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 우주에너지 응축된 행복과 긍정의 메시지
글_김윤섭 미술사 박사
아이프 아트매니지먼트 대표
“사람들에게 행복을 전하는 작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사과작가로 기억되고 싶어요. 역사적으로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 사과들이 있습니다. 아담과 이브의 선악과, 트로이 전쟁으로 점화된 그리스신화 속 황금사과, 중력을 발견한 뉴턴의 사과, 그리고 세잔의 사과가 대표적입니다. 세잔은 고전적 원근법의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독자적인 다시점으로 입체주의 화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지요. 나 또한 나만의 시각과 조형어법으로 완성된 사과작품으로 훗날 ‘윤병락의 사과’로 회자되는 꿈을 꿉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미 ‘사과그림=윤병락’이란 수식어는 대명사가 됐다. 윤 작가가 말하는 그 꿈은 어느 정도 현실화 된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한국에서만큼은 ‘사과작가’ 혹은 ‘사과그림’이란 키워드 검색의 1순위는 윤병락 작가가 차지하고 있다. 어느 업종이나 직업에서 자신만의 브랜드를 만들어내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물론 짧은 시간에 횡재수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만큼 유무형의 감내와 인고의 노력이 만들어낸 결과일 것이다. 단지 ‘물방울’ 하나만으로 온 우주의 섭리를 화폭에 담아낸 김창열(1929~2021) 화백처럼, 윤병락 역시 수많은 이야기가 응축된 그만의 ‘사과’를 창조해가고 있다.
윤병락은 사과를 ‘자연이라는 사전 속에서 찾아낸 단어’라고 표현한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아름다운 생명력의 이미지를 사과라는 매개체로 이야기 한다. “윤병락의 그림을 보고서야 우리는 매일같이 대하는 사과가 얼마나 근사한지 또 우리가 얼마나 멋진 세상 속에 살고 있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고 한 미술평론가 서성록의 말처럼, 그의 사과는 거부할 수 없는 마력을 지닌 듯하다. 윤병락 작가가 처음부터 과일만 그린 것은 아니다. 지금의 사과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린 것은 2003년 말 이후며, 과일이 처음 등장한 것은 2002년도 접시 모양의 변형 캔버스와 함께이다. 그 이전엔 지금과는 다소 다른 전통적인 미학에 심취해 있었다. 물론 표현기법은 지금과 같은 극사실주의 화법이었다. 대학졸업 후 초기엔 낡고 퇴색된 옛 민속 기물에 주목했다. 시간의 훈장인 먼지가 곱게 내려앉은 기물들에서 남다른 삶의 정취를 보게 된 것이다. 아마도 그는 그러한 옛 민속 기물들을 통해 어머니세대와 긴밀한 교감을 나누었는지도 모른다.
“나에게 사과는 유년 시절 기쁨을 동반하는 고향의 향수가 어린 과실입니다. 감상자 개인마다 추억과 기억은 다르겠지만, 행복을 소환하는 매개체가 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햇빛, 비, 바람 등 자연의 수혜 속에 결실을 맺은 사과는 수확의 기쁨이자 풍요로움의 상징입니다. 온 우주의 에너지가 사과 한 알에 응축되어있으며 우리는 사과를 통해 그 에너지를 느낄 수 있고, 또한 인간 존립에 필수적인 자연에 대해 감사함을 잊지 않게 됩니다. 햇살을 듬뿍 받는 작품 속 사과를 보며 긍정적인 행복의 에너지가 전해지길 기대합니다.”
아마도 ‘사과작가’로 통하는 지금의 윤병락에게 과일 소재도 이전 작품들의 주요 소재였던 옛 기물들과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이전의 소재들이 일상생활의 온기가 고스란히 밴 어머니의 기억이었다면, 사과를 비롯한 여러 과일들은 자신의 가장 소중한 추억이자 기억의 소산이다. 윤병락에게 ‘사과란 어떤 의미인가?’를 물으니, 망설임 없이 ‘고향’이라고 답한다. 그 짧은 ‘고향’이란 단어만큼 많은 사연을 함축할 수 있는 것이 몇이나 될까. 그렇다면 윤병락은 사과를 왜 고향이라고 했을까?
마침 태어나고 고등학교까지 지낸 곳이 천지에 사과밭이 널린 경북 영주란다. 그렇게 사과는 이미 삶의 숙명처럼 세월을 함께 했다. 아버지께서도 포도과수원을 운영하고 어머니께선 어린 자식의 교육을 위해 과일 행상도 마다치 않으셨다니, 윤병락에게 사과의 의미가 남다르겠다는 점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이렇듯 종종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그 작가가 살아온 뒷얘기가 큰 도움이 된다. 사과나 복숭아, 수박처럼 윤병락 작가가 즐겨 그려온 과일그림에서 하나같이 진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는 것 역시 그 안에 삶에 대한 진정성을 담아냈기 때문일 것이다.
윤병락 그림에서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은 화면구성의 시점과 독창성이다. 윤 작가의 그림은 모두 ‘위에서 내려다본 부감시점(俯瞰視點)’이다. 그것도 상식적인 정물화 구성법을 정면으로 거스른 화법을 구사한다. 보통 정물화라고 하면 물체가 앞쪽부터 뒤쪽으로 겹겹이 쌓여가며 공간감을 만들어내는 것을 정법으로 삼는다. 또한 앞쪽에 크고 무거운 기물을 배치해 안정감을 도모한다. 하지만 윤병락의 조형어법은 정반대를 보여준다. 무겁고 큰 물건을 위쪽에 올렸고, 각각의 기물들은 독립적으로 흩어지게 배치했다. 미술학도 청년시절 새로움을 추구했던 객기로 출발했지만,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은 서양화와 동양화기법이 융합된 그만의 변별력과 경쟁력을 담보하는 특징이 되었다.
정형화된 화면을 탈피한 ‘변형캔버스’ 역시 윤병락 그림의 큰 특징이다. 이 변형캔버스를 짜는 과정은 쉽지 않다. 튀어나온 모양대로 나무패널(합판)을 잘라내고 홈을 파내며, 수작업으로 최소 이틀 정도는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작업실 한쪽에 목공실을 따로 마련해뒀다. 원하는 형태를 합판에 스케치한 후 직소(Jigsaw)를 이용해 곡선을 따라 자르는데, 오랜 기간 뒤틀림을 방지하기 위해 자작나무 합판을 두 겹으로 덧댄다. 이 위에 찢어도 잘 안 찢어질 정도 두께의 우리나라 전통한지(삼합 닥종이)를 캔버스 천처럼 입혀 붙인다. 붓질이 밀리거나 유화물감이 지나치게 스며들지 않도록 미디엄으로 서너 번 밑칠을 하면 바탕화면이 완성된다. 그 위에 처음부터 다시 스케치를 하고 밑칠을 한 다음 기본 채색에 들어간다. 유채물감의 무게감과 질감, 한지에 스민 부드러운 투명함 등이 어우러져 ‘윤병락 사과만의 신선도’가 완성된다. 특유의 맑고 깨끗한 색채와 독창적인 표면처리는 작가의 노동집약적인 손맛 덕분이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사과그림의 자유로운 연출방식에 따라 전혀 다른 공간의 느낌을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대형 사과상자 그림 주변에 마치 상자에서 굴러 내린 것 같이 낱개의 사과 몇 알을 붙여놓다 보면 아주 색다른 생동감을 자아낸다. 낱개 사과를 어디에 어떻게 붙여 놓느냐에 따라 공간은 더욱 무한하게 확장되어, 회화의 평면성을 넘어 입체적인 설치 영역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이것이 윤병락 사과그림이 지닌 공간연출의 비법이다. 그래서 윤병락의 사과그림은 관람자가 선 주변의 공간 전체를 전시장으로 탈바꿈 시켜준다. 가정집이든 사무공간이든 사과나 사과상자만 그려진 그림만으로도 무한대의 유기적인 여백을 만들어낼 수 있다. 사과 한 가지 소재만으로도 생동감과 긴장감, 생경함을 동시에 전한다. 이처럼 공간에 대한 탐구와 연구는 윤병락에게 큰 화두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사과그림이 나오기까지의 작품들을 시기별로 간단히 살펴보자.
화가의 꿈을 초등학교 2학년 즈음에 키우기 시작했고, 결국 미술대학을 진학하게 된다. 어릴 적부터 화가는 ‘남들과는 좀 달라야’ 된다는 강박관념을 가졌던 것으로 회상한다. 자연스럽게 남들이 하지 않은 걸 시도해보는 것으로 발전하고, 대학 재학시절 창의적인 작품을 만들어보기 위한 실험을 쉬지 않았다. 특히 군 제대 후 2학년에 복학하면서 학과의 암실 관리를 맡게 된 것이 행운이었다. 회화 작업 외에도 사진이나, 실크스크린 작업 등 다양한 시도를 해볼 계기가 되었다.
“대학 재학시절 대한민국미술대전 특선 수상은 ‘작가의 삶을 살겠다고 결심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특히 심사위원이셨던 하모니즘의 창시자 김흥수 화백의 격려전화 한 통은 나 자신에 대한 믿음, 내 작업의 가능성과 열정을 불러일으켰고, 작가로서의 인생을 꿈꾸게 했습니다. 졸업 후 고금미술연구회 선정 작가로서 첫 개인전을 통해 화단에 데뷔했고, 그 첫 시작이 없었다면 지금의 윤병락도 없었을 것입니다.”
별다른 철학적 배경 없는 추상보다 구상적인 요소에 만족도가 높았다. 졸업을 앞둔 시기에 그의 100호 작품 <기억재생Ⅲ>(130×162cm, 유화, 1993)이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특선을 받았다. 심사위원이었던 김흥수 화백이 직접 전화를 걸어 “색감과 구성이 우수했고, 대상 후보로까지 거론됐다. 앞으로 훌륭한 작가가 될 자질이 있다”고 격려해준 것이 큰 격려가 되었다.
졸업 후 작가로 등단한 이후에도 늘 고민은 ‘화가로서 성공해 살아남기’였다. 몇 십 명이 한 공간에서 전시하는 그룹전시에선 ‘제일 먼저 떠오르는 그림이 내 그림이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어떻게 하면 관람객이 집에 돌아가 잠을 자려고 누웠을 때까지 ‘내 그림의 잔상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게 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런 바람은 졸업하자마자 가진 첫 개인전에서부터 기질을 발휘했다. 당시 그림의 주인공은 사과가 아니었고, 초현실주의적인 형식이었다. 다소 장식적이거나 상징적인 성격에 가까웠다.
가령 1995년 고금미술상 수상 기념으로 대구 봉성갤러리에서 가졌던 수상기념 개인전에 아주 의미 있는 작품이 출품된다. 캔버스 규격으로 약 25호 크기의 <기억재생Ⅳ>(1994, 나무에 유채, 67×72cm) 작품이다. 마치 건장한 남성이 정면을 보며 서 있는 형상을 닮은 독특한 화면을 연출했다. 떡 벌어진 어깨에 다부지게 주먹 쥔 양팔인데, 곧게 뻗은 두 다리는 다소곳하게 모으고 있는 듯하다. 이는 제각각 인체 부위의 나무 조각들을 이어 붙여 만든 것인데, 현재 ‘윤병락 스타일 변형캔버스’의 시발점으로 볼 수 있겠다. 이를 계기로 1995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정형화된 사각 형태의 화면’을 탈피하는 변형작업을 본격화 한다. 캔버스의 사각 틀을 뭉갠다든가, 더 튀어나오게 덧붙여 자신만의 기호에 맞는 화면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1997~2000년경의 작품은 여러 퍼즐을 조합하듯, 다수의 크고 작은 화면을 한 덩어리로 만든 작품들을 선보였다. 하나의 캔버스로 하나의 그림이 완성되는 게 별로 없었다. 가령 화면 중앙에 메인 주제의 주인공을 그려 넣고, 양옆의 작은 화면들엔 보조적인 이미지들을 조합해 메시지 전달력을 극대화한 것이다. 이때 주목할 점은 크든 작든 각각의 퍼즐화면들 역시 완벽한 완성체라는 점이다. 그 조각화면 하나만으로도 독립된 작품이 될 수 있게 하여 견고함을 더했다.
보물창고 찾기-副 145.5×50cm, Oil on Canvas 2001
처음 배경을 없앤 그림은 2001년 주판을 그린 작품 <보물창고 찾기-부(副)>(2001, 캔버스에 유채, 50×145.5cm)이다. 주판은 사각이니까 캔버스 비율만 맞추면 되겠다 싶어 실험해봤다. 하고나니 ‘배경이 없어도 그림이 되는 구나’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 그 이후에 나온 명작이 바로 고가구 반닫이 작품 <가을향기>(2003, 한지에 유채, 75.5×157.5cm)였다. 정면으로 바라본 반닫이 위에 접시가 놓였고, 뽀얗게 쌓인 반닫이와 접시를 가로질러 나뭇가지를 기다랗게 올려놨다. 이 시기를 전후해 소소한 기물을 올려놓은 접시시리즈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었고, 작품에 ‘가을향기’라는 제목이 꾸준히 이어진다. 이 작품은 노무현 대통령 취임 1주년을 기념해 청와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장 배경으로 걸리며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접시시리즈에 이어 사과 궤짝만으로 화면을 구성하기 시작한 것은 2004년경이다. 사과는 단지 소재일 뿐이었다. 변형 캔버스를 통해서 ‘그림의 공간을 확장시키는 것’에 더 큰 의미를 두었기 때문에 무엇을 그리든지 소재는 중요하지 않았다. 초창기 사과 그림에선 간혹 반쪽으로 쪼개졌거나, 한 입 크게 베어 문 사과들이 등장한다. 여기에 농부의 땀을 훔쳤던 흰 수건도 걸쳐놨다. 이건 화면의 숨구멍 역할이다. 이 시기에는 사과 자체의 묘사보다, 사과 상자가 지닌 공간감으로 ‘열린 조형성’을 연출하는데 더 집중했다. 사과는 전체적인 균형과 긴장감을 조율하는 요소였다. 2007년 작품 <가을향기>(한지에 유채, 82.3×50.5cm)가 대표적인 예이다. 이처럼 사과라는 모티브는 윤병락이 작품을 통해 전하려는 메시지를 보다 시각적으로 명확하게 부각시키기 위한 효율적인 매개수단이 되었다.
예를 들어 2010년 전후 사회적으로 환경적 이슈가 크게 부각되었던 시즌에 윤병락의 사과그림에도 그러한 고민이 투영됐다. 윤병락에게 사과 역시 환경문제의 화두를 상징하는 키워드이다. 기온 상승에 따라 사과의 재배지가 점차 이동하다보면 결국 우리나라에서 사과를 만날 수 없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내셔널지오그래픽 매거진에 소개된 북극곰이나 돼지를 등장시키거나, 그 위에 사과를 올려놓았다. 이런 작품은 2006년부터 그렸으니, 동시대적 감성 이슈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다고 여겨진다. 이후 현재까지 사과라는 소재로 자신만의 조형적 신념을 꾸준히 천착해오고 있다. 언젠가는 새로운 사과시리즈를 건축물과의 콜라보 또는 컴퓨터 그래픽을 통한 거대하고 독창적인 공간 속 작품설치를 꿈꾸기도 한다.
전업 작가인 윤병락의 일과는 정말 단순하다. 하루 평균 10시간 넘게 작업실에서 보낸다. 잠자는 시간 제외하곤 거의 모든 일과를 작업에 할애한다. 줄선 일정을 감당하기 바쁘기 때문이다. ‘솔드아웃 작가’라는 별명처럼, 국내외 아트페어와 기획전, 유수의 아트옥션과 갤러리의 러브콜이 줄을 잇는다. 이미 수천 명이 윤병락의 사과를 통해 행복에너지 수확의 기쁨을 만끽한 일상을 누리고 있을 것이다. 윤병락이 전해줄 다음 시즌의 또 다른 메시지를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