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이응노미술관 기획전
《안목: 청관재 이응노 컬렉션》
■ 전시개요
○ 전 시 명: 2022 이응노미술관 기획전《안목(眼目): 청관재 이응노 컬렉션》
Eye for Art: Cheonggwanjae Collection of Lee Ungno’s Art
○ 전시기간: 2022. 1. 18.(화) ~ 4. 10.(일) (83일간)
○ 개 막 식: 2022. 1. 17. 15:30
*사회적 거리두기 조정에 따라 규모와 일정 조정
○ 기자간담회: 2022. 1. 17. 11:00
○ 전시장소: 이응노미술관 1~4 전시실
○ 전시주제: 청관재 소장 이응노 작품 및 아카이브
○ 전시작품: 이응노 작품 100여점
○ 전시안내
■ 전시연계행사
- 전시연계 학술세미나
○ 일 시 : 2022년 5월 중
○ 발표자 : 강민기, 김예진, 기타 에미코, 김학량
○ 방 법 : 비대면 학술세미나 진행
○ 내 용 : 1950년대 한국 동양화단과 이응노
■ 전시 기획의도
《안목(眼目): 청관재 이응노 컬렉션》은 미술품 애호가인 조재진(작고)과 박경임이 소장하고 있는 고암 이응노의 작품을 선보이는 전시다. 이들은 컬렉터로서 1970년대 중반부터 미술품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청계산과 관악산 사이의 집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청관재’는 이들의 컬렉션을 아우르는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청관재가 귀중한 작품을 수집할 수 있었던 것은 미술품에 관한 남다른 애정과 노력으로 좋은 작품을 분별하는 안목(眼目)을 키웠기 때문이다. 조재진과 박경임은 컬렉터로서 국내외 화랑과 미술관의 전시를 찾아다니며 직접 작품을 보고 작가를 만났을 뿐만 아니라, 젊은 미술사가인 유홍준 등과 교우하면서 미술사에서 의미가 깊은 작품을 찾고 스스로 연구하며 작품을 수집했다. 청관재의 주요 컬렉션으로는 민중미술 작품들과 조선시대 민화, 추사와 이응노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가운데서 추사와 이응노 작품은 청관재가 마지막까지 소장한 컬렉션이다.
청관재 이응노 컬렉션의 특징은 이응노의 화업을 아우르는 전 시기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1930년대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작품부터 해방전후 혼란기, 한국전쟁과 1958년 프랑스로 떠나기 전까지의 작품 등 이응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주제와 기법을 볼 수 있는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다. 만년의 군상으로 이어지는 이응노 예술의 연속과 전개는 청관재 소장품을 통해 더욱 풍부하고 깊어진 해석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청관재 소장 이응노 작품은 관련 전시에 다수 출품되어 몇몇 작품의 존재는 잘 알려져 있지만 이번《안목(眼目): 청관재 이응노 컬렉션》처럼 주요 작품이 망라된 전시는 처음이다. 이응노미술관에서는 2021년 청관재로부터 수집한 신소장품 15점과 함께 청관재 이응노 컬렉션을 공개한다. 청관재가 수집한 이응노 작품은 이응노의 정신을 크고 넓게 바라보게 할 뿐만 아니라 시대를 초월한 이응노 예술의 깊이를 생생하게 전해줄 것이다. 뛰어난 안목이 세대와 시간을 뛰어넘어 우리를 연결하고 있다.
■ 전시구성
○ 1부 이응노, 이름을 알리다
1부는 193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이응노의 초기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의 혼란한 정치사에서도 이응노는 그가 직면한 현실과 마주하며 꾸준히 자신의 작품세계를 구축했다. 이응노는 자신이 연구한 사군자 작품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였으며, 작품 <대죽>(1932), <분난>(1933), <매>(1934) 등으로 수상하였다. 이 무렵에는 서양화가 일본을 통해 국내로 유입되었는데, 이응노는 보다 넓은 시야에서 미술을 접하고자 1935년 무렵 일본 유학길에 올라 동양화와 서양화를 공부했다. 1939년에는‘죽사(竹史)’라는 호 대신‘고암(顧菴)’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광복 전 귀국한 이응노는 단구미술원(檀丘美術院) 결성에 참여하는 등 광복 이후 미술이 발전해 나가야 하는 방향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이후 재건하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면밀히 관찰하여 표현하는 풍속화를 그리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특징은 1950년대 중반까지 살펴볼 수 있다. <공주산성>은 1940년 겨울에 그려진 작품으로 앙상한 가지와 메마른 낙엽들, 차분한 먹빛으로 그려진 산줄기가 마치 금방이라도 눈이 내릴 듯 가라앉은 겨울 산의 느낌을 잘 나타내고 있다. 서양 풍경화처럼 원근법과 사실적인 묘사, 맑고 담백한 색채와 경쾌한 붓놀림이 특징적이다. <양색시>(1946)는 미군을 상대로 유흥업에 종사하는 여성을 그린 작품으로 시대상이 반영된 풍자화이다. 오른쪽 하단에 이응노가 당부하는 말은 다음과 같다. “그대들의 자태를 바라볼 때 눈물이 앞을 가려 마지 않노라. 하루라도 빨리 반성하여 새 옷을 벗고 직장으로 제이 국민의 현모가 되어주기를 원하노라.”
이응노, <대죽>, 1932, 종이에 수묵, 161.5×68cm, 이응노미술관 소장
이응노, <공주산성>, 1940, 종이에 수묵담채, 35×49.7cm, 이응노미술관 소장
○ 2부 이응노, 세상과 마주하다
6.25전쟁 발발 이후 지방으로 피란을 떠났던 이응노는 1953년 휴전이 되자 서울에 정착했다. 발달하는 도시의 풍경과 바쁜 사람들의 일상은 이응노의 화재(畫材)가 되었다. 이러한 그의 작품에서 과감한 필치의 선과 획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구상 그림은 반추상으로 나아갔다. 특히 꽃과 나무 같은 자연물은 그 대상을 확대하거나 해체하며, 화면 안에 펼쳐졌던 공간은 점차 평면으로 변화하였다. 1957년 뉴욕월드하우스 갤러리에서 기획한 《한국현대미술전》에 출품된 작품은 이듬해 뉴욕에서 전시되었고, 이는 이응노가 세계무대를 꿈꾸는 동인이 되었다. 프랑스 미술평론가 자크 라세뉴의 초청을 받은 그는 1958년 《고암 이응노 화백 도불기념 작품전》을 개최하고 55세의 나이로 유럽 미술의 중심에서 새로운 도전을 감행했다. <6.25>(1950)는 전쟁을 기록한 이응노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하늘에 검게 솟구치는 연기 사이로 날아다니는 전투기와 폭격한 마을과 건물로 침입하는 무장군인을 볼 수 있다. 화면을 대각선으로 나눈 과감한 구도와 빠른 붓놀림으로 그려낸 폭약의 붉은 불꽃은 상황의 긴장감을 더욱 극적으로 보이게 한다. <판자촌>은 1953년 정전협정이 이루어지기 전 판자촌의 풍경을 그린 그림이다. 낡고 허름한 집들이 옹기종지기 모여 있으며 그 사이에 솥에 불을 때며 식사를 준비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렸다. <영차영차>(1954)는 전쟁의 피폐한 삶을 재건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노력을 주제로 그린 작품이다. 큰 대들보를 든 4명의 노동자들이 함께 외치는 것 같은‘영차영차’는 세상과 마주한 삶의 건강한 노동을 말하고 있다. <영차영차>는 1956년 이응노가 저술한 미술수업교재인『동양화의 감상과 기법』의 목차 페이지에 소개되었다.
이응노, <6.25>, 1950, 종이에 수묵담채, 58.3×73.2cm, 이응노미술관 소장
이응노, <영차영차>, 1954, 종이에 수묵담채, 24×33.5cm, 청관재 소장
○ 3부 이응노, 세계로
현대미술의 중심인 유럽으로 간 이응노는 종이 콜라주와 추상 작업 등을 선보이며 주목받았다. 1962년에는 앵포르멜 미술의 요람인 폴 파케티 화랑에서 《이응노: 콜라주》 전시를 통해 프랑스 화단에 소개되었다. 이후 미술계 인사들과 교류하며 미국, 독일, 스위스, 브라질 등지에서 개인전을 개최했으며 전시에 초청되었을 뿐만 아니라 미술 교육을 통해 동양미술을 알리기 위해 힘썼다. 프랑스 세르누쉬 미술관(Musée Cerunuschi) 내에 파리동양미술학교를 설립한 이응노는 수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 동백림사건으로 한국 와 있었던 공백기에도 불구하고 유럽 화단에 복귀한 이응노의 회화에는 보다 구성적인 문자 추상이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조각, 도자, 태피스트리 등 다양한 장르를 통해 실험적인 작업을 선보였다. 1975년에 제작된 <구성> 작품은모직에 다양한 채색으로 문자의 해체와 재구성을 가한 작품이다. 이응노는 고대문자를 서로 결합하고 다양한 형상으로 재창조하였다. 문자의 뜻과 상관없는 화면 구성이 되는가 하면 본래의 의미를 그대로 드러내는 경우도 있었다. 재료에서도 솜, 양털, 융, 부직포, 삼베, 모직 등을 사용해 작품을 제작했고 이렇게 제작된 작품들은 마치 벽에 거는 양탄자와 같은 인상을 남겼다. 모직에 그린 <구성>은 강렬한 붉은 색과 검은 먹의 대조가 눈길을 끌며 장식적인 효과가 강조되고 있다. 1979년에 제작된 <통일무>는 통일된 광장에서 환희의 춤을 추는 남북의 사람들을 그린 것이다. 남녀노소 구별이 없는 다중의 인간이 일정한 리듬과 방향성으로 추는 춤 그것을 이응노는 통일무라고 명명했다. 작품 하단에 이응노는‘공간의 춤, 선의 춤, 통일조국을 생각하는 춤’이라는 서명을 남겼다.
이응노, <구성>, 1964, 125×65cm, 청관재 소장
이응노, <무제>, 1969, 지름 14cm, 청관재 소장
○ 4부 이응노, 평화를 그리다
인간의 삶에 대한 관심과 관찰은 1960년대부터 인간의 형태로 화폭에 등장하며, 1980년대에는 군집을 이룬 인간상으로 나타난다. 특히 1980년 5월 광주에서 일어난 민주화운동에서 보였던 자유를 희망하는 사람들의 움직임은 <군상> 시리즈로 평화를 갈망하는 마음과 함께 이응노 예술세계가 집약되어 있다. 세계 곳곳에서 종교, 민족, 인종, 계급 등의 갈등으로 고통을 겪는 이들에게 많은 공감과 위로를 전했다. 한편 국적이 한국이어서 활동에 많은 제약을 받았던 이응노와 부인 박인경, 아들 이융세는 1983년 프랑스 귀화를 선택했다. 1989년 1월 서울 호암갤러리에서 개인전이 개최되었고, 그달 10일 이응노는 파리에서 심장마비로 타계했다. 1984년에 그린 이응노의 <군상>은 태양을 향해 한 줄기 선에 매달려 오르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대각선의 간결한 구도를 그려낸 작품이다. 태양이라는 강렬한 대상, 불가능을 향하는 인간의 추구가 매우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이응노, <군상>, 1984, 종이에 수묵담채, 40×21cm, 청관재 소장
이응노, <인간군상>, 연도미상, 테라코타, 18×22cm, 청관재 소장
○ 조재진의 서재
4전시실의 한편에 조재진의 서재를 볼 수 있다. 조재진은 자신의 서재에 미술 관련 서적을 두고 공부할 수 있도록 꾸몄다. 조재진은 이응노에 관한 전시를 관람하고 강의를 들으며 직접 이응노 작품 소장가들을 수소문해 찾아다녔다. 이렇게 수집한 자료는 청관재의 아카이브가 되었으며, 그의 서재를 재현한 공간을 공개해 컬렉터의 열정을 전하고자 한다.
○ 청관재 소개
조재진(1946~2007)은 미술품 컬렉터이자 가업인 (주)영창을 이어 받은 사업가이다. ‘청관재(淸冠齋)’는 조재진과 박경임이 직접 지어 살고 있는 집의 당호(堂號)이다. 추사 김정희의 과천 시절 작품에 있는 ‘청관산인(靑冠山人)’의 인장에서 연유하여 청계산과 관악산 사이에 있는 집이라는 뜻으로 붙여졌다.
조재진과 박경임은 전시가 오픈하는 매주 수요일 인사동 화랑가를 방문해 전시를 관람하고 미술사가들과 깊은 연을 맺으며 작품을 보는 안목과 미술에 관한 이해를 높였다. 전시와 미술사 강연을 찾아 들으며 모은 미술도서, 도록, 리플렛과 같은 아카이브는 미술사의 맥락 안에서 작가와 작품을 공부하고 자신의 관점을 투영한 컬렉션을 구축하고자 하는 컬렉터의 진중한 자세를 여실히 보여준다.
청관재는 개인컬렉터로서 기증문화를 선도하기도 했다. 2003년 강원도 양구의 박수근미술관에 유화작품 <빈수레>, 2006년 추사동호회 대표이기도 한 조재진은 前 문화재청장 유홍준과 함께 추사 김정희 선생의 유배지였던 제주도에 작품과 유물 47점, 2008년에는 민중미술컬렉션의 일부를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했다.
이렇게 모은 그들의 컬렉션은 대여나 전시에서 소개하며 알려졌다. 2007년에는 가나아트센터에서《민중의 힘과 꿈-청관재 민중미술컬렉션》 전시를 개최했으며, 이듬해인 2008년에는 『청관재 소장 서화가들의 간찰』을 발간했다. 이처럼 미술품을 향한 남다른 애정은 미술품 애호가로서 컬렉팅 현장에서 미술을 향유하고 공유하는 문화의 지평을 넓혔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