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희展 기획의도
보혜미안 갤러리
오랜 시간 우드 인그레이빙 작업에 매진했던 이경희 작가는 작업의 고행 속에서 자신의 상상력과 감각을 더해 창조적으로 작업한다. 먹과 색채를 이용해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재탄생 시키고 있다. 먹의 마블링적인 표현은 목판화의 오랜 작업에서 오는 어떤 탈출구도 됬을 것이다. 우드 인그레이빙은 주제의식을 각인시키고 먹의 자유로운 표현은 주제가 놀 공간을 탄생시키고 곳곳에 표현된 현대 물질사회의 이기들을 유심히 바라보게 한다. 그 모든 것이 결코 겉돌지 않으면서 작가는 ‘우연적 필연’을 만들어 낸다. 필연적인 우연, 우연적인 필연이 이경희 작가의 작업에서 느낄수 있는 최대치 아닐까 한다. 간혹 쉽게 쉽게 작업하고 발표하는 작품을 보다가 고행이라는 단어 사용을 거침 없이 붙이게 되는 그녀의 작업은 작가가 무엇을 해야하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우연적 필연2050_우드인그레이빙_먹 담채_장지(65.5-81)cm 2020
우연적 필연2048_우드인그레이빙_먹 담채_장지(53.5-66.5)cm 2020
‘우연적 필연’이 자아내는 인연의 세계
최광진(미술평론가)
우리는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이 일어나는 예기치 않은 일을 ‘우연’이라고 말한다. 합리주의적 관점에서 우연은 원인에 대한 무지이며 불합리한 세계라고 생각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우연의 세계에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숨겨진 질서가 있으며, 우연의 세계를 이해함으로써 우리의 인식은 확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경희의 근작에서 보이는 두드려진 변화는 수묵의 번짐 효과를 활용한 우연성이 풍부해졌다는 점이다. 우드인그레이빙 기법으로 제작한 1990년대 초기 작품들은 작은 화면에 정교하고 섬세한 이미지들을 초현실적으로 결합했다. 예리한 칼맛과 촘촘하고 치밀한 밀도를 중시했던 이러한 화풍은 2010년대 들어 <미인도>와 <나의 신화> 시리즈를 거치면서 점차 자유로워졌다. 그리고 2017년에 시작한 <Nomadic Desire> 시리즈와 이번의 <우연적 필연> 시리즈에서는 수묵의 번짐 효과를 본격적으로 도입함으로써 우연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용기에 물을 담고 먹물을 뿌린 후, 물의 표면을 화선지로 적셔내면 화선지에 먹물이 걷잡을 수 없이 순식간에 번져나가며 먹물과 종이가 일체가 된다. 이경희의 작업은 이처럼 수묵과 종이가 만나 만들어진 우연적인 얼룩에서 출발하여 필연의 세계로 만들어가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알 듯 모를 듯한 몽환적인 이미지에서 동물이나 사람, 혹은 자연을 연상시키는 형상을 끌어내고, 여기에 우드인그레이빙으로 치밀하게 제작한 구상적 이미지가 절묘하게 어우러지며 필연적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쇼핑카트나 핸드백, 하이힐, 모자 등 오늘날 소비사회를 떠올리게 하는 물질적 욕망의 상징물들을 그려 넣음으로써 태초의 우연은 있음 직한 필연의 세계로 변모하게 된다.
이러한 필연성은 처음부터 계획된 게 아니라 추상적인 얼룩들과 소통 과정에서 즉흥적으로 착안한 것이다. 따라서 최종적으로 완성된 작품은 틀에 박힌 재현이 아니라 작가의 상상력과 감각이 만들어낸 “원본 없는 시뮬라크르”이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들고 구상과 추상의 구분을 무너뜨리며 탄생한 이러한 작품들은 쉽게 해석을 허락하지 않으면서 보는 이의 시선을 오래 붙잡아 두게 하는 매력이 있다. 이러한 작품에서 우리는 우연과 필연이라는 편협한 이분법적 분류가 해체되고, ‘우연적 필연’이 자아내는 신비하고 매혹적인 인연의 세계에 몰입하게 된다.
사실 우리는 인간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자연이나 사물과 소중한 인연으로 얽혀있다. 하나로 짜인 그 긴밀한 관계의 그물에서 개체들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면서 지속적으로 변하고 있다. 그러한 역동적인 생명작용을 병들게 하는 것은 개체 간의 주종과 우열을 나누는 인간의 분별심과 이기적인 욕심이다. 우연을 필연으로 만드는 이경희의 작품에서 우리는 주종의 속박에서 벗어나 개체들의 자유로운 유희를 느끼게 된다.
수행자 같은 인내와 고행이 느껴졌던 그녀의 초기 작품과 달리, 최근작들이 한층 여유롭고 재미있게 느껴지는 것은 전적으로 우연성 덕분이다. 우리는 습관적인 반응이 통용되지 않는 난감하고 우연적인 상황에 직면하게 되면 규정적 판단을 멈추게 된다.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당혹감과 불안을 느끼지만, 동시에 이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잠재된 본성이 깨어나게 된다. 이경희는 이처럼 자신을 스스로 규정적 판단이 불가능한 상황에 노출함으로써 자신의 무의식과 창조적 본성을 끌어내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얼핏 이경희의 작품은 마그리트의 데페이즈망을 연상시키지만, 우연적인 조합을 통해서 상식적인 의식을 해체하고자 한 마그리트와 달리 그녀는 우연을 필연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자신의 무의식과 본성을 개입시키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사회화 과정에서 억압되기 이전의 신화적 상상력과 어디서 본듯하지 않고 제 빛깔이 분명한 작품에서 느껴지는 쾌감이 있다.
우연적 필연1943_우드인그레이빙_먹 담채_장지(58.5-76)cm 2019
어디를 향해 가나1929_우드인그레이빙_수묵담채(48.5-38)cm_201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