지게 되었는데 약목에 집을 두고 당시 대구에 나가 공직생활을 하던 부친이 종종 물감과 종이를 사다주며 격려했다고 한다. 보통학교 졸업 후 도쿄의 상업중학교로 진학했다가 일제 말기 징병검사로 소환되어 비행병과에 배치돼 대기 중 해방을 맞았다. 미술에 대한 꿈은 해방이 되고서야 들어간 중등교원 양성소에서 비로소 실현될 수 있었다. 주경, 손동진, 김창락, 등 대구출신의 이름난 작가들이 강사진으로 있던 그곳에서 영남화단의 인물들을 직접적으로 접촉할 수 있었던 것이다. 교사로 재직중에는 이화여중에서 실시된 문교부의 미술연수에 참가한 적이 있는데 바로 이인성이 지도한 것이었고 또한 그 자리에 박명조 선생이 같이 있었다. 그가 구축한 조형세계의 바탕이 향토 화가들뿐만 아니라 이인성의 영향과 결코 무관할 수 없는 이유일 것이다. 전쟁 후 두 번째로 열린 국전에 출품했던 <온실>(1953)의 분위기를 보면 적색과 녹색을 주조로 하는 역력한 화풍에서도 충분히 그런 짐작이 가능하다.
조형세계의 특징
이경희 화백에 붙는 수식어들 가운데는 흔히 ‘천진난만하고 순진무구한 화가’, ‘상춘청년의 기질’이란 표현들이 눈에 띤다. 그의 예술세계를 두고 ‘명랑하고 쾌활한 분위기’나 ‘생동감과 건강미’라든가 ‘발랄하고 명쾌한 조형언어’(이상 이태수), ‘싱싱하고 젊음이 약동하는 탄력’(강홍철)을 얘기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이경성은 이경희 수채화의 특징을 요약하면서 ‘속도 있는 선으로 표현된 정확한 대상과 다양한 선들의 통일’을 첫째로 언급하고 그것과 함께 ‘독특한 체질의 색감’들 들었다. 특히 그의 수채화 기법에 대해서는 “화용지에 반영되는 물 사용의 델리킷한 처리는 비법의 하나로 추종하기가 어렵다.”(강홍철)라고까지 했다. 이처럼 그의 작품세계를 보는 여러 시각을 종합하면, 먼저 자연을 모티브로 그것을 빠른 필치로 표출시키는 감각과 손의 작업이 원동력이 되어(이경성), 그 위에 밝고 맑은 투명한 색감이 어우러진 긴장감 넘치는 구성을 구현했는데 그러나 이런 세계에 이르기까지의 연마과정은 끊임없이 새로움을 찾아 정진하는 노력파의 쇄신과 실험, 탐구로 추진되어 왔다.
선생이 작업의 뿌리로 내세우는 것은 항상 사생이다. 모든 작품은 현장에서 직접보고 사생한 것에 기초해서 만들어진다는 점을 늘 힘주어 강조해왔다. 이 같은 내도는 어쩌면 “산잡散雜한 달필達筆”을 지적하며, “수채화는 유화와 달리 즉흥적 감수성에서 붓끝이 유동되는 만큼 먼저 계획적 완성이 필요하다”는 이인성으로부터 받은 평에서 비롯되었는지 모른다. 그래서인지 대개 그의 작업은 밑그림 없이 바로 시작할 경우가 많지만 먼저 충분한 양의 사생을 거친 다음 완성시킨 것이다. 앞서 글에서 이인성은 “부분적으로 화면 구성에 미혹한 점, 쓸데없는 선이 유동됨은 작가의 구상이 부족한 때문”이라며, “한층 자연사실이 탐구성을 갖추어 필치의 정리에서 달필을 삼갈”것까지 요구했었다. 당시 작가는 이런 충고를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였을 것이고 그 후 수많은 사생 작업과 그것을 기초로 이루어진 정선된 선과 감각적인 채색의 명랑성은 바로 그와 같은 지향으로 구축된 것임이 틀림없다. < 중간 생략 >
47.9x39cm, watercolor on paper, 1986
재료 및 매체의 변화와 응용(1980년대 후반)
1980년대 중반부터는 오페라나 발레 공연 등이 새로운 소재로 추가되면서 음악성과 접목이 시도된다. 색채는 더 화려해지고 화면의 생동감을 위해 보라색과 노란색, 적색과 청색 등의 보색대비가 증가한 것도 한 특징이다. 화면에 교차하는 수많은 필선들은 평면적인 대상묘사에 의해 통일감이 부여되어 조화로운 선의 교향악이라고 부를 만 것이었다. 유채로 재료의 전환도 실험되고 추상화의 제작경향도 점차 높아지는 등 부단히 새로움을 추구하는 모습은 80년대 작가의 활동 전반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1990년대 초 예기치 못한 중단이 찾아왔다. 그리고 절필 이후 거의 20여년을 도심에서 은자로 칩거해온 작가가 최근 다시 붓을 들게 돼 이번 전시에 신작까지 출품하신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지금까지 선생의 작품에서 어두운 파토스는 잘 느낄 수 없었다. 항상 밝고 화려한 채색과 부드러우면서도 강렬한 대비, 치밀하면서도 대담한 구성, 달필과 즉흥성이 우세했다. 게다가 철저한 사생에 바탕을 두면서도 현실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렇지만 새로운 시도를 과감히 수용하는 개방적인 자세는 언제나 모더니스트의 태도 바로 그것이었다.
지금까지 한국근대미술의 열망이기도 했던 동양화적인 세계와 서양화적인 세계의 조화와 융합을 이경희 선생은 독자적인 양식으로 성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80년대 후반에 제작한 <팔공산>이란 작품은 기술적으로나 내용적으로 상호 대립적이기도 하고 보완적이기도 한 두 세계를 융합한 최고의 역작이라고 할만하다. 아마도 그의 예술에서 파토스는 그런 파노라마 같은 장관들의 이면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인생에 있었던 것 같다.
<<대구문화예술회관 이경희 원로화가 초대전 평론글 중 일부 발췌>>
포항의부두(2) 106x76cm, watercolor on paper, 19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