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2014-07-30 ~ 2014-08-05
무료
+82.2.737.4678
2014년 하반기 갤러리도스 기획공모 선정 작가
‘게으른 노동 - 예술이라는 낭만적 노동’
이기훈 '목림림(木林林) 독락임장(獨樂林藏)
- 내 집 앞이 더 좋다' 展
목림림(木林林) 독락임장(獨樂林藏)
내 집 앞이 더 좋다,120x120cm, 한지에 먹, 연필, 2014
1. 전시개요
■ 전 시 명: 갤러리 도스 기획공모 – 이기훈 ‘목림림(木林林) 독락임장(獨樂林藏) - 내 집 앞이 더 좋다’ 展
■ 전시장소: 서울시 삼청로 7길 37 갤러리 도스 (Gallery DOS)
■ 전시기간: 2014. 7. 30 (수) ~ 2014. 8. 5 (화) 7일간
2. 기획의도 및 전시내용
갤러리 도스에서는 2014년 하반기에 ‘게으른 노동’을 주제로 릴레이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예술이라는 낭만적 노동’을 부제로 작가들을 공개 모집하였으며 지원한 작가들 중 기획 주제에 부합하는 지와 앞으로의 성장가능성을 기준으로 자체적으로 심사를 하였다. 그 결과 서정배, 유민아, 김혜영, 이기훈, 다니엘경, 전장연 6명의 작가가 선정되었으며, 이들은 7월 9일부터 8월 19일까지 연이어 개인전을 펼치게 된다.
게으름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노는 일엔 부지런하고 노동에는 게으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열심히 일하고 돌아온 사람이 자신의 사생활에는 무관심하기도 한다. 요컨대 관점의 문제다. 어떤 일에서는 대단히 게으른 사람이라고 해서 다른 일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단언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게으르다는 말은 어찌 보면 대단히 근면하다는 표현일 수도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즉 행위자가 충실하고자하는 대상에 따라 게으름과 노동의 의미는 그 위치가 뒤바뀌고 그 경계가 파생된다.
예술에서도 엄연히 노동의 영역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예술에 있어서 노동의 기준은 무엇일까? 과정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노동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고,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결과물이라고 해서 게으름으로 치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작가에게 일반적으로 노동은 지적인 활동과는 반대되는, 결과물을 위한 무의미한 과정들을 의미한다. 하지만 ‘노동’이라는 기존의 단어 안에는 예술이 가질 수 있는 낭만이 없기에 새로운 단어가 필요해 보인다. 분명 예술은 생계를 위한 필요만을 위해 제작되는 제품은 아니다. 예술에는 개인의 삶과 철학이 담겨있는 다양한 의사표현방법 중 하나이기에 특수한 생산 활동으로 인식되어야 할 것이다. 이번 공모기획주제를 ‘게으른 노동’이라는 모순된 단어로 표현한 것도 ‘게으른’이라는 형용사를 통해 노동의 행위에 낭만이 개입할 수 있는 여유를 주기 위함이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해서 작가들이 다양한 작품으로 자신만의 '게으른 노동'을 보여주기를 기대해본다.
목림림(木林林) 독락임장(獨樂林藏)
내 집 앞이 더 좋다.,120x120cm, 한지에 먹, 연필, 2014
3. 전시 서문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박서우)
먼저 밝히고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이 글을 쓰는 나는 서양 미술사를 하는 사람이다. 동양화에 바탕을 두고 작업하는 이기훈의 작품을 그저 회화 작업으로 생각하고 이야기를 풀어갈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서양화와 동양화가 회화(painting) 혹은 작업(work)으로 결과물은 같지만 시작점이 다르다고 생각해서다. 그림을 읽게 될 때 나도 모르게 서양 작가들의 작품이 생각났다.작가의 의도와 상반된 이야기를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몫이다.
목림림(木林林) 독락임장(獨樂林藏)
내 집 앞이 더 좋다., 24x19cm(x3), 한지에 먹, 연필, 2014
이기훈은 나무를 주제로 꾸준하게 작업해 왔다. 나무 한 그루를 그리기도 하고 나무가 모여 숲을 이룬 장면을 그리기도 했다. 이번 전시에서도 그는 나무를 택했다. 그러나 그 이전 보여주었던 나무들보다 더 한데 모여 덩어리처럼 보인다. 나는 이 그림들을 처음 보았을 때 초현실주의 작가 에른스트(Max Ernst) 작품들이 떠올랐다. 에른스트는 프로타주(frottage)나 드리핑(dripping) 기법을 사용해서 꿈, 상상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화를 그렸다. 그림에서 흐르는 듯한 이미지가 이기훈의 숲 그림들과 닮아 있다. 어떻게 보면 무릉도원 이미지와도 닮았는데 몽글몽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이미지는 확실한 형태를 거부한다.
형태적인 부분에서 봤을 때 이기훈은 정확한 묘사를 피하고 있다. 다른 것들을 그리지 않은 흰 화면에 검정으로 그린 이미지는 깔끔하게 정리된 것 같다. 그것도 잠시, 자세히 들여다 보면 겹쳐진 선과 면들은 비정형 형태를 가진다. 이 부분들은 계산하거나 정확한 묘사를 한 것이 아니지만 숲을 쳐다보듯 먼 곳에서 화면을 바라보면 깔끔한 경계들을 가진 듯 보인다.
사실 이 그림들은 나무를 그렸지만 철저한 추상이다. 서양에서는 구체적인 형태가 있다 하더라도 내용에 있어 개념을 표현하면 추상으로 간주한다. 작가의 말에 의하면 이 그림은 빈 공간에 대한 그림이라 한다. 그러고 보니 동양에서는 일찍부터 관념을 그려왔다. 동양에서는 서양과 달리 풍경을 직접 보고 그리기보다 상상하고 관념적인 산수화를 주로 그렸다. 풍경은 그리되 그 안에 내면적인 것을, 다시 말해 사의(생각)를 그리고자 했다.
목림림(木林林) 독락임장(獨樂林藏)
내 집 앞이 더 좋다., 72.5x60.5cm(x4), 캔버스에 카본,2014
나는 이 부분에서 절대 순수를 주장했던 말레비치(Kazimir Severinovich Malevich)가 떠올랐다. 그는 보이지 않는 ‘무(無)’를 그리고자 했다. 처음에 그린 〈검은 사각형〉(1915)같은 경우 회화의 본질을 그리고자 했다. 특히나 그가 그린 〈흰색 위 흰색 사각형〉(1918)을 보면 ‘완전한 없음‘을 이야기 한다. 절대적인 순수 완전한 정신성을 표현한다. 그리는 주제나 대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나는 말레비치가 그린 흰색 공간, 빈 공간과 이기훈이 말하고자 하는 본질과 같다고 본다. 이러한 본질적인 것을 칸딘스키도 이야기한다. 칸딘스키는 자신의 작품 〈최초의 추상화〉(1910)와 같은 그림들에서 형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며 내적인 에너지를 표현하고자 했다. 이들은 끊임없이 본질에 대한 탐구를 했고 알 수 없는 힘을 끄집어내고자 했다. 그렇듯이 이기훈도 작품에서 그 무언가를 그렸다.
목림림(木林林) 독락임장(獨樂林藏)
내 집 앞이 더 좋다., 140x70cm(x2), 캔버스에 카본, 2014
그는 이번에 전시에서는 캔버스 위 용매제에 녹인 탄소 가루를 얹어 작업을 했다. 얼핏 보기에는 캔버스라는 재료는 서양적이다.하지만 그는 늘 동양화의 가장 근본적인 재료와 기법을 고민한다. 지난 전시에서도 그는 철저하게 종이와 먹만을 이용했다. 그 먹의 성분과 같은 연필을 사용하고 또한 연필과 같은 탄소 가루로 그림을 그렸다. 다시 말하면 그는 본질적 성격이 같은 재료들을 사용하고 있으나 결과물은 매우 다르게 느껴진다. 이번에 새롭게 시도한 캔버스 작품들은 윤이 나고 조금은 차가운 이미지 때문에 더욱 서양화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본질을 절대 잊지 않는다.
이기훈의 그림은 동양화와 서양화가 한 자리에 모여 있는 그림 같다. 현대 사회를 사는 작가에게 여러 가지가 함께 공존하고 영향을 받기에 당연하다고 볼 수 있을지 모른다. 모든 모순(irony)을 지니고 사는 사람들이 현대인일지 모른다. 첨단 기기를 사용하지만 원초적인 자연을 꿈꾼다. 서양의 문명을 배우지만 전통적인 가치는 더욱 강조된다. 진보를 추구하지만 보수적인 자세를 버리지 않는다. 어찌 보면 이런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지니며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지 모르겠다. 나는 이런 모습이 이기훈에게 극명하게 나타난다고 본다. 동양화를 전공했지만 서양화 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눈으로 본 풍경을 그리지만 관념을 표현하는 등, 양면적인 모습을 가진다.
미국 네오프래그머티즘(Neopragmatism)을 대표하는 리차드 로티(Richard Rorty)는 반대되는 관점을 동시에 가지는 사람을 아이러니스트(Ironist)라고 명명한다. 그가 주장하는 것은 마치 탁자에서 한 면과 다른 면이 만나는 모서리 부분에 위치한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서로 다른 관점을 인정하고 받아들여 모서리에 위치하는 사람을 회색분자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중간자적 입장과는 엄연히 다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원성을 넘어서서 한쪽 편에 위치하지 않고 모든 면을 수용하는 입체적인 인간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이기훈은 이런 의미에서 아이러니스트다. 제작 방법과 개념적인 표현에 있어 동,서양 방법을 넘나든다. 그러므로 그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내적 본질을 보여주고 싶을 뿐 어디에 속하느냐는 논란은 소용없는 일이다. 예를 들어 그는 “내가 그리는 것은 나무 그림일 뿐인데 다들 왜 나무를 그리냐고 묻는다. 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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