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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무게 - #2 흩어지고 다다른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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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회 우민미술상 수상작가 임선이 개인전 《바람의 무게 - #2 흩어지고 다다른 곳》





전시기간 : 2022.11.18(금) - 1.31(화) 

전시장소 : 우민아트센터

관람시간 : 오전 10시 - 오후 6시 (11-2월 기준)

             매주 일요일, 설, 추석에는 휴관합니다.

참여작가 : 임선이

관람료 : 무료

주최 : 우민아트센터

후원 : 우민재단, 충청북도, 청주시


우민아트센터는 2011년 9월 2일 개관 이후, 지역문화예술을 위한 공공적 기여와 창의적 소통을 위한 인터-로컬 뮤지엄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 우민아트센터는 다양한 형태의 전시를 통해 지역 미술계와 한국 현대미술에 유의미한 담론들을 만들어 내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충북 지역의 문화예술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2002년에 설립된 ‘올해의 좋은 작가 미술상’은 지역의 명실상부한 대표적인 미술상으로 자리매김해 왔습니다. 우민아트센터 (우민재단)은 2016년부터 우민미술상을 주관하고 있으며 2017년에는 현대미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지역을 넘어 한국 현대미술의 발전에 기여하는 작가를 지원하기 위해 ‘우민미술상’으로 명칭을 변경하였습니다. 수상작가에게 상금과 개인전 개최를 지원하여 작가에게 지속적인 창작과 발표의 기회를 제공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 《바람의 무게 - #2 흩어지고 다다른 곳》은 2021년도 제20회 우민미술상을 수상한 임선이 작가의 개인전입니다. 임선이 작가는 시대마다 변화하는 흔들리는 풍경과 몸을 통한 선험적인 ‘봄’이라는 육화된 시지각의 관계에 관심을 가져왔습니다. 불확실하고 가변적인 시각, 지각적 진리의 모호함으로 드러나는 인간 주체와 사회 현실의 불안정성에 대해 작업해왔습니다. 최근에는 노년의 수평적 시간을 통해 신체에 나타난 삶의 흔적과 몸의 무의식적 행위에서 삶의 함축된 층위를 찾아내고 이를 통해 삶의 현상과 공존의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는 삶과 죽음, 영원과 찰나, 존재와 부재가 교차하는 삶의 다층적 양상과 무게에 대한 작가의 오랜 시선을 살펴볼 수 있는 자리로 마련되었습니다. 전시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 임선이(b.1971, 대전)는 중앙대학교 조소학과 학사와 동대학원 석사를 졸업했다. 《부조리한 풍경》(소마미술관, 2008), 《기술하는 풍경》(갤러리 비올, 2010), 《걸어가는 도시 흔들리는 풍경-SUSPECT》(갤러리 잔다리, 2014) 등의 개인전을 열었고 2019년에는 《양자의 느린 시간》이라는 제목으로 대전테미예술창작센터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2021년 1월에는 서울문화재단 지원을 받아 space so에서 개인전 《품은 시간과 숨(breath)의 말》을 개최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창동레지던시, 서울시립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금천예술공장 등에 입주하여 활동하였고 제20회 우민미술상(2021), 제6회 고암미술상(2022)을 수상했다. 현재 화이트블럭 천안창작촌 9기 작가로 입주하여 활동하고 있다.



임선이: 흔적은 오래 남을 것이다


인간의 기억이라는 것은 영 믿기 어려운 것 같으면서도 죽도록 남아 끝내 지워지지 않는 것이라, 잊고 싶은 것이 있다 해도 포기하는 것이 좋다. 죽을 때까지 따라다닐 것이라면 특정한 기억의 형상을 만들어 가두어 두는 것도 좋다. 이를테면 다시는 날 수 있는 몸을 갖지 못하지만 깃털은 형형색색으로 아름다운 <몸을 잃은 새-다다른 곳>처럼 말이다. 둥글려진 깃털은 원래의 몸에서 그러했듯이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다. 푸른 깃털은 인간들에게 희망을 주는 파랑새였을까, 공작 깃털은 너르고 화려한 날개를 펴서 제 짝을 유혹했을까, 어두운 밤색 무늬의 깃털은 낮에는 자고 밤에만 일어나 동그란 눈을 뜨고 사방을 살펴보았을까. 깃털은 몸을 잃었으나 사바나의 초원 같은 땅 위 둥근 항성처럼 떠 있다. 임선이는 기억을 뭉쳐 응축의 형태를 만들었다. 기억의 깃털에 집을 주고 땅을 주었다.


새의 깃털을 붙이는 시간은 한 땀 한 땀 작가에게 허리와 목이 굽는 고통을 안겨 주었겠지만, 흐르는 시간이 육체적 반복으로 대체될 수 있다는 것은 대개 옳은 일이다. 어쩌면 이리도 고운 것, 너는 무엇이었을까, 하는 등의 달아나는 생각들이 원래의 동기에 덧입혀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작은 깃털은 작은 구형으로, 큰 새들은 큰 구형으로, 몸을 잃은 새들은 새로운 몸을 입고 다시 무엇이 되었다. 그것이 존재인지 부존재인지, 상실을 말하는 것인지 아직 있음을 말하려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돌고 돌아 모인 깃털들이 서로 모여 별처럼 둥글게 무리지어 있는 그 형태들은 살아있는 것과 죽은 것을 동시에 연상케 한다.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들은 그것을 다루는 작가에 따라 어찌나 추하고도 아름다운지, 어찌나 교훈적이면서도 절망적인지 다 서술하기는 어렵지만, 이렇게 다양한 작품들 가운데 나는 임선이 작가의 형태를 마음에 담아 둘 생각이다.


예컨대 어미소와 송아지를 반으로 갈라 포름알데히드 수조에 담아 그 사이를 지나가도록 했던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은 “알았어, 알았으니 그만해.” 하는 진저리쳐지는 감상을 불러 일으켰고, 그는 다른 생물들을 대상으로 연작을 보여주었다. 뒤샹이 좌대 위에 변기를 얹어놓는 일은 다시 태어나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허스트가 소를 반으로 갈라 보여주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미술계에서 글쓰고 일하는 사람이 이 무슨 무식한 발언이냐 할 수 있겠지만, 정말 그러하다. 해골에 진짜 다이이몬드 수천 개를 박아 넣는 아이디어도 전혀 새롭지 않으며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다. 죽음을 죽음이라고 말하는 동어반복이니까, 몇 세기 동안 지속되어 왔던 바니타스(vanitas)의 전통을 비싸게 재현하는 일이니까 말이다. 그런 생각은 할 수 있어도 굳이 실행하지 않을 뿐이다. 이렇게 작가들이 죽음을 다루는 방식과 목적은 정말 얼마나 다른가.

반면 하얀 소금바닥 위에 설치된 샹들리에들이 한 순간씩 반짝이면서 꺼져가는 숨을 재현하는 것은 그 어떤 비유보다 아름답다. 이 작품은 몸과 마음이 숨을 다할 때 눈부시게 솟아오르며 반짝이는 것, 솟아올랐다가 금세 사라지는 것, 이 보편적인 죽음의 과정에 대한, 마지막 숨에 대한 재현인 것이다. 아름답지만 폐허이고, 빛이지만 어둠인 장면, 종국에는 모든 빛이 어둠으로 귀속되는 모습, 이 작품의 제목은 <녹슨 말-#기억하는 숨>이다. 샹들리에와 켜짐과 꺼짐은 형광등이나 LED등이 켜지고 꺼지는 것과 전혀 다르다. 왕관처럼 둥근 형태에 반짝이는 유리 장식들이 매달려 빛을 산란시키는 샹들리에는 어떤 장소에서나 주인공의 역할을 한다. 가장 중심에서, 다른 무엇을 비추어야 한다는 의무가 없다는 듯이 저 스스로 빛난다.

  

크고 작은 샹들리에들이 힘을 다 해 반짝이고 서서히 빛을 잃어가는 것을 반복하는 이 작품은 별다른 레퍼런스 없이도 삶의 어떤 순간을 불러일으킨다. 반짝였다 흐려졌다 하는 기억들과, 기뻤다 슬펐다 하는 순간들과, 그 모든 것이 반복되는 우리의 인생과, 밤이면 반짝였다 낮에는 사라지는 별들과, 정말 그렇다, 마지막 발화와 마지막 숨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새의 깃털과 반짝이는 샹들리에 같은 시적 은유의 세계가 생성된 곳에서 추락하지 않고 버텼던 작가는, 확고한 부재와 종말을 보여주는 사진 몇 장을 기어코 내놓았다. <바람의 무게-#여행자의 시간>이라는 제목의 이 사진 연작은 부재하는 이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자개무늬가 화려한 장롱과 그 앞의 성모상, 성모상의 손에 걸려 있는 묵주, 커튼 너머로 들어오는 햇살, 장롱 안에 정갈하게 걸려 있는 외출복들, 어떤 옷의 소매는 팔 길이에 따라 접혀 있고, 어떤 옷의 소매에는 생활에서 묻은 때가 보이며, 올이 한 줄기 삐져나와 손을 한 번 봐야 할 것 같은 이 옷들의 주인공은 이 자리에 없다. 사람의 형태대로 만들어진 옷에서 사람은 빠져나가고 형태만이 남았다. 빈 방의 바닥과 벽에는 주인을 잃은 가구가 치워진 흔적들이 배겨있다. 모든 장면이 부재와 부재의 흔적을 말하고 있다. 이 작품들을 보고서야, 아, 이 장면들이 이 전시 전체를 이끌어가는 힘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부재의 힘, 부재로 인한 슬픔의 힘이다. 임선이의 전시를 보면서 마음이 흔들리고 움직였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보통, 요즈음의 작품들은 마음보다는 머리를 요구하지 않는가,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작품으로부터 테스트를 당하거나, 놀림을 당하거나 하는 일은 너무 흔하여 이제는 더 놀랍지도 재미있지도 않다. 한껏 서사를 구성했어도 그것이 식당 입구의 모형 음식 같고, 기술력을 총동원해도 압도적인 무기력만이 느껴질 때 한 번쯤은 회의하게 된다. 미술은 앞으로도 살아남을 것인가?


자연물과 인간의 모든 행위에 신화적 기원을 부여했던 고대 그리스에서는 미술의 시작을 부재에 대한 그리움으로 보았다. 이른바 부타데스(Butades) 이야기가 그것인데, 도공이었던 부타데스의 딸이 처음으로 그림을 그린 사람이고, 그 아비가 처음으로 조각을 만든 사람이라는 이야기이다. 부타데스의 딸은 전장에 출정해야 할 운명을 가진 어느 젊은이와 사랑에 빠져있었는데, 내일로 다가온 이별을 슬퍼하며 동굴 안에서 함께 밤을 보내게 된다. 동굴 벽에 옆으로 기대 잠든 젊은이의 그림자가 모닥불에 비쳐 보일 때, 부타데스의 딸은 그림자의 실루엣을 따라 그의 얼굴을 그렸다.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를 연인의 얼굴을, 곧 사라지게 될 그리운 얼굴을 선으로 남긴 것이 그림의 시작이라는 이야기이다. 적어도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 낭만적인 이야기 속에서 그림의 용도를 찾았다. 볼 수 없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 더 이상 없는 것을 있게 만드는 것은 미술의 최초 기능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었나 보다. 또한 나는 그런 의미에서 임선이의 작품이 최근에 보았던 여러 전시들 가운데 유달리 마음에 남았던 이유를 찾았다.


임선이의 작품 속에서 마음에 남아 있던 혼돈의 기억들은 제각각의 형태를 가지고 균일한 땅과 드높은 하늘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한 때 곁에 있었던 사람을 쓰다듬는 대신에 갖가지 부드러운 새의 깃털을 만지고, 꺼질 듯 꺼지지 않던 마지막 숨을 기억하는 대신에 반짝이는 전등의 찬란한 산란이 심호흡을 한다. 사진 속의 부드러운 반사광이 모든 공간을 메우고, 끝이 없는 공허함도 저물어간다. 우리는 살아가며 생각지도 못한 부재를 경험하게 될 것이고, 종국에 우리 모두는 부재의 사람과 같은 길을 갈 것이다.

태어난 모두는 이전의 생명들과 마찬가지로 마지막 숨을 깜빡이며, 몸이 없는 깃털로 남게 될 것이라고, 이후의 사람들은 그 흔적을 오래 기억하게 될 것이라고, 임선이의 작품들은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흔적들은, 불확실한 황혼이 가고 밤에 별이 뜨는 것처럼 언제나 돌아오고 오래 남을 것이라고. 그러니 삶이여, 망자들의 부재에 더 이상 흔들리지 말고, 신선한 대기 속에서 날아가는 새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불분명한 세상 이치를 원망하지 말고, 자신의 종말을 향해 걸어가라고, 그 흔적들은 말해준다.


 

이윤희


이화여대에서 독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미술사학과를 졸업하고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이후 ‘공간’ 지 미술기자를 시작으로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학예실장, 청주시립미술관 학예팀장, 수원시립미술관 학예실장 등 공공미술관에서 전시기획을 했다. 이화여대 미술사학과 초빙교수를 역임했고, 고려대 등 여러 대학에서 미술의 역사를 강의했다. 2022 서울국제조각페스타 전시감독을 역임했다. 현재 수원대학교 미대 객원교수로 강의하고 있으며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번역서로 『그림자의 짧은 역사』(현실문화, 2006), 『포토몽타주』(시공아트, 2003), 『바디스케이프』(시각과 언어, 1999)가 있으며, 저서로는 『불편한 시선 _ 여성의 눈으로 파헤치는 그림 속 불편한 진실』(아날로그, 2022)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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