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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계는 중년 작가의 ‘소외’와 동시대적 ‘미술제도’를 고민해 보았는가.
- 중년 미술작가의 창작 : 동시대적 미술제도 비판과 보완 -
현대 미술계의 전시 환경은 급격히 변화하고 있다. 디지털 기술의 발전과 함께 미술의 표현 방식이 다양화되고, 새로운 미디어와 플랫폼이 등장하면서 젊은 작가들이 주목받는 반면, 중년 미술작가들은 소위 ‘진부한’ 미술로 취급되고 소외되어 그들의 작품이 대중에게 노출되기가 어려워졌다. 더욱이 동시대 예술기금 지원 제도는 작가 개인이 전시에 대한 기획, 홍보, 마케팅의 슈퍼바이저(supervisor)로서의 자세가 요구되고 있다. 원로와 신예 사이에서 그들 대부분은 한계를 체감하고 지원 선상에서도 소원해지며 열악한 작업 현실에 내몰려있다. 여기에 오랜 공백기를 가진 후 다시 창작의 길로 돌아오는 중년 작가들은 변화된 환경에서 다양한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전시에 선정된 작가 김경희, 차유림, 김신교는 격동기 80년대 학번이자 90년대를 관통하며 새로운 세기를 경험한 인물들로서, 이들은 미술계에서 자연스럽게 고립과 변화와 단절을 겪었다. 이에 서학동사진미술관에서는 지원의 사각지대에 놓인 중년 작가들과 젊은 기획자와의 협업을 통해 갤러리와 미술계가 제공해야 할 제도적 문제를 공론화하고 논의해 보고자 이번 전시를 기획하였다.
먼저 김경희 작가는 30여 년간 오궁리 미술촌의 작가로서 활동하며 11회의 개인전을 가졌다. 작가는 자신의 예술을 통해 인간 존재의 고통과 아름다움을 탐구하는데, 이는 빈센트 반 고흐에 대한 감동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기에 다양한 매체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판화 작품의 구조적 탄탄함과 움직이는 칼 선의 생명력에 매료되었고 자신의 작품에 오롯이 새겨 넣었다. 따라서 작가의 초기 작품들은 수없이 반복되는 붓질을 통해 제작되었으나, 점차 점토를 긁어내는 날카로운 칼끝으로 전환된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그녀의 독특한 예술적 표현을 보여주며, 점토의 물성(物性)에서 꽃과 같은 생명의 주제가 메마른 드라이플라워로 전이된다. 이는 ‘습하면서 건조한’ 이분법적인 양가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물질과 생명의 본질을 동시에 탐구하는 작가의 시선을 반영한다. 작가는 고통을 수반한 창작의 기쁨, 일상과 사유, 수행의 작가로서 고립감마저 순응하며 인내와 종교적 실천으로 작품을 형상화한다. 결국 김경희 작가의 예술적 과정은 고통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포용하는 깊은 철학적 사유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시대적 환경에 따라 동시대적 미술계의 흐름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작가는 차유림이었다. 작가는 85년 이래로 남부현대미술제, 겨울 대성리전, 전북현대작가회, 전북도립미술관 개관전, 지붕전, 화기애애전 등 여러 그룹전에 참여하며 지역을 대표하는 중심 작가로서 활동했다. 작가는 인간관계의 복잡성과 그 경계에서 발생하는 현대사회의 문제들을 은유적으로 표현해 해학과 연민, 인간애 등으로 심도 있게 탐구하고, 다양한 매체를 통해 이를 표현함으로써 관객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작품은 크게 4번의 변화를 거쳤는데, 97년 사비나 미술관에서 선보인 비구상의 무정형 작품은 점차 인간 형상으로 구체화되었고, 여성과 자아, 성정체성으로 발전했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감정의 섬세한 전달, 사회 비판적 시각, 그리고 표현의 자유로움을 통해 현대 예술의 중요한 흐름을 보여주었다. 그의 작업은 자유로우면서도 에너지가 넘친다. 이는 그녀의 작품이 고정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통해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자유로움은 작품의 생동감을 더하며, 관객에게 신선한 충격과 감동을 주었다.
반면 김신교 작가는 누구보다 보다 자기 고백적이면서 내면에 충실한 직관성과 순수한 형질(形質)의 표현적 붓질을 가진 작가이다. 학창 시절부터 주목받는 신인작가로서 두각을 나타냈고 1991년부터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특선과 입선 등 화려한 수상 경력을 가졌다. 초기 작품은 대담한 표현적 붓질 속에서 구상적인 요소가 강하며 어두운 청회색 빛의 인간적 고뇌를 탐구하였다면, 최근작의 경우는 선과 색채 자체의 표현적 요소에 집중하면서 강렬한 자연에 대한 감흥과 인상을 유희적으로 승화시켜 눈부신 색채 에너지의 장(場)으로서 변형시켰다. 다시 말해 이는 황금빛과 파스텔톤 색조의 장식성을 구현한 현대적 원시주의이다. 황금색은 작가에게 갈망과 욕망이 투사된 결정적 매체이다. 황금색은 작가가 가족을 잃는 개인적 아픔을 겪으며 10여 년간 공백기를 벗어나게 한 원동력이었다.
마지막으로 전시의 공동기획자 이일순은 이번 기획을 통해 이 시대를 버텨낸 전업 작가에 대한 조명과 후진과의 연대적 필요성을 담았다. 또한 공동 기획자 한준은 갤러리와 미술 기관들이 중년 작가들을 위한 맞춤형 지원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한다는데 방향성을 두었다. 전시는 작가들의 포트폴리오를 새롭게 정비하는 기회를 마련하고, 과거의 작품과 현재의 작품을 조화롭게 배치하여, 자신의 예술적 성장과 변화를 포착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또한 미술관의 체계적 시스템을 갖춘 전시회와 마찬가지로, 도슨트와 영상 인터뷰, 작가와의 대화 프로그램 등의 다양한 콘텐츠를 준비하여 그들의 작품을 대중에게 소개하고, 새로운 관객층을 확보할 것이다. 미술계는 다양한 세대의 작가들이 공존하고, 서로의 작품 세계를 공유하며 발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중년 작가들의 경험과 노하우는 미술계에 큰 자산이 될 것이다. 갤러리는 이들의 창작을 응원하고 새로운 전시환경에 노출될 수 있도록 도움으로서 예술의 다양성과 깊이를 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 김미선(전북대학교 초빙교수, 미술사 미술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