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너무나 길고 종이는 조그맣기 때문에》
210629-210822
장소
북서울미술관 1층 전시실1
관람시간
[평일(화-금)] 10AM~8PM
[토·일·공휴일]
하절기(3-10월) 10AM~7PM
동절기(11-2월) 10AM~6PM
[문화의 날 운영]
7PM~10PM
마지막 수요일(문화가 있는 날)
[휴관일]
매주 월요일
부문 드로잉, 회화, 모자이크, 콜라주, 텍스트, 도예 등
작품수 737점
참여작가 고주형, 김경두, 김동현, 김재형, 김진홍, 김치형, 김현우, 나정숙, 박범, 배경욱, 양시영, 오영범, 윤미애, 이찬영, 장형주, 정종필, 정진호, 조유경, 진성민, 한대훈, 한승민, 홍석환(22명)
본 전시에서는 가능한 제도권 교육이나 사회적 개입없이 오직 자신의 내부에 몰입하여, 자신만의 독창적인 창작을 지속해온 발달장애 창작자 16인, 정신장애 창작자 6인의 예술세계를 소개한다. 전시는 회화와 입체, 도자 작품이 포함되며, 삶과 작품 세계가 일치하는 창작자들의 특성을 드러내기 위해 작가의 말과 이야기가 담긴 노트, 공책, 드로잉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이를 통해 순수한 자기 몰두의 행위와 자기 창작의 보편적인 특성이 강조하고자 한다.
길은 너무나 길고 종이는 조그맣기 때문에
김효나(초청 기획자)
아주 작은데, 끝없이 긴 길이 있다.
너무 연약해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 같은데, 끈질기게 이어지는 길이다.
밖에선 보이지 않지만, 그 내부로 들어가면 수많은 통로가 열리는 깊고 깊은 숲의 길처럼, 그 길은 이어진다. 오직 길을 걷는 이의 호흡과 질서와 규칙에 따라, 그 길은 안으로 안으로 끝없이 이어진다. 우연히 들어선 길이나 막다른 골목에서도 무수한 기억과 상상의 통로가 열리기에 아득하리만치 길게, 실은 먼지가 쌓일 만큼 긴 시간 이어 온 그 길은 하지만 아주 작고 연약하니까, 아주 작고 연약한 공간 속에서 가능한 방식으로 이어진다. 작은 종이를 연결해 ‘여럿이서 함께 덮을 만큼 커다란 이불 같은 지도’를 만드는 작가에게 누군가 “길이 왜 다 구불거려요?”라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길은 너무나 길고 종이는 조그맣기 때문이에요.”
이 담담한 한마디 말에 본 전시가 조명하고자 하는 창작과 삶, 그 전부가 들어 있다.
《길은 너무나 길고 종이는 조그맣기 때문에》는 미술 제도와 무관하게 오직 자신의 내면에 몰입해 자신만의 독창적인 창작을 지속해 온 발달장애 작가 16인, 정신장애 작가 6인의 작품세계를 소개한다. 이들의 예술이 ‘아웃사이더 아트’, ‘에이블 아트’, ‘장애예술’ 등 어떤 것이라고 정의 내리거나 규정짓기에 앞서 작가들이 긴 시간 홀로 대체 무엇을 표현하고 있으며 무엇을 발언하고 있는지 충분히 보고 들어볼 것을 제안한다. 주로 자신의 작은 방에서 소박하고 일상적인 재료를 사용해 자신의 내면이나 자신이 몰두한 세계를 표현하는 데만 집중하는 창작 행위는 흔히 ‘자폐적’ 상태, 즉 자기에게 닫혀버린 상태로 여겨지곤 했다. 본 전시는 순수한 자기 몰두의 창작과 그 존재 방식에 관한 사회의 관습적인 시선에 질문을 던지며, ‘자신 안에 갇혀 외부세계와 단절된’ 것이 아니라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열려 있는’ 상태로 시선의 방향을 달리해 볼 것을 적극적으로 제안한다.
드로잉, 회화, 모자이크, 콜라주, 텍스트, 도예 등 다양한 예술적 형식으로 표현된 22개의 창작세계는 그 내용과 속성에 따라 다섯 가지 큰 맥락과 세 가지 세부 맥락으로 분류되고, 이 크고 작은 맥락을 따라 전시는 유기적으로 흘러간다. 산책, 그림자, 지하철 노선도 등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일상적 소재와 노트, 연습장, 이면지 등 흔하고 일상적인 재료로부터 놀라운 독창성을 끌어내는 창작의 풍경을 볼 수 있고(일상성), 가상의 생명체나 캐릭터를 창조하고 그들이 활동하는 세계 구현에 몰입하는 창작의 유형을 살펴볼 수 있다(가상세계의 연구). 기원과 바람이 창작의 중요한 원동력이자 기원하고 바라는 과정 자체가 창작이기도 한 작품군에서는 주로 자신에게 정서적 안정을 주는 이미지 또는 텍스트를 세밀하게 변주하며 무한히 반복하는 특성을 확인할 수 있다(기원과 바람). TV 프로그램이나 인터넷 등 대중문화의 요소를 흥미롭게 해석하고 적극적으로 차용하는 창작세계 역시 발견할 수 있다(대중문화의 반영). 그리고 ‘얼굴과 기억’, ‘색면추상’, ‘픽셀’이라는 좀 더 세부적인 주제로 연결되는 작품에 이어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소개된 이 모든 창작세계의 요람이라 할 수 있는 노트 작업을 만날 수 있다(노트 섹션).
길에서 나누어주는 공짜 노트나 값싼 연습장, 이면지는 이들 작가의 독창적인 세계가 처음 시작된 공간이자 그 세계가 무한히 변주되며 지속되는 주요한 창작 공간이다. 비싸고 고급스러운 미술 재료가 아닌 작고 소박한 노트 속에서 작가들은 자유롭고 솔직하게 자신의 세계를 펼치기에 작가 특성이 오롯이 반영되어 있다. 이들 노트가 창작물로 인식되기 전에는 쓸모없고 의미 없는 낙서, 병이나 장애의 증상으로 여겨져 방치되곤 했는데, 버려지는 노트, 뽀얗게 먼지를 뒤집어쓴 채 방구석에 수북이 쌓인 노트와 무수한 종잇장 속엔 이들이 몰입한 기나긴 시간, 즉 삶이 들어 있다. 그리고 본 전시에서 궁극적으로 조명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삶이다. 너무 작고 연약해 때론 버려지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끈질기게 이어지는 창작과 삶, 현실적이고 물리적인 한계를 초월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지속되는 또 다른 삶과 그 가능성이 존재함을 《길은 너무나 길고 종이는 조그맣기 때문에》에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너무나 길고 너무나 조그만 것은 또한 우리의 삶이기 때문이다. 전시장 곳곳에 울리는 작가들의 목소리는 바로 그 사실을 끊임없이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