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0-27 ~ 2018-11-25
이해민선
031-949 8154
전시 서문
그가 찾고 있는 것과 내가 보고 있는 것,
공백이 지닌 무게와 질감에 대하여
안소연 / 미술비평가
그림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본다. 이 본질적인 물음을 떠올리게 했던 것은한 사람의 그리는 행위가 유독 마음 쓰였던 탓이다. 내가 그의 그림 앞에 처음 섰던 때가 꼬박 오년 전 이맘때였는데, 그는 동네 열 바퀴를 돌아서 그린 풍경에“물과 밥”이라는 설명을 보탰다. 그때는 물과 밥이 어떤 형상으로 머릿속에떠올랐다가 금방 지워졌는데, 이 두 개의 단어가 나란히 붙어있는 모양새는 내 몸 어딘가에 조금 오래 남겨져 있었다. 눈인지, 입인지, 머릿속인지, 가슴인지, 어딘지 모를 몸에 자국처럼 남아서, 이 말이 지시하고 있는 실체가 내가 봤던그의 그림이었는지 아니면 그림을 그리면서 마땅한 언어의 질감을 찾으려 했던 그의 행위였는지 알고 싶었다. 그의 그림에는 뭐라 단번에 말하기 어려운질감이 묻어 있는데, 그것은 또한 그가 이름붙이는 언어의 질감과도 닮아 있어서, 과연 그림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볼 때그림을 그리는 그 한 사람의 모습을 상상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의 작업실을 찾았을 때, 이해민선은 오래된 그림들을 작업실에 쌓아놓고혼자만 아는 그림의 속내를 가끔씩 떠올리면서 아직 다 말하지 못한 속사정을 꺼내놓을 방법을 찾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내게 말했다. 되게 그리고 싶은 게 있는데 잘 안 그려지는그림이 있다고. 그래서 그게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뭔가 바깥에 푹 파여진 데를 장판으로 막아놓은걸 그림으로 그리고 싶은데 아직까지는 잘 안 된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상상했던 장면이 또 내 머릿속에 빠르게 떠올랐다가 사라졌지만, 그리고 싶은 것을 아직 잘 그리지 못하겠다는말 못할 속사정을 가진 그의 처지가 나를 조용히 괴롭혔다. 푹 파인 땅 위에 장판이 덮여 있는 그 진부함을 못 그려서 할 말을 잃은 그를지켜보자니 아직 생겨나지 않은 그 그림을 보고 싶은 마음이 쓸데없이 커졌다. 방마다 가득 쌓아놓은 그림의 덮개를 풀어놓으면그 방법을 찾을 수 있으려나.
그 무렵 그가 작업실에서 그리고 있던 그림은<금이빨을 잃어버린 자가 찾아온 곳>(2018)이었다. 무엇이 그를 이 형상 앞에 불러 세웠을까. 큰 산을 덮고 있는 돌멩이를 그는 얼마나그린 걸까. 산봉우리에서 바닥까지 굴러 내려온 돌멩이들이 산을 훑는 느린 시선에 자꾸 차인다. 혹은, 저 먼 산봉우리에서 눈 앞 바닥까지 거리만큼의허공에 그냥 박혀 버린 것 같은 돌멩이의 질감이 성글게 시선을 툭툭 끊어 놓는다. 이해민선은 흑연이 만들어낸 돌멩이의 질감과그것으로 덮여 있는 텅 빈 산을 그렸고, 나는 그가 그리려던 게 무엇이었는지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그러다가, 문득 텅 빈 산의 표면을 감싸고 있는 자잘한돌멩이들의 질감이 산을 그린 것인지 돌멩이를 그린 것인지 모를 어떤 착시적인 순간에 닿았다. 그때, 그러니까 돌멩이와 텅 빈 산이 더 이상따로 구분되지 않고 하나의 질감을 가진 “그림”으로 보이는 순간에, 금이빨을 잃어버린 자가 찾아온 곳이라는 이 장소가 어떤 풍경이 아니라 그림이놓인 백지로서의 공백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스친다. 그 공허함을 덮을 수 있는 만져질만한 질감이 필요했던 게 아니었을까. 다시, 그 질감은 서로 붙잡고 있는 두 사람의형상 위에도 얹혀져 어떤 것의 무게로 옮겨진다. <덩어리_8>(2018)에서 드러나 있는 미비한 형상 간의 더이상 분리될 수 없는 단단한 운동성과 그 둘의 고립이 만들어내는 무게감은, 언제고 다시 자잘한 돌멩이의 질감으로 흩어질지도모를 그것과의 일체화된 존재감을 내비치고 있다.
이를테면, 그림의 한 가운데에 이상하게 고립되어 있는것 같이 서로 맞잡고 있는 두 사람의 형상은 몸에 돌멩이의 질감을 잔뜩 지고 있다. 구부린 등 뒤에, 펼친 팔꿈치 위에, 꿇은 발목 아래에 몸의 일부인 양 머리같고 주먹 같고 무릎 같은 돌멩이가 지어져 있다. 때문에 어떤 속임수처럼 평평한 요철로도 그림의 질감을 떠맡았던 돌멩이의 구실은, 다시, 살아있는 몸에 각인된 생의 진지한 무게로전환된다. 금이빨을 잃어버린 사람의 몸에 절박함과 공허함이 교차하듯, 그림 안에서는 파헤쳐진 질감과 응축되어휘발할 것 같은 서로의 무게가 나란히 공존한다. 금이빨을 잃어버린 사람이 그림 바깥에 있는지 그 안에 있는지 모르게. 여기서, 내가 한참을 보고도 미처 알아채지 못한게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뻗은 팔꿈치 위로 반듯하게 올려진 과일 하나. 그리고 바로 옆에서 균형을 이루듯 같은무게로 그려진 돌멩이 하나. 이 뜻밖의 형태가 예상치 못한 곳에 아무렇지 않게 반듯이 놓인 것을 보면서, 아무것도 없는 곳에 고립되어 있는 두 사람의무의미한 행위가 그토록 작은 무게들을 지탱하려 애쓰는 것 같아 몹시 처연하기도 해서 나의 괜한 속내를 뒤적거리게 한다. 그러다가, 나는 이 형상 앞에서 오래 서성였을 그의뒷모습을 다시 떠올려 본다. 붓과 연필을 번갈아 들었다가 내려놓기를 수없이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 두 사람이 마주잡은 팔꿈치 위에과일 하나, 돌멩이 하나를 얌전하게 그려 넣기로 한 그의 속사정을 가만히 생각해 본다. 그가 찾던 곳도 여기였구나 싶다. 그림을 그리려는 자, 그가 찾아온 곳. 그것은, 도무지 알려져 있지 않고, 미비한 힘들이 교차하며, 아무에게나 함부로 들키지 않을, 묵직한 공허함이 짙게 배어있는 “먼 곳”으로서의 장소다.
이해민선은 그 곳을 “바깥”이라 말한다. 검은 장소,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에서, 그는 어떤 실체가 임시 가림막 같은 불완전한것으로 뒤덮여 있는 그림을 그리고 나서, 그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아 보이는 그림에 <바깥>(2018)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말 그대로, 그는 어디 먼 곳의 느슨한 야외 풍경인양 바깥에 버려지듯 일상의 변두리에서 가끔씩 목격되는 불확실한 실체들을 찾아내 그 질감을 그림에 옮겼다. 그가 그린 것은 질감이다. 어쩌면 내가 종종 그의 그림을 두고 질감을가진 표면이라 말했던 것이, 그가 그린 그림의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형상의, 일상의, 세계의, 힘의 여분이 밀려나간 바깥쯤 되려나. 이해민선은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데도 아닌, 그래서 시선으로부터 소외된 사물과 풍경이가지게 되는 연약한 질감에 주목하고 있다. 그는 그것을 자신의 그림 안에 들인다. 시선으로부터 소외되었던 “바깥”의 질감은 이내 그림 표면의 질감으로 전환된다. 작품 제목 옆에 꼬리표처럼 따라붙은 “면 천 위에 아크릴 채색”이라는 이 솔직한 표현은 회화에서 형상의환영과도 같은 표피적 재현의 빈약함을 말해주면서도, 동시에 표현될 수 없는 형상의 물질적 실체가 천 위에서 아크릴 물감과 서로 적응하여얻어낸 사유의 표피임을 또한 알려준다. 따라서 그림의 표면이자 형상의 표피이기도 한 물질의 질감은 바깥의 풍경을 관찰해 온 작가의 말할 수 없는사유와 닮아 있다.
나는 이제, 그가 그린 그림을 다시 본다. 두께 없는 흰 색 천이 안으로 감추고 있는실체에 대해 머릿속에 상상하려던 것을 멈추고, 나는 면 천 위에 아크릴 물감으로 그린 형상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본다. 고인 물, 죽은 나방, 새 똥, 빗물 자국, 주름에 쌓인 먼지, 흐르다가 멈춘 얼룩 등 희미한 존재의 상이한질감들이 흰 천의 공허함을 채우고 있다. 그의 사유는 안으로부터의 혹은 바깥에서의 소외에 가까이 다가가 있다. 소외된 형상들의 질감과 또 그 질감의 무게를그림에 옮겨 오기 위해, 그는 드러나지 않은 실체와 그림으로부터의 표피적인 고립을 모두 자처한다. <강풍>(2018)에는 그러한 정서가 짙다. 그가 그린 그림에는 강풍이 없다. 절정도 없고, 다만 강풍에 맞서는 어떤 침묵과도 같은묵직한 제스처가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다. 내게 작년 개인전에서 봤던 <절정 없는 곳: 포즈>(2017)를 연상시키는 이 작업은, 바깥으로 밀려나 자리 없는 존재들의 구체적인실존을 공적인 발화의 힘과 견주어 강렬한 질감으로 그려내고 있다. “우리는 여기 있다”라는 구호는 우리가-여기-있다는 절대적인 실존에 대해 발언하는데, 이해민선은 그러한 공적 발언을 흰 색 현수막의가느다란 끈과 과도한 임시방편의 구멍들로 지탱시킨다. 말의 실체가 무엇인가 보다는, 어쩌면 강풍이 불 때 그 말 자체를 지탱시키기위한 소외와 고립으로부터의 주체적인 자립을 시도하는 셈이다.
맨 살갗이 드러난 것 같이 흙과 돌 말고는아무것도 없는 산을 배경으로 “바깥”의 풍경이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덩어리_0>(2018)연작은 다시 형태의무게와 질감을 오가며 그림의 표면을 만들어내는 한 사람의 움직임을 환기시킨다. 동네 열 바퀴를 돌아 “물과 밥”의 찐득한 질감을 가진 바깥 풍경을 그렸던때처럼, 이해민선은 말과 시선이 미처 닿지 않는 임시적인 풍경들을 찾아내 단단한 질감을 가진 그림으로 옮겨다 놓는다. 하지만 그의 그림은 그가 늘상 마주하고있는 임시적인 풍경들의 표면을 닮아 있기도 하다. 지금 나는, 오래 전부터 봐왔던 <동네 열 바퀴>(2012-2013)나 <무생물 주어>(2016),<성미산에서 온 성미>(2016-2017)연작처럼 종이에 옮겨진회화적인 질감들이 자립해서 존재하는 방식을 떠올리고 있다. 작고 어중간하게 그려진 그림들은 매번 벽에 걸거나 액자에 넣어두지 않고, 뒤에 나뭇가지와 스티로폼 같은 임시적인지지체를 붙여 자립하듯 한데 세워 설치됐다. 그건 꽤 의미는 행위처럼 보였는데, 작고 허약한 그림 뒤의 큰 공허함을 묵직하게견뎌내는 그림 표면의 무게감에 대해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 세 점의 <덩어리_0>연작에서 그러한 기억을떠올렸다. 실체를 알 수 없는 공허함의 맨 살갗처럼,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는 덮개들 위로 묵직하게올려 있는 작은 진흙 덩어리와 자잘한 돌멩이들의 질감이 다른 형상들과 견주어도 모자람 없이 또렷하게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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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약력
이해민선
주로 풍경의 요소를 이용하여 작업 초기에는 ‘인공과 자연’에 주목하면서 ‘생명의 접점’에 대해 질문을 던졌으며 이후 ‘물질과 원형’ 그리고 ‘존재’에 대한 이야기로 여러 형식의 드로잉에서페인팅까지 작업을 선보여 왔다. 경의 속성에서 읽어낸 것과 사회적 함의들을 중첩하여 표현한다. 2004년 첫 번째 개인전 이후에 11번의 개인전과 3번의 이인전 그리고 금호미술관 ‘B컷 드로잉’ , 국립현대미술관 ‘젊은 모색’ , 일민 미술관 ‘Planet A: 종의 출현’ , 광주비엔날레 '먼지 한 톨 물 한 방울’_상상릴레이 ,강원국제비엔날레 ‘악의 사전’ 등 100여회의 기획전에 참여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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