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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석 : SOPHIE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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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석 : SOPHIENS
2018-11-16 ~ 2018-12-30
가나아트센터

 
 
전시 개요

전  시  명 윤영석 개인전 《SOPHIENS》
장      소 가나아트센터 (서울시 종로구 평창30길 28)
주      관 가나아트
일      시 2018. 11. 16 (금) – 12. 30 (일) (총 45일간)
오  프  닝 2018. 11. 16 (금) 오후 5시 
출품  작품 조각 및 설치 작품 6 점, 평면 작품 20여 점  


전시 소개

가나아트는 자신의 철학적 탐구를 설치 작업과 렌티큘러에 담아내는 윤영석(b. 1958-) 작가의 개인전, 《소피엔스: SOPHIENS》를 개최한다. 서울미대 조소과와 동 대학원 졸업 후, 독일 슈투트가르트 미술대학 대학원 조각과를 졸업한 윤영석은 전통적 시각예술의 재료와 기법에서 벗어난 다양한 오브제와 기술 요소들을 활용하여 개념적이고 실험적인 작업을 이어왔다.

그는 1998년 가나화랑에서의 개인전 《심리적인 사물, 생물학적인 사물》에서 실리콘, 유리, 렌즈 등의 비전통적인 조각 재료를 활용한 <유리 가슴>과 같이, 일상적 사물을 닮았으나 그 재료와 사용에 있어 심리적 거리감을 주는 작품을 선보인 바 있다. 또한 2000/2001년 시즌 뉴욕 P.S.1/MoMA의 아티스트 레지던시에 참가하여 <애저농원愛猪農園 Piggy, piggy plantation> 프로젝트를 통해 생명복제와 인공생산의 문제를 다룬 적도 있다. 2007년 로댕 갤러리에서의 개인전, 《3.5차원의 영역》에서는 마이크로 렌티큘러 렌즈를 통한 착시효과에 주목한 <시시각각時視角覺>, <모멘텀momentum> 등을 선보이는 등, 생명과 영원성, 문명의 발달과 그 이면, 감각과 지각의 왜곡 등 철학적인 주제를 꾸준히 다뤄왔다



명침 鳴針crying needle, 2018, aluminum casting, acryl pipe, f.r.p, 220x150x750cm


이번 전시는 주제적인 측면에서 이전까지의 전시와 맥락을 같이 하고 있으며 자아성찰적 의미가 보다 강조되었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전시의 제목인 ‘소피엔스’는 그리스의 궤변론자들을 지칭하는 ‘소피스트’와 현생 인류를 의미하는 ‘사피엔스’가 결합된 작가의 신조어이다. 문명의 발달 속도에 따라가지 못하고 여러 문제에 봉착하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을 본인 스스로의 궤변에 빠진 소피스트에 빗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소피스트의 궤변은 때때로 기존의 낡은 관습과 사회통념을 깨부수는 훌륭한 도구가 되기도 한다. 윤영석 작가는 본인 스스로 소피엔스를 자처하며 작품이라는 형태로 궤변을 제시한다.

제1전시장에 들어서면 관람자는 우주인을 연상시키는 조형물을 맞닥뜨리게 된다. 갑각류나 곤충 같은 생물의 외형을 기계와 같은 매끈한 표면과 무기질적 소재로 표현한 <아이오AHIO>는 디지털 문명에 적응하여 머리가 비대해지고 상대적으로 신체가 나약해진 인간을 형상화한 작업이다. 디지털 문명의 발달로 개인이 경험할 수 있는 세계의 폭은 넓어졌지만, 역설적으로 그 시야는 좁아져 버렸다. 작가는 자동차 사이드 미러의 문구인 '사물이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에서 착안하여 <아이오>에 후사경을 함께 설치했다. 이는 앞은 보지 않고 스마트폰만을 들여다보며 걷는 현대인을 연상시킴으로써, 화면보다 가까이에 위치한 현실의 삶을 돌아보지 못하는 현 세대를 풍자한다. 특히 작가는 전시장 바닥에 회로도를 붙이고 그 위에 작업을 설치함으로써 IT 기기에 사로잡힌 인류를 표현하였으며, 이는 ‘과학 문명에 대한 반문’이라는 작가의 주제 의식을 선명히 드러내는 것이다.



AHIO (artificial human illusional object), 2018, aluminum casting, f.r.p, 170(w) x 160(d) x 273(h) cm (each)


제2전시실은 '감각의 오류' 중 시각의 오류를 다룬 렌티큘러 작업들이 관람자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렌티큘러 렌즈는 통과한 빛을 굴절시켜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각각 다른 이미지를 보이게 함으로써, 관람자의 움직임에 따라 이미지가 변화하거나, 혹은 입체적으로 보이도록 하는 효과를 갖고 있다. 주로 홍보매체나 3D영상 기술에 활용되던 기술이지만, 윤영석은 이것이 만들어내는 실재와 감각이 불일치하게 되는 현상에 주목하여 작품에 차용하였다. 제2전시장의 초입에서 관람자들은 실제 강아지가 창 밖에서 주인을 기다리는 듯한 모습의 작품과 마주하게 된다. 소니에서 만든 인공지능 반려봇, 아이보에서 착안한 <아이보의 창>은 이동하는 관람자의 동선에 따라 움직이는 듯한 시각적 오류를 일으킨다. 가짜 강아지의, 가짜 창 너머 움직임은 실재와 가상의 간극을 역설한다. <네온 G O D>는 온라인 게임의 이미지를 3D 렌티큘러를 통해 구현한 작품으로, 그 내부에 가상 공간이 실재하는 듯한 착시를 일으킨다. ‘GOD’라고 적힌 가상의 네온 사인은 실재하지 않는 것이지만, 마치 실제의 조명과도 같은 강한 빛을 뿜어낸다. 대기중 0.0012%의 희박한 비율로만 존재하는 네온이 그 강렬한 빛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듯, 게임 속 가상 공간 역시 실재하는 공간은 아니나 그 무엇보다도 강렬하게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것임을 작가는 착시 현상을 통해 전달하고 있다. 

<이∙내∙경 耳內景>을 비롯한 제3전시실의 작업들은 윤영석 작가가 젊은 시절 사고로 얻게 된 이명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낸, 자전적 의미를 가진다. ‘귀 내부의 풍경’이라는 제목과 같이 작가는 자신에게만 들리는 정체 불명의 소리를 초현실적인 형태의 조각을 통해 풀어냈다. 전시장의 벽면에 설치된 거대한 귀를 사이에 두고 설치된 날카로운 침봉은 작가가 겪어온 귀의 고통을 시각적으로 경험하게끔 한다. 또한 이명의 치유를 위해 사용되는 초음파 사운드와 현대음악을 융합한 미묘한 소리가 전시장에 울리며, 관람자들은 작가에게만 들리는 이명의 실체를 그 일부분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작가는 존재하지 않지만, 자신에게만 들리는 소리인 이명을 작업의 주제로 삼아, 감각을 통해서 세상을 인지할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있어서 감각과 지각의 불완전성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그리고 우리가 인지하는 모든 감각이 결국은 주관적인 것이며 절대적인 진리가 아닐 수 있음을 되짚고 있다.



Neon G O D, 2018, 3D micro lenticular lens, 140 x 110 cm (each)


외계인과 같은 외양으로 현 세대를 표현한 <아이오>, 눈과 귀를 현혹시키는 렌티큘러와 설치 작품들을 통해 윤영석은 과학이 주는 편리에 취하여 감각적 오류에 익숙해진 현재의 우리를, 그리고 작가 자신을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인지하고 있다고 믿는 것들이, 진정으로 올바른 것인가에 대해 그는 의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윤영석의 작품은 관람객이 그 앞에 서서 작품과 상호 소통할 때에서야 비로소 완성된다. 본 전시를 통해 관람객들이 렌티큘러 작업 앞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며 시각적 오류를 경험하고, 귀를 상징화한 작품과 함께 전시장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또는 스스로 생각해낸 각자만의 의미를 찾아가기를 바란다. 그의 작품이 만들어내는 감각의 오류가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인식과 사고방식으로 우리를 이끌 것이다. 



작가 약력

윤영석 尹永錫 b.1958-

학력
1984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졸업
1987 서울대학교 대학원 조소전공 졸업
1994 독일 슈투트가르트 미술대학 조각과 대학원 연구과정 졸업

주요 개인전
2014 Ksana, 앨런프리브 갤러리, 위스콘신
2011 Timelessness, 갤러리 아트사이드, 서울
2007 3.5차원의 영역, 로댕갤러리, 서울
1999 時間의 寺院, 평창동 토탈미술관, 서울
1995 사물의 병원, 울름예술재단 갤러리 코른켈러하우스, 독일
1994 우성 김종영 조각상 수상 기념 전: 생물학적 사물, 심리적인 사물, 가나화랑, 서울

주요 단체전
2016 노출된 콘크리트, JCC 미술관, 서울
      서울대학교 개교 70주년 기념전, 서울대학교미술관, 서울
2015 Alma Mater전, 가나아트센터, 서울
      김종영 탄생 100주년 기념전, 김종영미술관, 서울, 경남도립미술관, 창원
2013 타통 국제 조각 비엔날레, 대동시, 중국
      구체경 힐링그라운드, 올림픽미술관, 서울
2009 예술과 테크네, 제주도립미술관, 제주
      샹하이아트페어, 갤러리 아트사이드, 샹하이
      문예진흥원 미술회관 30주년 기념전: 대학로 100번지, ARKO, 서울
      Es-Corazon-피스컵, 안달루시아, 스페인
2008 제5회 부산 비엔날레 본 전시: 낭비, 부산시립미술관, 부산
      반응하는 눈: 디지털 스펙트럼,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2007 유클리드의 산책,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2006 Here I Am Now, 센트럴 세인트마틴대학 갤러리, 런던
      항해일지, 영은미술관, 경기도 광주
2005 Dienstag 14 Uhr, 슈투트가르트 대학 Neubau museum, 슈투트가르트, 독일
      Banana Suffer, 갤러리 Ieum, 따샨즈 798, 베이징, 중국
      성곡미술관 10주년 기념전: Cool & Warm, 성곡미술관 서울
2004 올림픽미술관 개관 기념전: 정지와 움직임, 올림픽미술관, 서울
      Unusual Combination, 플러스갤러리, 나고야
2003 영은미술관 레지던시 쇼: 공간의 이동, 영은미술관
      청계천 프로젝트: 물 위를 걷는 사람들, 서울시립미술관
2002 한국현대조각 특별전: 조각이란 무엇인가, 예술의 전당, 서울
      巫dia: 한국의 미디어 아트와 샤머니즘, 연세대학교 박물관, 서울
      Intersection of Art & Architecture 서울 런던 워크샵, 여의도 IMA, 서울
2001 Stranger/Etrangers, 갤러리 클락타워 트라이베카, 뉴욕
      Clock Tower Lecture Lounge vol.1, 갤러리 클락타워, 뉴욕
      Clock Tower Lecture Lounge vol.2, 갤러리 클락타워, 뉴욕
      Open Studio Show: Art Frenzy, MoMA PS1, 뉴욕
1999 도시와 영상,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이천 2000 공장미술제, 삼애화학공장, 경기도 이천
1998 김종영 특별 전-우성 조각상 수상작가 초대전, 가나아트센터 서울
      SARAJEVO 2000 프로젝트 참가, 비엔나 현대미술관 M.M.K
      Palais Liechtenstein, 비엔나 오스트리아, 사라예보, 유고
      Chorus & Distortion, 갤러리 Space Untitled, 소호, 뉴욕
      부산시립미술관 개관기념: Media & Sight, 부산시립미술관
1997 NICAF 일본미술 견본시장, 동경국제전시장 Tokyo Big Sight, 도쿄 일본
      우리문화유산, 오늘의 시각, 성곡미술관, 서울
      쁘로제 위드 Project 8, 토탈미술관, 서울
      事物이 思物에게: 멈춰진 다리미, Window gallery, 갤러리현대, 서울
      제2회 광주비엔날레 특별전: 청년정신展, 광주
1996 'Gallery-Pimple Life, on camp off base' Project 심포지움 참가, Tokyo Big Sight, 일본
      Art at Home, 서미화랑, 서울
      여섯 가지의 선택, 갤러리 현대, 서울
      작은 조각 트리엔날레, 워커힐미술관, 서울 
1995 제1회 중앙 비엔날레 국제 설치 조각 초대전: 관조, 호암미술관, 서울
      제6회 휄바흐트리엔날레 슈투트가르트, 독일 
      제2회 히로시마 하이츄카 댐 프로젝트 심포지움 참가, 히로시마, 일본 
1989 제20회 상파울루 비엔날레 한국 대표 참가, Ibirapura, 상파울루, 브라질

수 상 / 레지던시
2009 제 23회 김세중 조각상 
1992 제 2회 김종영 조각상 
1990 대한민국 미술대전 조각부문 우수상 
1989 대한민국 미술대전 조각부문 우수상 

2003/2004 뉴욕 현대미술관 P.S.1/MoMA 레지던시 프로그램 커미셔너
2000/2001 뉴욕 현대미술관 P.S.1/MoMA 아티스트 레지던시 그랜트




‘소피엔스’를 위한 감각과 치유의 조건


고동연(미술사가)

“각각의 영혼은 영원함과 그 모든 것을 안다. 그러나 혼돈스럽게 알 뿐이다.” - 라이프니츠 

독일 계몽주의를 이끈 철학자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의 ‘각각의 영혼들이 영원함을 혼동되게 인지한다’는 주장은 원래 유한한 인간의 감각과 인지 능력을 완전자인 신과 비교하기 위해서 나온 말이다. 때문에 현대인들에게 라이프니츠의 주장이 별 관심을 끌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외부 환경으로부터 주어진 소리를 개별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결국 무의식적으로 인지한다는 가설에는 귀기울일만하다. 들뢰즈(Deleuze)에 따르면 라이프니츠는 프로이트(Freud)와 달리 무의식과 의식을 대결구도에 놓지 않았다.  대신 그는 무의식이 의식을 대치하지 않으면서도 얼마든지 무의식적으로 저장된 소리들이 각각의 의식들로부터 습득한 소리들과 공존할 수 있는 것으로 설명하였다. 이러한 논리대로라면, 결국 모든 의식적인 감각은 무의식의 영향 하에 놓이게 된다. 또한 모든 인간의 감각은 그 자체로는 확실해 보이지만 결코 객관적이거나 보편적일 수 없다. 인간은 언제나 혼돈스럽게 감각할 뿐이다.

윤영석은 1990년대 후반부터 국내에서는 드물게 인간의 착시를 다뤄왔다. 그가 흔히 사용하는 렌디큘러(안경이나 렌즈를 사용하지 않고 3D 이미지를 인식하게 만드는 프린트 기법)의 방식을 이용한 이미지들은 보는 위치에 따라 동일한 대상을 달리 보이게 하는 효과를 만들어 낸다. 이번 전시에서도 ‘G O D’ 라는 알파벳이 쓰인 화면 너머에는 작가가 우연히 목격했던 PC방의 게임 속 전쟁 이미지가 등장한다. 여기서 종교적인 세계가 통상적인 감각으로 감지될 수 없는 초월적인 세계라면, 게임 속의 세상은 현실보다 더 리얼하게 우리의 감각을 자극하게 되는데 얼핏 다른 영역에 속해 있지만 둘 다 인간 감각의 확실성이 아닌 불확실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닮아 있다. 종교나 게임 화면 속 가상 리얼리티는 각각 신앙심과 상상력으로 실제보다 더 실제처럼 여겨지도록 유도할 뿐이지 물리적인 실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자신의 신체와 감각의 문제를 자기성찰의 테마와 연관해서 다룬다. 전시장 입구에 놓인 거대한 머리와 가느다란 팔다리의 설치물 <아이오(AHIO: Artificial Human Illusional Object>와 작지만 기이한 소리가 관객을 둘러싸도록 한 사운드를 포함한 설치 조각 작품 <명침(鳴針, Crying Needle)>은 모두 작가 스스로의 감각이나 신체와 연관된 에피소드로부터 출발한다. 부연하자면, 작가는 이번 전시를 통해 자신의 신체기능과 감각기관의 불완전함을 상당히 솔직하게 고백한다. 나의 신체와 감각은 어떻게 리얼리티에 대한 내 인식을 교란시키고 방해해 왔는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내 감각기관을 혼동시키고 교란시키는 이미지와 소리들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감각의 조건 1: ‘아이오’의 후사경

윤영석은 전시의 제목으로 ‘소피엔스(Sophiens)’라는 신조어를 사용하였다. ‘소피엔스’는 그리스 아테네의 기득권 지식인을 가리키는 ‘소피스트’와 현생 인류를 지칭하는 사피엔스를 결합한 단어이다. 말 그대로 풀어보자면 ‘궤변론자인 현생 인류’정도로 해석될 수 있다. ‘소피스트(sophistēs)’는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의 연극 <구름(Cloud)>에서와 같이 과도한 논리, 논리를 위한 논리로 무장한 아테네의 지식인 계층을 풍자할 목적으로 인용되어 왔다.  <구름>에서 빚더미에 놓인 주인공 아버지는 논리학을 가르치는 사사에게 아들을 교육시켰으나 정작 아들은 실생활에서 무용한 지식인으로 전락하게 된다. 결말에서 아버지는 소피스트들의 교육기관을 물리적으로 공격하게 된다. 

‘소피엔스’가 논리와 담론으로 포화상태에 이른 현 세태를 경고하기 위하여 고안된 단어라면, 전시장 초입에 놓인 <아이오>는 머리가 비대하고 상대적으로 신체가 나약해진 인간, 즉 작가 자신의 자화상에 해당한다. 직설적이기는 하지만, 사고와 인지 활동을 하는 머리와 가느다란 다리가 대비를 이룬 자화상은 갑각류(문어, 오징어), 또는 외계인을 연상시킨다. 특히 다리의 기능을 하는 지지대는 지나치게 가늘고 길어서 매우 불안정해 보인다. 긴 다리의 끝에는 탐사 경 같은 거울이 달려 있는데 발에 붙은 거울은 실상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한정된 반경 속 풍경만을 비추인다. 게다가 그의 팔다리는 발로 뛰고 직접적으로 경험하기에는 너무 부실하다. 

발목 하단에 부착된 후사경(Back Mirror)은 독일 유학시절 아우토반에서의 개인적인 경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야간에 속도 무제한의 아우토반을 달리다보면 멀리 뒤에 있던 자동차들이 급작스럽게 바로 뒤까지 추격해오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는데 그 후 자동차 사이드미러에 쓰인 “사물이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Objects in mirror are closer than they appear)”이라는 문구는 신체와 사물과의 관계를 다루기 시작한 작가의 중요한 길잡이가 되었다. 원래 공간적 거리감은 신체적인 움직임과도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다. 공간감에 대한 실험에서 자주 대상군으로 언급되는 축구나 농구 선수들은 본인의 신체와 상대, 대상간의 위치를 지속적으로 예상, 측정한다. 시각이 아닌 신체의 촉각적인 경험이나 아예 시각적인 수단을 배제한 상태 속에서 공간적 거리감을 가늠하기도 한다. 

<아이오>의 다리 끝에 달린 사이드미러도 머리 부분이 뒤뚱거리며 움직이게 되어야 비로소 작동한다. 인간의 감각적 경험이 신체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환기시켜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정작 가느다란 다리 위에 달린 탐사 경에 비춰질 수 있는 각도는 매우 한정되어 있다. 여기서 몸을 이용한 감각의 과정은 한때 현상학자들이 일컫는 탐구 과정과는 차이를 보인다. 더 이상 신체는 활발하게 움직이지 못하고 오히려 몸은 시각적 경험의 한계를 지어버리는 ‘짐’이 되어버렸다. 정보와 각종 감각을 자극할만한 이미지들로 가득 찬 시대, <아이오>는 작가와 현대인, 혹은 이 시대 ‘소피엔스’들이 처한 애처로운 현주소를 보여준다.

감각의 조건 2: 발레리나의 발

신체와 감각의 관계는 윤영석의 이전 작업에서도 줄곧 등장해왔다. ‘주고 받기’ 시리즈(2007)는 눈을 가리고 직접 골대를 보지 않고 몸이 체득한 거리감에 기초해서 슈팅을 하는 농구 선수의 연습과정으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그렇다면 발레리나의 예는 어떠한가? 작가가 발레리나의 몸동작에 관심을 지니게 된 것은 예술고교 재학 시절 조각실기실에 접해있던 발레교실에 대한 기억으로 시작된다. 이후 과도한 훈련으로 인해 기형적으로 변해버린 발레리나의 발을 직접 목격하게 되면서 작업의 소재로 삼게 되었다. 아름다운 동작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비인간적으로까지 여겨질 만한 지독한 연습의 시간이 필요하고 그 시간들은 고스란히 신체에 각인된다. 발레슈즈를 신고 토스탠딩(toe standing)한 <발레리노(Ballerino)>에서 심각하게 굽어진 발과 다리는 얄궂게도 매우 자연스러워 보인다. 



Ballerino, 2018, micro lenticular morphing lens, 110 x 110 cm


발레리나의 신체 움직임이 외부의 환경이나 상황에 따라서도 결정되지만 그러한 의식의 영역을 초월한 상태에서도 이뤄진다는 사실에도 주목해야 한다. 농구선수가 골대를 보기 전에, 아니 골대를 보지 않고도 슈팅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발레리나의 움직임도 자극과 반작용이라는 자연스러운 의식적 반응의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음악을 듣고 상대방 무용수를 보면서 뇌가 특정 정보를 몸에 지시해서 신체가 명령을 보내는 순차적인 과정에 의해서만 발레리나의 춤이 이뤄진다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고도로 숙련된 발레리나의 몸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자극들에 앞서 먼저 반응하고 움직인다. 

따라서 자극을 통한 감각과 인지의 과정은 부차적인 것이다. 발레리나의 발이 굳은살 덕택에 웬만한 자극에 무감각해져 있는 것과 유사하게 말이다. 20세기 현상학에서 감각의 주관적이고 가변적인 조건을 이해하기 위해서 몸의 중요성을 내세웠다면, 발레리나의 몸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 <아이오>의 부실한 신체나 고도로 숙련된 신체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발레리나의 경우에서 신체는 감각적 경험의 중요한 매개체이지만 둘의 관계는 작가의 작업에서 결코 상호보완적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라이프니츠의 표현을 빌자면 인간의 감각은 의식뿐 아니리 무의식의 상태에서도 일어난다. 

감각의 조건 3: 존재하지 않는 소리, 이명(耳鳴)

오랫동안 이명을 경험해온 작가의 입장에서 육체적이고 물리적인 외부 조건과 작가의 감각적인 경험 사이에는 큰 간극이 존재한다. 윤영석은 젊은 시절 귀를 다친 후에 30여 년간 이명으로 고생해 왔고, 이번 전시에서 “약간은 병리적인 감정이 감각이 되고, 그 감각이 조각이 될 수 있게” 하고자 하였다. 존재하지 않는 소리를 “잘못” 듣게 되고 결국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스스로 담을 쌓아버리게 되면서 겪은 정서적인 어려움이 작가로 하여금 신체와 감각뿐 아니라 개인적인 치유와 감정에 눈을 돌리게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전시장 3관에는 거대한 귀 형태 위에 ‘유전자 코드 ACGT'(인간 염색체의 기본 4개 염기배열)와 얼룩진 세계지도의 이미지가 전시장 한가운데 돌출된 벽면에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거대한 풍선에 매달려 날카롭고 뾰족한 부분에 재갈이 물린 채 떠 있는 설치조각 <명침>과 거대한 침봉을 통하여 관객은 어디선가 들리는 자신을 둘러싼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를 듣게 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작가의 귀속에서만 일어나던 개인적인 이명 현상이 현대음악과 결합시켜서 공공의 장소에서 시연된다. 윤영석은 자신의 귀가 세상에 대하여 거의 닫혀져 있다고 설명한다. 외부 기관들로부터 분리되어 독립적인 개체로 존재하는 귀의 이미지는 최대한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켜버린 현재 작가의 귀가 처한 상태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관객이 작가의 개인적인 이명의 경험을 공유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명은 매우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경험이다. 존재하지 않는 소리를 이명 증상이 있는 경험자의 귀가 다양한 이유와 경로로 스스로 인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명의 많은 치료가 결국 상담으로 이뤄지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주관적으로 귀의 울림이나 소리 등을 경험하게 될 경우 그것을 어떻게 심리적이고 정서적으로 다스리느냐가 치료의 관건이다. 

따라서 윤영석의 ‘이·내·경(耳·內·景)’ 시리즈는 ‘귀 내부의 풍경’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철저하게 주관적이고 가상적인 작업이다. 게다가 이명의 청각적 경험은 원래 존재하는 외부의 자극이 아닌 인간의 귀에서 자체적으로 만들어진 장애나 오류이다. 작가는 운동선수의 변형된 몸처럼 오랜 기간 특정 감각을 극복하거나 잊어버리려고 노력하면서 생겨난 자신의 변형된 감각의 조건을 소재로 삼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존재하지도 않는 소리를 의도적으로 만들어서 관객으로 하여금 인지하게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명의 경험은 신체적 조건과 감각, 정서적 반응에 대하여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는가? 

창작의 조건

“마음은 지금까지도 과학이 이해에 실패한 주제다.” - 유발 하라리 

“앞으로 인류에게, 20세기 초중반에 등장했던, 순수한 예술, 순수 아방가르드의 시대가 다시 올 수 없을 것 같다는 불안한 감정, 또는 절망감 같은 것이 이명이 있는 작가의 귀를 통해 조금 예민한 느낌으로 나타나게 됐어요. ‘만약에 순수에 대한 감정이 사물화 될 수 있다면, 그 감정이 구원될 수 있을까?’ 하는 감정이 질문이 내게 살아있고 그런 감정의 시간 속에서 나타난 풍경과 형태들입니다.” 윤영석

인간의 감각적인 오류는 현대 철학이나 미학에서 결코 낯선 소재가 아니다. 현상학으로부터 정신분석학, 미디어이론, 유물론적인 사회학, 문화비평론에 이르기까지 객관적이고 보편적으로 이해되어져온 인간 감각과 인지의 과정을 해체하려는 노력이 이어져 왔다. 이와 같은 시도들은 공통적으로 인간의 감각을 절대적인 경험치나 객관적 표본이 아닌 주관적이고 가변화된 상황에 따라 설명해왔다. 아울러 결국 인간 감각이 지닌 부조리함, 오류, 게으름을 드러내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윤영석의 이번 전시 또한 사회적이거나 개인적인 차원에서 감각의 주요한 여건이 신체가 변형되고 왜곡되는 상황에 주목하고 있다. 과도한 정보화 사회에서 비대하고 머리만 커진 <아이오>, 고도의 숙련된 훈련에 의하여 무의식적으로 감각 이전에 반응을 하는 발레리나의 신체,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소리를 주관적으로 인지하는 작가 스스로의 귀는 모두 인간 감각을 가능하게 하는 신체나 감각의 오류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건드림 Touching, 2018, micro lenticular morphing lens, 110 x 110 cm


그런데 작가가 감각적 오류를 야기할 수밖에 없는 개인적인 상황을 드러낸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현 인류문명의 발전적 체계가 인간의 이성이나 인지에 과도하게 집중한 나머지 정서적이고 주관적인 가변성을 도외시하여 왔다면, 작가의 입장에서 이명은 비로소 자신의 신체나 감각이 자신에게 전적으로 객관적이고 보편적으로 설명 가능한 리얼리티를 전달하는 수단이 결코 될 수 없음을 인정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새로운 예술적 가능성을 찾으려 한다. 적어도 관객들로 하여금 본인의 신체, 감각, 그로부터 취득한 정보를 가지고 내리는 이성적인 판단의 과정을 돌아보도록 종용한다고도 볼 수 있다. 물론 그러한 상태는 작가 자신에게는 상징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중요한 치유의 과정이기도 한다. 

자신의 감각적 오류를 인정하고 그 과정자체에서 파생되는 감정을 포용하려는 작가의 태도는 이미 철학이나 현 미술계에서도 얼마간 반영되고 있다. 17세기 계몽주의의 선구자 라이프니츠의 글이 들뢰즈의 관심을 끈 것도 서구 철학의 역사에서 인간 이성을 맹신했던 계몽주의의 근간에 인간의 무의식과 혼동, 오류에 대한 관심이 존재했음을 환기시키기 위한 것이다. 들뢰즈는 감각을 통한 주관적인 인식과 공감인 정동(Affection)이 이성적인 설득이나 논리가 제공할 수 없는 예술적 경험의 핵심적 이라는 점을 강조하여 왔다.  

그렇다면 윤영석의 이명이 관객들을 그러한 상태로 몰입시킬 수 있을까? 물론 어려운 질문이다. 무엇보다도 오류를 오히려 전화위복의 계기로 받아들이는 긍정적인 자세가 실용주의적으로는 도움이 될 수 있으나 궁극적으로 관객을, 사회를 어디로 이끌고 갈 수 있을지 필자 또한 아직 확신이 없다. 게다가 현대인들은 이미 각종 심리학 서적들이 쏟아내는 크고 작은 치유의 메시지들로 지쳐있기도 하다. 따라서 주관적인 감각적 환희가 이미 인터넷에서 다양한 ‘소확행’의 형태로 재연되고 있는 우리 시대, 윤영석이 던지는 질문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우리는 우리의 감각적 오류를 포용함으로써 어디로 흘러가게 될 것인가? 스스로의 오류와 주관적이고 가변적인 정서적 상태를 포용하는 것이 우리를 진정으로 진솔하고 겸허한 인간으로 탈바꿈 시켜줄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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