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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지훈·양나영 2인전 : 초월된 위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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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된 위계들
Transcending Hierarchies


1.  하이퍼링크는 위계를 긍정한다 : 예술로 맞서기

   코로나(Covid19) 대유행으로 전세계의 모든 이동이 봉쇄되었던 지난 수 년간의 경험은 현실 세계에 많은 변곡점과 사유(思惟)를 낳았다. 진보와 번영을 향해, 결코 멈추지 않을 것 같은 질주를 계속해 왔던 최근 갑작스레 맞닥뜨린 ‘정지’는 삶의 도처 곳곳에 너무나 큰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세상이 그 가속을 온전히 그만둔 것은 아니었다. 비접촉과 멈춤의 시기에서 인간과 인간이 만나는 전통적인 방식의 교류는 차단되었지만, 인터넷이라는 비물리적 네트워크는 건재했기 때문이다. 전 세계를 단단하게 묶고 있는 이 관계망은, 마치 우리의 실재와 삶의 형태가 어떻게 변할지라도 서로의 연결과 유대는 끊어지지 않으리라는 굳건한 약속처럼 보이기도 한다. 

  돌이켜보면 “하이퍼링크가 위계를 파괴한다(Hyperlinks Subvert Hierarchies)”고 예측했던 클루트레인 선언(Cluetrain Manifesto, 1999)은 보란듯이 빗나갔다. 정보와 지식에 대한 장벽이 허물어진 개방적이며 탈중앙화된 세상을 꿈꾸었던 클루트레인 선언문은, 인터넷의 하이퍼링크 기능을 통해 사용자가 전통적인 권력 구조와 위계를 우회하고, 해체할 수 있으리란 희망찬 미래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세계는 그 바람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가속하고 있는 듯 보인다. 계급은 여전히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며, 위계의 파괴는 커녕 오히려 데이터 독점과 인프라 집중으로 정보격차가 가속화되고, 전례없는 불평등과 인간 소외가 발생하고 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세계는 접촉이 필요없는 촉각 상실의 시대를 향해 달려나가고 있고, 서로의 온기를 피부로 느낄 수 없는 세상에 강제로 내던져지고 있는 우리는, 예술이 이끌어내는 텔레마틱 포옹(Telematic Embrace)을 말했던 로이 애스콧(Roy Ascott)처럼 마음 한 켠에 희망을 품고 이 새로운 시대의 연결을 조심스럽게 맞이할 준비가 필요하지 않을까.

  그렇기에 온라인 네트워크와는 다른 방식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이끌어내는 예술의 잠재력을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예술은 그 비평적 작용을 통해, 가려지고 보이지 않는 것들을 다시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잊혀졌던 사람들, 사유, 역사, 신념 등을 사회적 위계구조 안에서 벗겨내고 포착하여, 링크(중계)하는 것은 예술이 가진  실재적인 네트워크로서의 힘이다. 

  이번 전시 《초월된 위계들 Transcending Hierarchies》은 미술이 가지는 관계성에 다시 한번 기대보려는 시도이자, ‘물리적 네트워크로서의 미술이—비물리적 인터넷 네트워크가 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위계와 소외에서 인간을 구하는 단서가 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조심스레 담았다. 본 전시는 두 명의 작가 민지훈, 양나영이 세계를 바라보고 사유하는 방식에 주목한다. 민지훈이 관점을 비틀어 기계와 인간을 뒤바꾸고 재조합하는 전략, 양나영이 도시 공간을 거닐며 사물을 관찰하고 포착하는 일련의 전략들을 소개하고, 이들이 어떻게 숨겨져 있는 계층 구조를 드러내고 극복하려 하는지를 조망해 볼 것이다.

2.  민지훈 : 시선 뒤집기 / 움직이기

  국민국가 간의 전면전이 다시 시작된 흉흉한 시대에서, 시각 이미지 기계들이 사회를 감시하는 통제 장치라는 비릴리오의 통찰은 더욱 정교하고 무정한 방식으로 증명된다. 그러나 민지훈 작가의 일련의 프로젝트에서 기계는 전체주의적 전쟁기계가 아니라, 사람을 대신한 인간성의 상징으로서 표면 위에 나타난다. 작가는 기계-사람의 배치를 뒤바꾸고, 사물과 인간의 시각을 치환한다. 상상력이 가미된 그의 세계에서 기존의 권력 구조는 뒤집히고, 저항의 가능성이 타진된다.

  민지훈의 작업에서 시선과 움직임은 중요한 요소이다. 이를테면, <상자의 기억 Memory of the Box>(2021-2022) 연작에서 작가는 작업의 소재로 택배 박스를 가져오는데, 우리가 가장 흔하게 접하고 사용하는 이 평범한 육면체는, 아무런 특징도 기능도 없으며 용도를 다하면 폐기되는 철저한 객체로서의 물체다. 그러나 작가가 이런 평범한 상자에 센서와 카메라를 달고 시각을 부여하는 순간 생기는 내러티브는 객체(사물)와 주체(인간)의 위치를 뒤바꾼다. 특히 시선의 뒤집힘, 다시 말해 바라보는 이와 보여지는 이의 위치를 뒤바꾸는 행위는, 주체와 객체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 시지각 속에 내재된 권력의 위상학을 재배치하는 가장 효과적인 전략이 된다. 

  작가는 기계장치를 통해 사물에 움직임을 부여하고, 마치 생명을 가진 존재처럼 은유하여 나타낸다. 움직인다는 것은 곧 ‘살아있음’의 가능성을 내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이 작가가 정적인 이미지 대신, 운동하는 기계장치와 영상을 작업 매체로 택한 이유가 아닐까. 그의 작업에서 기존 질서 속에서 사물에게 부여된 목적성은 사라지고, 당연했던 것들은 모두 의미를 잃는다. 정지할 것, 침묵할 것, 보이지 않을 것, 기억되지 않을 것. 객체가 객체로서 강요되는 모든 것들은 하나의 몸짓(gesture)이 되어 관객 앞에 등장한다.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에 따르면, 본디 언어 이전부터 존재했던 소통의 수단으로서 몸짓은 언어로는 담아내지 못하는 그 너머의 것들을 표현해 낼 수 있다. 그래서일까, 민지훈의 기계들이 움직이는 모습은 마치 폴터가이스트(Poltergeist)처럼, 보이지 않는 자들이 존재를 의탁하여 만들어내는 춤사위처럼 보이기도 한다. 

3.  양나영 : 공간으로의 회귀

 이제 공간은 점점 더 큰 도전을 맞이하게 되었다. 기존의 공간 개념에서 탈피하고자 했던 넷아트의 등장부터 최근의 메타버스(Metaverse) 광풍과 같은, 탈공간화(de-spatialization)와 가상공간으로의 몰두는 마치 새로운 헤게모니 질서가 된것처럼 실재공간의 토대를 점점 지우고 있다. 탈공간화와 맞물려 중요한 것들을 은폐하여 ‘보이지 않게' 하는 스펙터클의 힘 역시 절정에 달한 듯하다. 자본과 계급이 만들어내는 스펙터클은 현대 도시 공간을 비판이 소실된 정신분열증적인 공간으로 전락시킨다.

  양나영 작가는 도시 공간을 거닐며 우연히 마주치는 흔적들을 관찰하고 전유함으로써 위계를 벗겨낸다. 그의 사유는 상황주의자들이 스펙터클을 파괴하고자 도시를 ‘표류(derive)’했던 방식으로 나타나는데, 그들은 현대의 도시를 ‘단편적으로 분리된 공간들의 단순 집합’으로 보았다. 표류는 이러한 잘짜여진 합리적 도시 공간을 비의도적이고 우발적으로 배회함으로써 그 속의 삶을 드러내는 행위이다. 양나영이 공간과 사물을 포착하는 방법은 이와 유사하다. 그의 회화와 오브제는 필연적으로 신체적 걷기(표류)에서 모티브를 얻어 도시 공동체 속 삶의 흔적을 이미지로 포착한다. 공간의 정치가 무력화된 속도정치의 시대에서, 작가의 이러한 표류-이미지 포착 행위는 다시 한번 공간의 정치학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려는 시도로 읽을 수 있다.

  흔히 ‘달동네’라고 불리는 소외된 도시 공간은 작가의 주요한 작업 주제이다. 어린시절 낡고 비좁은 다세대 주택에서 자랐던 그는, 가속하는 세상에서 뒤쳐져버린 ‘우둔하고 굼뜬 존재’들의 흔적들을 자연스럽게 주목할 수 있었다. 작가는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소외된 인간(Homo Sacer)의 현신으로 ‘덕지덕지 무성의하게 발린 시멘트 표면’과 '낡은 플라스틱 파이프'라는 두 가지 요소를 포착하여 작품에 차용한다. 몇번이고 겹쳐져서 덧발린 시멘트의 표면이 신체적 노동의 시간과 흔적을 담고 있다면, 도시 공간에서 내부와 외부를 연결하는 파이프는, 그 자체로 호흡과 순환이라는 삶의 증거이다. 

  <경계계단>(2022-2023) 연작은 양나영의 예술관이 가장 잘 녹아 있는 작품들이다. 계단은 도시 공간을 상층과 하층으로 나누는 상징적인 구조물이다. 수십 수백미터 높이를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는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 덕에 우리가 종종 잊곤 하지만, 도시 공간의 높낮이가 만들어내는 층위는 오랫동안 계급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작가가 포착한, 층계마다 높이도 다르고 엉성하게 만들어진 달동네의 시멘트 계단들은, 재단되고 계획된 도시 구조 이전에도 이 땅에 사람이 먼저 존재했음을 드러낸다. 합리성이나 효율성이 제거된 그 길 위에서 오히려 사람의 존비(尊卑)는 없다. 아이들의 가볍고 서툰 발걸음부터 나이 든 노신사의 느리고 절제된 걸음까지, 계단을 딛고 오르내리는 저마다의 보행은 그저 짊어진 육신의 무게만을 오롯이 시멘트 표면 위에 남길 뿐이다. 사물에 인간의 흔적이 새겨지고, 인간의 삶은 사물에 의해 드러남으로써 그 둘이 닮아가는 것만 같다는 작가는, 공간을 긍정하는 방식으로 그곳에 새겨진 인간을 긍정하고 있다. 

글 : 이지원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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