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현: 행도그
아트선재센터는 11월 3일부터 2024년 1월 21일까지 《정지현: 행도그》를 개최한다. 전시는 예기치 못한 물질의 결합을 시도하거나 새로운 생각의 경로를 지나 뜻밖의 결과를 도출하는 정지현의 조각의 과정과 형식을 관찰한다. 전시 제목 ‘행도그(hangdog)’는 ‘수치스러운’, ‘낙심한’, ‘풀이 죽은’ 상태를 나타내는 형용사로, 클라이밍에서는 등반하다 추락했을 경우 매달린 자리에서 잠시 쉬었다 다시 등반을 이어가는 것을 뜻하는 용어로 쓰인다. ‘행’과 ‘도그’의 결합으로 개별 단어가 가진 본래 의미와는 다른 상황을 일컫게 된 ‘행도그’의 구조와 쓰임처럼 이번 전시에서 ‘행도그’는 사물의 원본에서 멀어지고 있는 정지현의 작업 상태와 구성 방식을 지시한다.
정지현의 작업은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 환경에서 느닷없이 마주하는 여러 기물과 용도 폐기된 산업재를 발견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쓸모와 효용을 다하고 버려진 사물을 작업실로 이동시켜 조각의 직접적인 재료로 사용하기도 하고, 도시에 놓인 사물의 상태 그대로를 캐스팅해 물체의 형만 옮겨와 작업의 뼈대로 삼기도 한다. 이때 정지현은 여러 가지 캐스팅 방식을 활용하는데, 외부 환경에서 신속하게 본을 뜨기 적합한 재료인 유토로 몰드를 만들거나, 알루미늄 망으로 사물을 감싼 후 손으로 꾹꾹 눌러 표면의 굴곡을 복제하기도 하고, 휴대폰의 3D 스캐닝 기능을 활용해 사물의 형을 손쉽게 디지털 데이터로 치환하기도 한다. 존재하는 구체적 사물에 기인하지만 실재가 허물어지고 텅 빈 껍데기로 남게 된 사물의 허상은 정지현의 손의 감각에 의해 다시 실재하는 조각의 형질로 전환된다. 이 때 여러 감각 요소의 총체로 객관화된 사물의 표상은 조각적 행위라는 매개 작용에 의해 정지현의 감각 기관으로 수렴된다. 현실에 존재하던 사물이 여러 단계의 감각 전이, 실재와 허상의 교차를 지나 마침내 조각의 몸으로 직조되면서 사물은 더이상 그 이름에 부여된 통념과 관념에 머무르지 않고 그 어디에도 도달하지 않은 중간적인 상태로 유동한다.
정지현의 〈오른쪽 페기〉(2023)와 〈왼쪽 페기〉(2023)는 폐차장 인근 길가에 적재된 자동차 폐기물을 아이폰으로 3D 스캐닝한 후, 납작해진 데이터에 양감을 주어 3D 프린팅한 작업이다. ‘자동차’라는 이름으로 기호화되었던 사물이 더이상 기능을 못하고 버려지면서 사물은 이름을 상실하고, 다시 물질로 복기한다. 날것으로 이행하는 사물을 스캐닝해 출력하는 것은 실재적 본질이 사라진 사물의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상태를 기술의 힘을 빌어 붙잡고, 실체화하는 시도이다. 이 과정에서 정지현은 정보의 누락이나 기술의 한계가 만들어낸 3D 프린팅의 성긴 섬유 조직과 어긋난 경계를 모순적으로 드러내어 사라진 물질성을 가시화한다. 그리고 기술이 생산한 이 미완의 덩어리 위로 다른 재료를 손으로 덧붙이거나 갈아내는 등 반복된 노동과 조각적 행위를 더해 굳어 있는 물질에 운동성을 부여한다. 그렇게 완성된 정지현의 조각은 마치 오랜 시간 풍화나 침식 작용에 의해 마모되고 소멸된 듯한 미감을 주는데, 이는 원형으로부터 멀어진 사물이 점차 추상의 세계로 옮겨지고 있음을 감지하게 한다. 이러한 조각적 형질의 발현은 전시장에 함께 놓인 〈손꽃〉(2023), 〈소매손〉(2023), 〈멀리서 온 토르소〉(2022) 등에서도 유사하게 드러난다.
정지현은 같은 자리에서 동일한 풍경을 반복적으로 바라보거나 용도 폐기되는 도시의 무수한 산물을 발견할 때 그 대상이 다른 무언가가 될 수 있을지 상상한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시선으로 사물을 수집, 분류, 재조합하고, 사물의 고유함으로부터 벗어나는 물질적 전환을 꾀한다. 예컨대 전시장을 환히 비추는 〈더블데커〉(2018, 2022 재제작)는 길거리에서 발견한 7m 폐간판을 해체해 만든 조각이다. 이 작업은 무언가를 선전하기 위한 도구로서 간판의 기능과 역할을 상실한 대신, 전시장에서 스스로 빛을 발산하는 조각이자 조명으로 작동한다. 침출수 처리장에 버려진 각종 구조물과 자재로 제작한 조각 시리즈 〈시설〉(2022)은 군집을 이루는 설치 작업 〈공원〉(2022)이 되어 전시장의 구획을 설정하기도 하고, 기능을 한시적으로 전환해 다른 조각을 올려 두는 단상이 되기도 한다. 또한 이번 전시에서 정지현은 폐기 예정이었던 아트선재센터의 지난 전시 구조물들을 다시 전시장으로 불러와 자신의 조각들과 어떻게 관계 맺을 수 있을지 살피며 전시장 곳곳에 위치시킨다. 새로운 조건과 시간성 안에 재설정된 이 구조물들은 조각적 감각으로 변주된 모양과 형태로 전시장 내 모종의 영역을 조직한다. 기존 전시장에서 소비된 기물이 재활용되어 다른 모양으로 조각과 엮이는 가변성은 도시 환경에 부유하는 부산물과 버려진 폐기물을 가져와 고정되지 않은 낯선 형태로 유동하게 하는 작가의 만들기 방식과 나란히 한다.
《정지현: 행도그》는 실제 세계에서 추출한 사물의 형을 중심으로 여러 사건을 만들고, 우연성에 기대어 새로운 형질과 형태를 향해 끊임없이 움직여 만든 풍경이다. 존재하는 것을 허물거나 없던 것을 세우는 정지현의 작업은 실재와 허상 사이에 벌어진 감각의 틈과 경계 속에 표류하다 어느 순간 조각의 감각으로 연결되고, 실체화된다. 정지현은 “배열의 이동과 조합의 끝없는 변전의 끝에는 사물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생하는 서사의 한계가 드러나고, 잃어버린 퍼즐 조각처럼 이미지가 언어화되는 순간을 피해 끊임없이 유예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상실된 것, 불완전한 것, 분열된 것은 그의 조각의 과정을 통해 새로운 자리를 찾아간다.
■ 작가 소개
정지현(b.1986)
정지현은 도시 환경에 반응하며 그 속에서 부유하는 부산물과 폐기된 산업 자재 등을 재료로 삼아, 조각의 기능과 움직임에 관해 탐구하는 작업을 이어왔다. 계속해서 변화하는 도시 풍경을 지속적으로 관찰하며, 그 과정에서 서로 경계를 형성하는 요소들의 공존 부분을 추출한다. 버려진 것과 인정된 것, 관습적인 것과 제도적인 것, 미적인것과 정치적인 것들의 겹쳐진 상태를 해체, 재조합한다. 최근 개인전으로 《가우지》(인천아트플랫폼, 2022), 《다목적 헨리》(아뜰리에 에르메스, 2019) 등이 있다. 2023 김세중청년조각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