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고뇌가 배어 있는 첼로 음악의 선율을 화폭에 담은 2006년 작고한 화가 이양노의 작품, 감자를 소재로 하여 생명의 아픔과 신비를 탐색해온 이양노의 딸 화가 이규희, 그리고 화폭 속에 소외된 몸뚱아리로 자신의 존재성을 표현하는 그녀의 딸 최아영, 이렇게 3대가 생동하는 생명의 내면에 담긴 의미를 추적한다.
이양노 : 생명의 선율
1.
천재적인 소질을 타고난 첼리스트 장규상은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에게 수천만 원대의 첼로를 선물로 받기도 한 유망한 서울시립교향악단 첼리스트였다. 그리고 그의 자녀 현이와 덕이는 남매 대중음악 싱어송라이터로 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장규상에게는 간절히 바라는 꿈이 한 가지 있었다. 특권층의 전유물이 되어버린 첼로의 선율을 세상의 가난하고 힘든 사람에게도 들려주고 싶었다. 그들의 고단하고 지친 마음을 위로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소망은 견딜 수 없는 큰 불행이 닥친 이후에나 겨우 찾을 수가 있었다. 그의 아내는 그를 떠났고, 아들 현이는 암에 걸려 그를 정성으로 간호하던 덕이가 수면 제 과다복용으로 세상을 먼저 떠났으며 같은 해 아들 현이 마저 그의 곁을 떠났다. 두 아이를 잃은 장규상은 첼로 하나를 들고 머나 먼 여행을 떠났다. 결핵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 나병을 앓는 사람들, 고아원, 양로원, 교도소 등 사랑이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가 첼로를 켜며 희망과 행복을 전해 주었다. 언론은 그를 걸레스님 중광, 시인 천상병 등과 같이 기인으로 조명했다. 1996년 장규상 마저도 암에 걸려 세상을 떠나려 할 때 그는 말했다. “자유의 세계로 떠납니다. 좀 더 사랑을 전해 주지 못하고 떠나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2.
화가 이양노의 화실에서는 항상 클래식 음악의 선율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미대 대신 음대를 가려고도 생각할 만큼 음악을 사랑했다. 바흐, 베토벤, 브람스, 말러, 쇼스타코비치 등 깊고 장중한 선율을 특히 좋아했다. 첼리스트 장규상과의 인연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어느 날 갑자기 이양노는 모진 암으로 투병하던 장규상을 큰 화폭에 담았다. 한지위에 무채에 가까운 파스텔로 단숨에 그려나간듯한 화폭에는 깊고 무거운 첼로의 선율이 묻어 나온다. 흰 두루마기에 길고 흰 수염. 도대체 첼로와 어울릴 것 같지 않건만 그림 속의 장규상은 첼로와 완전히 하나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가 추구했던 희망과 생명의 선율이 그에게 닥쳤던 삶의 고뇌와 함께 온몸으로 흐느낀다.
3.
근 10년이 흐른 후 화가 이양노는 다시 첼리스트 장규상을 화폭에 담았다. 비극 그 밑바닥에서 끌어올린 장규상의 생명의 선율이 그를 다시 붙잡았던가? 이번엔 바흐의 무반주첼로조곡이 되어 그 심연으로 내려간다. 거기 덩그러니 장규상이 앉아 있다. 움직임도 없어 보이고 손에는 활조차 잘 보이지 않는다. 인물은 배경 속에 묻히고 배경은 인물을 끌어당긴다. 그래서 조금은 어색하게 치우쳐 만들어진 텅 빈 공간에 그윽한 첼로의 저음부가 깔린다.
4.
<첼리스트 장>, <말러를 듣는 사람>, <노동자> 등. 화가 이양노는 말년에 극도로 색상을 아낀 일련의 인물화를 남겼다. 어쩌면 그에게 생명의 찬란한 빛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리려는 듯. 그림 속 인물들은 본래 그렇게 가만히 앉아 있는 것처럼 움직임을 완전히 제거했다. 화가는 대상인 인물의 생생함에 더 이상 다가가지 않는다. 오직 대상을 자신의 세계로 끌어잡아당겨 화폭에 묻어버린다. 형체는 무너져 배경과 하나가 된다. 평생 수많은 초상화, 인물화를 그렸던 화가 이양노는 그렇게 마지막 인물화를 남겼다. 대상의 간섭을 배제하고 자신만의 사색 공간을 그곳에 불어넣었다. 그의 작업실에 늘 울려퍼지던 그윽한 선율과 함께.
이규희 : 생명, 그 부드러운 유영과 날카로운 파열
1.
3년 전 작가의 첫 번째 개인전에서 보여준 감자는 서민처럼 아무렇게나 생긴 감자들의 자기 존재 선언이었다. 번식을 둘러싼 생명과 죄악의 충돌이 담겨진 채 땅과 함께 조화롭게 호흡하고 있었다. 2014년 작가의 감자는 그 추상성이 한결 진척되어 그 못생긴 얼굴이 작게 뭉뚱그려져 모습을 감추고 자신의 내면에 담긴 생명의 역동성을 분출한다.
2.
모든 생명은 원색에 가까운 푸르름이나 연록으로 표상되곤 한다. 그러나 작가에게 생명은 점점 땅의 색깔을 찾아간다. 땅과 직접 부대끼며 잉태된 생명이기에 감자는 땅에서 멀리 벗어나지 못한다.
3.
감자에 담긴 생명은 가늘고 부드러운 선율을 사방에 퍼뜨린다. 드로잉 작품에서는 다른 모든 요소를 뒤로 감추고 이 선율이 생명의 모든 것을 시각적으로 묘사한다. 그렇다. 생명은 그런 것이다. 자기 자신에 머물러 있지 않고 밖을 향해 소통의 유영을 계속한다. 작가의 부드러운 손길이 이제 곧 그 생명이 된다.
4.
작가는 특별히 주목할 것 없어보이는 감자꽃에 집중한다. 그 꽃잎이 날카로운 찢겨짐으로 화폭에 강인한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꽃은 생명의 질적 전환을 상징한다. 그리고 생명의 질적 전환은 견디기 힘든, 그러나 꼭 넘어서야만 하는 단말마를 토해낸다. 그래서 거칠고 굵은 검은 꽃잎의 선이 생명의 또 다른 요소인 파열이 되어 부드러운 생명의 유영 사이를 가로지른다.
최아영 : 살아있지 않은 생명의 무게감
1.
화가는 객관화된 작품과 이를 바라보는 관람객 사이, 어느 공간에 위치해 있어야 하는가? 작품은 화가로부터 세상에 내동댕이쳐진 소외된 객체인가? 화가는 관람객보다도 더 뒤편에 서서 관람객의 반응을 흥미롭게 바라보는 전지적 존재인가? 작가 최아영은 화가 자신으로부터 소외되는 작품을 거부하기 위해 어떻게든 그림 안으로 비집고 들어간다. 자기 자신 이외에 보여줄 것이라곤 없는 것처럼 오로지 자신의 존재감만으로 소통을 시도한다.
2.
그렇게 비집고 들어간 공간은 결코 익숙하지 않은 낯선 공간이다. 그도 그럴 것이 최아영은 자신의 몸뚱이 이외에 자신을 규정하는 일체 모든 것은 버렸기 때문이다. 그녀와 그림 속의 공간을 따스하여 연결시킬 그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않다. 시간은 멈추고, 아니 시간성 자체가 사라지고, 연결고리 없는 낯설고 뒤틀린 공간 속에 그 어떤 움직임도 거부하는 조각상처럼 작가 최아영은 온전히 자신을 드러낸다.
3.
그런데 어찌 그렇게 당당한가? 생명을 구성하는 시간, 공간, 움직임, 감각, 이 모든 것을 사장한 나의 몸뚱이는 원래 이렇게 무거우면서도 모던한 자태를 가지고 있었던가? 생의 그 순수한 형질 속에는 이토록 강렬한 힘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생명을 빚어내는 그 모든 외래적 요소를 벗어던질 때 비로소 만나는 생명의 경이로운 힘. 작가는 이를 자신을 물체화 하려는 노력을 통해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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