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정보
갤러리 스케이프에서는 2007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작가인 이형구의 개인전 <MEASURE>를 9월 2일부터 10월 19일까지 개최한다. 이번 개인전은 2년만에 선보이는 작가의 신작이 공개되는 자리로, 설치, 조각, 드로잉에 걸친 20여점의 작품이 전시된다.
이형구는 예술의 상상력과 과학적 지식의 엄밀함을 동원하여 신체의 변형과 왜곡, 확장을 실험적으로 선보여왔다. 신작 <MEASURE>는 말과 인간의 신체에 대한 작가의 엄격하고 객관적인 지식의 체계를 바탕으로 한다. 이러한 태도는 그의 전작에서의 고고생물학, 인문학적인 계보를 이어나가나, 광학적 시점을 기반으로 했던 시지각의 영역은 신작에서 운동감각적 세계로 확장되어 간다.
신작에 대한 작가의 개념은 전시제목에서도 암시된다. 영어로 Measure는 수학적인 측정 외에도 리듬, 율(律)의 의미를 지니며, 이러한 어원은 희랍어 Metron으로 거슬러간다. 신체가 지닌 시지각의 한계로부터 작가는 직접 착용 가능한 장치를 고안해, 자신의 신체와 세계 사이의 운동감각적 탐색을 감행한다. 말의 보법에 몰입된 작가는 현실적 조건과 신체의 한계, 구속으로부터 저항한 그만의 박자와 동선을 창조해 낸다. 이번 전시는 작가의 신체로부터 측정된 리듬을 통해 이 세계의 분절된 시공간과 관계할 자리가 될 것이다.
사색하는 몸: 이형구의 Measure
맹지영(두산갤러리 큐레이터)
“아무리 그러하더라도 라데츠키 행진곡을 떠올리며……연희동으로 향하여 안산을 넘어가본다. 서대문에서 시청을 거쳐 을지로까지, 종로에서 광화문까지, 사간동에서 그림구경, 그리고 사직터널을 통과하여 신촌으로. 걷고 걷고 그렇게 걷다 보면 어느새 다섯 시간이 지나 있다. 머리가 맑아진다.” (이형구)
작가는 매일 걷고, 걷고 또 걷는, 목적 없어 보이는 행위의 익숙하고 일상적인 삶 속에서 자신을 대면한다. 비슷한 일상 속에서 매일 매일 다른 얼굴을 들이밀고 아무렇지도 않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생경한 얼굴을 볼 때마다 턱 밑까지 차오르는 답답함은 어디로 가질 않는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걷고 또 걷고 걷는다. 반복적으로 걷는 행위를 통해서 시선이 외부에서 내부로 서서히 옮겨 간다. 외부에서의 들쑥날쑥하고 불균형하고 불규칙적이라고 느껴졌던 것들은 사실 내부의 그것이지만 쉽게 인지되지 않는다. 내부의 관찰자는 집요하게 그 불균형을 바로잡아 보려 하지만 좀처럼 쉽지 않다. 걷고 또 걷는 중에 대면하는 소리, 공기 중의 냄새, 그리고 시선의 속도만큼 달라지는 풍경들은 어느새 몸이 만들어 내는 소리와 리듬에 오버랩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신체 내부의 움직임이 치열하게 외부와 전투를 벌이고 난 후 기진맥진해 질 무렵에서야 비로소 내부와 외부의 의미는 약해진다. 얼마나 시간이 흐른 것일까. 잠시 숨을 몰아 쉰 후 이제 그는 자신의 몸에 각인된 시간을 역추적하기 시작한다.
이형구는 반복적인 걷기와 같은 일종의 수행적 행위를 통해 자기 스스로를 망각하면서 동시에 극도로 부각시키는 모순적 상황의 알레고리를 만든다. 그는 자신을 조련하고 훈련시키면서 슬그머니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데, 그의 일련의 작품들은 자신을 단련시키면서 만들고자 하는, 혹은 성취하고자 하는 어떤 지점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과는 다른 무언가로 바뀌고 싶은 욕망은 현재에 대한 불만족이나 결핍으로부터 출발하지만 결국 그 결핍이 충족되는 순간 밖으로 드러내 보이려는 모순과 맞닿아 있는 것이다. 단조롭고 반복적으로 보이는 행위를 통해 얼굴을 내민 그 욕망은 필연적이지만, 그것을 드러내는 도구는 임의적이다. 그리고 그 도구를 통해 무엇인가를 만드는 행위는 자신을 단련시키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소유하고 드러내고자 하는 욕구이기도 하다. 그가 신체의 일부를 확장하거나 왜곡시켜 보이는 기구나 장치를 만든 것도, 그것을 장착하고 돌아다니거나 사진으로 남기거나, 그 장치들을 만드는 실험실과 같은 그의 작업실도 작품의 일부로 만드는 것도 임의적인 선택에 의한 필연적 결과였다. 말을 길들이듯 자신을 조련하는 일련의 과정을 녹여 낸 5분 8초간의 싱글 채널 비디오 <Measure (2014)>는 마치 일종의 엄숙한 제의처럼 보인다. 이 영상에서 흰 공간 안에 백색의 옷을 입고 등장한 작가는 결의에 찬 표정으로, 말이 승마자와의 조화를 이루어 가장 자연스럽고 아름답게 보이는 것을 평가하는 마장마술을 말이 아닌 자신의 몸으로 재연한다. 그는 실제 말 대신 말의 뒷다리 골격을 연상시키는 형태의 알루미늄 튜브로 만든 기구 <Instrument 01 (2014)>를 장착하고 일체가 되어 움직이는데, 여기서 그의 반복적인 걷기와 훈련이 내재되어 있다. 익숙했던 구조가 바뀌면 존재 방식도 바뀌게 된다. 그에게 자연스러웠던 걷기에서의 리듬은 ‘부자연스러운’ 말의 움직임으로 치환되고, 그 부자연스러움은 지속적이고 강도 높은 훈련으로 다시 자연스러워진다. 즉, 그는 일상의 ‘자연스러운’ 리듬을 흐트러뜨리고 방해하여 감춰져 있었거나 전혀 새로운 자신만의 리듬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여기서 이형구가 만들어 내는 ‘자연스러움’은 비단 반복적인 행위의 결과로 만들어진 움직임뿐만 아니라, 그의 집요한 손의 노동으로 탄생한 조각, 조형물, 드로잉들도 포함한다.
시인이자 평론가인 데이비드 리바이 스트라우스는 그의 저서 「머리로부터 손으로」(2010)에서 조각가 마틴 퍼이어의 작품을 논하면서 서로우의 “우리는 손을 통해 머리로 사유한다.” 라는 문장을 인용한다. 그는 “우리는 노동과 손이 주는 즐거움을 통해 대상을 파악 함으로서 그것을 이해한다. 또한 반복적으로 지각을 통해 개념적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쪽이 지나치게 강조가 될 경우 불균형을 초래한다.”고 이야기한다. 이형구의 조형물들 <Chapter (2014)>, <Instrument 01 (2014)>, <Through Small Windows (2014)>, <MΩ 140 (2014)>과 드로잉들 <M 01 ~ 03 (2014)>, <Ritual (2014)>은 그가 영상작품 <Measure (2014)>에서 보여주었던 비장하지만 유희성을 잃지 않는 가벼움에 균형을 맞추면서, 보이지 않는 무수한 과정을 감지할 수 있는 일종의 단서를 제공해 준다. 마치 장인의 수공품을 연상시키는 이형구의 밀도 높은 기술적 완성도를 지닌 조형물들은 숭고한 제의적 노동의 과정을 담은 수행적 드로잉과 더불어 공명한다. 그는 브론즈 <Chapter (2014)>에서 작품의 물성이 가진 견고하고 단단한 묵직함으로 ‘Measure’ 를 시작한다. 그리고 시각적으로 부재한 작업의 과정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것이 아닌 자신만의 정교한 매뉴얼을 통해 관객을 안내하며 전체를 조율한다. 그는 완벽에 가까운 조형미를 보여 주는 데 있어서는 치밀하고 촘촘하면서도 과도하지 않도록 가벼움을 유지한다. 그리고 182x91 cm 크기의 납 판 6개에 조련/훈련의 흔적을 담은 <Ritual (2014)>과 같은 작품에서는 무르고 유연하여 외부 자극에 대한 취약한 물성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팽팽했었던 과정에서의 긴장감을 느슨하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
리바이 스트라우스가 마틴 퍼이어의 작품이 주는 파급력 중 하나를 인간과 노동의 관계를 가시적이고 직접적인 관계로 자리매김 해준 것이라는 지적은, 언제부터인가 몸의 사유가 집적된 물성이 부재한 작품들의 과다출현이 빈번한 요즘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래서 이형구가 만들어내는 조형물과 드로잉이 만들어내는 생경한 풍경은 관객에게 시각적 만족을 주는 동시에 감각의 착란을 일으키도록 만들기도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정교하고 매끈하게 만들어진 물성은 그것이 현전하고 있음을 깨닫게 하는 것이 아닐까?
작가소개
홍익대학교 조소과와 예일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한 이형구는 2007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전시에서 ‘아니마투스’ 시리즈를 선보이며 국제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가상의 만화캐릭터를 고고학적으로 접근한 ‘아니마투스Animatus’, 안구추적, 즉 시선에 대한 연구물인 ‘아이 트레이스Eye Trace’, 확대경을 통해 신체를 객체화시킨 ‘디 오브젝추얼스 The Objectuals’, 관상학을 바탕으로 두상을 희극적으로 재구성한 ‘페이스 트레이스Face Trace’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