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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의 도시, 도시의 공동>
도시계획가 이주연
무채색의 흑과 백으로 구별돼 보이는 꽃병 또는 마주 보는 사람의 옆얼굴. 대부분의 우리가 모르기 힘들 정도로 이 그림은 정말, 매우 익숙하다. 그림이 묻는 것은 한결같다. 무엇이 우선으로 보이는가. 어느 것을 형체의 상(figure)으로 보고 어느 것을 배경(ground)으로 삼는가. 어떤 것을 객체의 주로 삼아 다른 것을 배경이라는 부로 간주하며 이렇게도 보고 저렇게도 보게 된다. 질문을 다시 고쳐 던져본다. 이 그림을 그릴 때 무엇을 그리고자 했는지. 흑백의 그림은 꽃병과 사람의 얼굴을 동시에 그린 것이 아니다. 분명 꽃병을 그렸거나, 아니면 서로 마주 보는 사람을 그렸을 것이다. 둘 중 하나를 그리니 그리지 않은 다른 하나가 새삼 존재하게 되었을 뿐이다. 어느 하나를 지우면 나머지는 지우지 않았음에도 사라진다. 그리지 않았는데, 지우지 않았는데도 존재했으나 부존재한다. 의도와 상관없이 인과관계의 상관을 넘어 상호보완의 절대적 존재값이 서로에게 지워져 있다. 정말, 매우 상대적이며 공평하게 상호의존적이다.
도시건축 분야에선 프로젝트 구역 안 위치를 점하고 있는 건축물을 검은색으로 단순하게 표현하는 흑백 도면(Black-White 또는 Figure-Ground Map)을 흔히 활용한다. 검은색의, 대부분 네모진 고형(Solid)의 형체들은 건축물의 존재감 - 배열, 간격, 규모, 밀도, 이산 분포 등의 정도와 형태 즉 공간을 점유하는 양태 - 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동시에 그리고, 비로소 나머지 하얀 바탕은 공간(Void)으로 인식된다. 공간환경을 구성하고 있는 형태, 폭, 배열, 위계, 연결, 연속성 등 이를 주제로 강조해 보기 위해 흑백을 반전시켜 표현할 때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도면이 갖는 하얀 바탕이 그대로 공간이자 배경이 된다. 고형의 건축물이 얹혀진 대지는 건조물 외의 모든 공간을 틈새도 없이 메우고 있고 빛을 가득 담아 하얗게 하늘을 향해 열려있다. 건축가와 도시계획가는 이 도면 안에서 공간 이용자인 사람의 흐름과 동선의 이합집산을 가늠하고 시선과 시선의 교차, 만남과 헤어짐의 사회적 접촉과 교류의 가능성을 상상한다. 지붕을 인 사각의 고형(Solid)이 사적 공간으로 할애된다면 노천의 공간(Void)은 다중을 위한 공간으로 역할을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물리적으로 상호 간 연결되고 도시는 우리 모두의 공간이 된다.
2020년 새해의 시작과 거의 함께 Covid19 범유행은 전 지구적인 양상으로 번져 일상적인 공간 인지각의 범위를 벗어났다. 지구 단위의 공간 스케일을 걱정하기 익숙치 않고 감당하기는 더욱 버겁다. 도시행정은 발 빠르게 전염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감염의 위험으로부터 공동의 안위를 확보해야 했다. 이 공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집객시설이나 과밀이 우려되는 공간에 대한 통제가 행해졌다. 모두의 공간이 한순간, 그리고 한동안 어느 누구에게도 예외 없이 출입과 이용의 제한이 적용됐다. 도시행정가였던 오스만의 파리 대개조계획을 통해 만들어진 지금의 길고 너르게 쭉쭉 뻗은 – 정돈된 가로수의 대로들을 통해 자유와 낭만의 도시로 오늘날 파리의 이미지를 만드는 데 크게 일조한 - 간선가로망이 공중위생의 대외 목적과 군중의 운집을 먼 시야에서 미리 파악, 와해하려는 이면의 목적을 가졌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다. 과거의 유물이라 믿었던 개인에 대한 통제가 현대에 재현됨으로 대중은 상대적인 분노를 표출하기도 했다. 도심의 활성화 측면에서 극도로 막으려는 공동화를 이때만큼은 인위적으로 조성해야만 했다. 물리적 거리두기가 사회적 거리두기였으며 이 모두를 포함해 다른 모든 분야와 측면에 공백이 번졌다. 모두에게 열린 공동의 공간이 우선 제어의 대상이 되는 모순된 상황이 동시대를 사는 지구인 모두가 공유하는 기억이 됐다.
모두로부터 ‘나’를 격리, 단절, 차단한다는 것은 부정적 행위가 아닌 권장되는 호혜이자 배려가 되었다. 사적 공간인 검은 고형의 네모 안 어디쯤 점으로 위치하고 ‘내’가 그 점 안에 있다. ‘내’가 작고 무력한 존재로서 이 상황을 감내해야 하는 긴 시간 동안 그래서 우린 차라리 ‘나’에 집중했던 모양이다. 무력감 또한 ‘나’에게 있어 재난이었고 이를 비껴가기 위해 나의 자존감과 정체성을 받치고 있는 네 개의 벽면은 ‘나의 공간’이자 은신처로 그 역할이 어느 때보다 뚜렷하게 돋보였다. 이 기간 동안 인테리어와 리모델링 수요가 어느 때보다 호황을 누렸다는 사실과 중고자동차의 판매율 증가가 이를 반증한다. ‘나’를 담는 최소의 공간 단위였던 거다.
그러나 개별 공간 안 ‘나’의 동선이 겹치고 겹쳐 수많은 ‘나’로만 가득 메워지는 – 타인을 통해 ‘나’를 확인할 수 없어 생긴 공백이 공허감으로 커가는 - 무렵 심리적 임계 상황은 그동안 당연하게만 여겼던 외기를 다시금 필요로 했다. 잠시 나간 공터나 공원, 산책길에서 타인과 맞닥뜨리며 이마저도 괜찮은 것일까 염려하는 집단적 노이로제에서 벗어나긴 쉽지 않았다. 이 시기 옥상이나 마당이 있는 사람은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이전에 한 점의 외기도 ‘우리 집’ 안으로 용납지 않으며 철통같이 닫힌 공간으로 사용하던 베란다를 외기를 접할 수 있는 공간으로 디자인하는 건축 사례가 이 무렵 소개되며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외기로 충만한 열린 공간에서의 호흡이 그만큼 간절했고 중요하다는 것이 자명했으며 여유의 빈 공간은 무용의 공간이 아닌 통기와 통풍의 순환이라는 유용함을 내포한다는 것을 – 눈으로 봄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 몸소 체험하며 알게 되었다.
피할 수 없이 모두에게 주어진 상황이었기에 겪어냈다. 앤데믹으로 외부공간에서의 활동이 자유로워지며 심리적 침체로부터 구제되었다. 이 전시는 지난 3년여의 팬데믹 시기를 겪은 전 지구인 중 5명의 작가와 1명의 도시계획가가 경험의 교집합을 나름의 시선과 해석을 통해 작품과 기획, 글로 소고한 자리이다. 스페인 독감 이후 코로나19를 겪은 우리가 앞으로 이와 같은 상황을 다시금 겪게 될까? 다음을 미리 걱정하기에 우리는 찰나의 시간을 점하며 살고 있으니 늘보의 특별한 고민보단 하루살이의 예사로운 주변 정리처럼 이 전시를 공모하여 준비하였다. 재택과 자가격리의 시간 동안 깊어지거나 넓어진 사고의 이면 숙달된 화상회의, 디지털 데이터 전송과 빠른 피드백, AI 기술 활용 등 밤낮의 시간과 이동 중 장소를 가리지 않게 되며 민첩한 진행에 큰 도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