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서문
2024성남작가조명전5 서수영 《HERITAGE CODE》
박은경┃성남큐브미술관 큐레이터
서수영(b.1972-)은 ‘한국미’의 근원을 탐구하기 위해, 한국미술사를 직조하는 최고의 미감이 담긴 국보(國寶)를 작품의 주제로 삼아 현대미술의 조형 언어로 재해석하며 주목받는 중견 한국화가이다. 지난 30년간 한국화가로서 일관된 화업을 쌓아온 서수영은, 한국 전통회화의 견고한 방법론을 토대로 화폭 위에서 다양한 실험을 시도해 왔다.
최근 서수영은 조선시대 백자와 회화를 오마주(hommage)하는 작업을 통해, 한국미를 구성하는 미학적 원류에 대한 탐구를 이어가고 있다. 고고한 백색 미감 속 문인정신이 깃든 백자는 우리의 정신문화와 물질문화를 모두 담고 있는 한국미의 총체라고 평가받는다. 서수영의 작업은 단순한 상고주의(尙古主義)에 입각한 것이 아닌 예술을 통해 역사를 기억하고 동시대 우리의 모습을 투영하기 위한 과정이다.
우리의 국보를 작품의 주제로 삼는 서수영의 작업은, 단순한 완물상지(玩物喪志)의 차원이 아닌, 그 속에 담긴 문인의 감식안(鑑識眼)과 문인정신(文人精神)의 가치를 함께 계승하고자 함이다. 한국적 미학과 더불어 문인정신의 본질을 함께 이어갈 때 진정한 한국미의 구현이 가능할 것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서수영의 작품을 통해 문인의 시선과 미감은 동시대 미학적 변용을 거쳐 구체화 된다.
조선의 백자는 단순한 공예품이 아닌, 당대 최고의 과학 기술과 미감이 집약되어 탄생 된 시대적 산물이라는 중요한 상징성이 있다. 한국은 10세기 후반에 시작된 고려 백자의 전통을 바탕으로 중국의 기술을 수용하여, 15세기 조선 초기에 이미 경질백자(硬質白磁)를 생산하는 기술력을 갖추게 되었다. 유럽의 경우 1710년 독일 마이센(Meissen)에서 뵈트거(Johann Friedrich Böttger)가 백자 제작에 성공했다. 조선의 백자는 유럽 보다 약 200년이나 앞서갔던 당대 최고의 첨단 기술이었다.
조선의 백자를 조망하는 것은, 조선의 역사와 그 시대를 살았던 우리 선조들이 지향했던 가치와 이상향, 정신세계를 살펴보는 일이기도 하다. 조선 백자는 당대 최고의 과학 기술과 최상의 미감이 집약된 결정체이다. 서수영은 청화백자를 애호했던 문인정신과 감식안을 동시대에도 계승하고 이어가야 할 한국미로 평가하며 이를 한지 부조 위에 화려하게 그려냈다.
서수영의 작업은 근대기 타자화된 시각에서 정립된 ‘한국미의 준거틀’을 탈피하는 시도이기도 하다. 서수영의 작업 주제는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활동한 미술평론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가 주장한 한국미에 대한 해석을 정면으로 반대되는 시선에서 출발한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한국미를 ‘비애의 미’로 바라보며 동양적 민예론(民藝論)의 맥락에서 해석했지만, 이는 고도의 식민사관과 제국주의적 관점에서 설계된 한계를 지닌 이론이다. 해방 이후 고유섭, 최순우, 김원용 등 많은 미술사가와 미학자들이 민예론을 반박하며 한국적 미감이란 무엇인지 대한 나름의 정의를 내렸지만, 야나기의 민예론이 지닌 한계를 온전히 극복하지 못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 조선의 백자와 달항아리 등 우리의 전통 공예는 ‘소박함·고졸함·질박함'과 같은 추상적이고 감성적인 이미지로 묘사되었고, 한국미를 특정 짓는 레이어로 학습되어 현재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 속에 급격한 서구화 및 산업화 과정을 거치며, 우리의 전통 미감을 논하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부정되던 시기도 있었지만, 현재는 오히려 역설적으로 한국미의 본질을 탐구하는 치열한 활동들이 학계·예술계에서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고려 중기 역사학자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검소하지만 누추해 보이지 않았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았다.”를 언급하며, 한국미에 대한 최초의 정의를 내렸다. 서수영의 작업은 한국미에 대한 특질을 ‘격조 높은 화려함’에서 찾으며 시작되었는데, ‘화이불치(華而不侈)’의 미감과 일치한다.
고려불화에서 청화백자에 이르기까지 서수영은 한국미술사 속 ‘화이불치’의 미학을 포착하여 한지 부조 위로 과감히 끌어 올렸다. 문인화의 정신이 담긴 선묘에서 출발해 정교한 금니(金泥)와 금채, 석채 등 다양한 전통미술 재료의 물성을 더함으로써 동시대 속 통용되는 한국미의 특질을 6점의 신작 <헤리티지 코드> 시리즈로 구현했다. 지난 10년간 주로 겸재 정선(謙齋 鄭歚, 1676~1759)의 작품을 금박 회화로 오마주했던 서수영은, 이번 전시를 위해 단원 김홍도와 추사 김정희의 작품을 오마주한 작품을 최초로 선보인다. 단원과 추사의 원작에서 느껴지던 필묵의 힘은 정교하고 화려한 금박으로 새롭게 변주되었다.
서수영의 작품은 주제적인 측면 외에 양식적 측면에서도 한국미를 구성하는 전통적인 요소와 물성을 모두 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흔히 지(紙)·필(筆)·묵(墨)으로 상징되는 전통 문인화의 구성 요소를 바탕으로 하면서, 전통 석채(石彩)를 활용해 오방색을 현대적인 미감으로 채색하여 생동감을 더했다. 또한 백자 표면의 빙렬(氷裂)은 섬세한 금채로, 백자를 품고 있는 산수화의 묘사는 물성이 도드라지는 화려한 금박으로 정교하게 표현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동양화의 첫 단계인 ‘회사후소(繪事後素)’를 행하는 것처럼, 서수영의 작업은 바탕재인 한지를 직접 제작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전통 한지는 백자 특유의 미감을 부드럽게 담을 수 있는 최상의 재료이다. 또한 한지는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지식이 계승되고, 서화(書畫)의 출발점이 되었던 매체였던 중요한 상징성이 있다. 전통미술 속 다양한 물성을 조화롭게 응용한 서수영의 작업은 한국미란 특정한 시대의 산물이 아닌, 동시대에도 끊임없이 변주되어 계승되는 ‘현재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간 서수영에 작업에서 볼 수 없었던 순백자를 담은 작품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또한 중국식 화풍을 벗어나 조선만의 독자적 화풍을 이룩한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 1745-1806), 19세기 문인의 표상이자 동아시아의 지성으로 평가받는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의 작품이 한지 부조 위 금박 회화로 새롭게 오마주 된 것이 주목할 만하다.
전시 출품작 중, 특히 신작 <Heritage Code 5>의 모티브가 된 단원 김홍도 필 《삼공불환도》(보물 제2000호)와 <Heritage Code 6>의 모티브가 된 추사 김정희 필 《세한도(歲寒圖)》(국보 제180호), 조선전기 《백자 병(白磁甁)》(보물 제1054호)은 이번 전시를 기획한 큐레이터가 직접 작가에게 신작으로 제안한 미술사적 가치가 높은 국보 문화재이다.
《삼공불환도》는 현전하는 김홍도의 병풍 중 마지막 작품으로, 1801년 순조의 천연두 완치를 기념하여 제작된 계병(稧屛) 중 하나이며 총 8폭으로 구성된 작품이다. 《삼공불환도》는 중국 후한시대 학자 중장통(仲長統, 179-220)의 「낙지론」을 주제로 하여 그려진 중국적 주제를 다룬 그림이지만, 묘사된 인물과 산수, 건물 등의 표현은 단원의 화풍이 총망라된 한국적 그림이었다는 점에서 미술사적 가치가 크다. <Heritage Code 5>에 표현된 《삼공불환도》는 6폭과 7폭 사이에 묘사된 풍경의 일부이며 좌우가 반대되어 그려졌다.
18세기 한국미술의 명품으로 꼽히는 《백자철화포도문항아리》(국보 제107호)에 그려진 철화 그림은 한 폭의 수묵화를 연상케 한다. 임진왜란을 시작으로 두 차례의 호란 등 연이은 전쟁을 거치며 청화 안료를 구하기 어려워진 조선은 청화의 대체재로 철화를 사용했다. 코발트 특유의 고급스럽고 화려한 미감이 돋보이는 청화 안료에 비해, 비교적 수수한 철화의 사용은 단편적으로 볼 때 문화적 후퇴로 해석될지도 모르겠지만, 오히려 철화가 백자 위에서 자아내는 특유의 미감이 성리학의 이념을 고담(枯淡)하게 구현하여, 그동안 조선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미감을 탄생시켰다. 조선이 처했던 시대적·문화적 위기를 스스로 새로운 문화적 발전의 기회로 역변시킨 철화백자의 미감은 서수영이 발견한 능동적이고 다이나믹한 한국미의 원류 중 하나이다.
조선은 백자를 통해 국가적 통치 이념과 자기 수양의 표상으로 삼았다. 서수영의 신작 <Heritage Code 6> 에는 이와 같은 시대미감이 녹아들어 있다. 19세기 문인의 표상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의 <세한도(歲寒圖)>(국보 제180호)와 부드럽고 엄정한 군자다운 미감이 느껴지는 조선 전기 광주 관요 출토 <백자 병>(보물 제1054호)이 만났다. <Heritage Code 6>에 오마주 국보들은 약 300년의 시차가 있는 작품이지만, ‘군자(君子)’를 이상향으로 지향했던 시대의 공통된 미감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작업이 되었다.
<Heritage Code 6> 작품 중앙에 금박회화로 표현 된 《세한도》 또한 원작과 달리 좌우가 반대되어 그려졌다. 추사가 ‘절해고도(絶海孤島), 위리안치(圍籬安置)’를 견뎌내던 시기, 추사 특유의 고담한 갈필로 담담히 그려진 《세한도》는 서수영의 회화 속에서 화이불치의 미감으로 새롭게 오마주 되었다.
역사는 현재의 우리를 구성하는 시간의 누층이다. 서수영의 작업은 단순히 옛것의 권위와 상징을 예찬하고 모방하는 상고주의(尙古主義)를 표방하는 고답적 시각이 아닌, 한국미술사를 직조하는 고전미학과의 연계성 속에서 한국미의 특질과 동시대성을 찾는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이번 전시를 통해 현재 우리가 추구하는 한국미는 무엇인지 함께 고민하고, 동시대 지속 가능한 한국미에 대한 담론을 확장 시키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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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소개
서수영(b.1972~)은 서울 출생으로, 동덕여자대학교 예술대학 학부와 대학원에서 한국화 전공 및 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동덕여대 예술대학 회화과 겸임교수를 역임했다. 2024년 성남큐브미술관 개인전 외에 Galerie Visconti(프랑스), 한국미술관, 영은미술관을 비롯한 40여 회의 국·내외 개인전과 200여 회의 기획전에 초대되었다.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영은미술관, 한국미술관 등 여러 기관과 기업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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