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전시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전시상세정보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온실프로젝트_진정한 장소

  • 상세정보
  • 전시평론
  • 평점·리뷰
  • 관련행사
  • 전시뷰어




전시명: 온실프로젝트_진정한 장소
참여작가: 김규 자우녕 필승
전시기간: 2025. 4. 5 - 4. 20 <오프닝 4. 5  4-7 PM>
전시운영: 수 - 일 1 PM – 6 PM <월/화 휴관>
기획/글 : 김재원
장소 : 서울자브종 SEOULJAVJONS (종로구 비봉2길 23 1F)
웹사이트: www.seouljavjons.com / @seoul_javjons



커다란 산이 사라진 것을 뒤늦게 깨달은 후, 풍경의 사라진 기운을 찾기 위해 하루의 시간을 재차 어슬렁거린다. 슬쩍 방문한 바람의 숨결에 멈춰 서서 기억의 기운을 쭈뼛 중추신경에 꽂고 시선의 예민함으로 한 걸음씩 차츰차츰 멀리 내다보며 풍경을 찾는다. 역시 그 커다란 산은 사라지고 없다. 사라진 커다란 산의 흔적으로 푸르른 나무의 색도 없고 붉은 흙의 색도 없다. 그저 막혀 돌아가고 다시 막혀 돌아가야 하는 모두 같아버린 덩치 큰 건물과 길뿐이다. 잘려 갈려버린 나무들과 파헤쳐 실려 떠난 흙들의 행방이 묘연하다. 나무는 어느 곳의 겨울나기 땔감이 되었을 것이고, 흙은 낮은 높이를 메우는 평지용 덮개가 되었을 것이다. 커다란 산이 뚝딱 사라질 수 있다는 그 무기력함 뒤로 그 속에 있었을 온갖 생명체에 대해 생각할 겨를조차 없다. 분명 시간이 지나면 영영 희미해질 커다란 산의 기억을 떠올려 부여잡아 본다. 각기 다른 기억의 풍경이 모두에게 남아있겠지만, 그 풍경의 중심 요소였을 나무와 흙과 풀과 물과 불의 기억에 관한 야생의 풍경을 <진정한 장소> 예술적 ‘숲’으로 함께 각색한다. 

김규 작가는 나무의 겉면에서부터 깊은 속살까지 손으로 매만져 노동한다. 잘 다듬고 손질한다. 나무 기물을 만드는 행위에서 여러 나무의 생애 풍경도 더불어 가늠한다. 행방이 묘연하게 사라진 나무의 어떤 장소-풍경도 상상된다. 예술가의 신체와 접촉하는 노동의 지점으로 재차 교감한다. 분명한 나무의 본질적 교감-풍경이 펼쳐진다. 풍경에서 전해진 터-무늬가 절대적이다. 다듬고 손질하는 순간에 나무의 분명한 생애 지점들을 다양하게 알아채고, 나무가 살아온 이야기의 강도와 색, 무늬에 감동한다. 나무의 거친 피부와 대면하여 상상하는 조형적 속살을 예술로 매만지는 행위는 작가의 노동의 힘과 방식으로 새롭게 달라져 완성된다. 나무가 전해주는 생애 풍경의 계절 또한 전달된다. 바로 나무를 해부하여 다시 힘을 갖도록 하는 일이다. 단순히 쓰임을 갖게 하는 그릇이 아닌 생애 호흡이 멈춘 지점으로부터 다시 호흡하도록 숨을 불어 넣는 작업이다. 김규 작가에게 나무는 어쩌면 생애 동안 뿌리내리고 호흡하던 그 풍경에 기생해 심정을 전달받아 재 호흡하도록 하는 계절과 땅, 숲의 풍경을 재현하는 역할일 것이다. 나무의 색과 무늬의 그것이 더욱 잘 드러나는 진정한 장소의 풍경을 재현하는 일이다. 나무의 생애를 아름다운 목기로 각색하는 예술가적 매만짐의 그 절정이 다시 호흡을 얻어 진정한 장소-숲의 나무가 되며, 이웃한 흙과 물과 불의 이야기를 끌어들여 인간의 안녕을 바라는 토템이 된다. 켜켜이 쌓은 나무의 풍경이 모여 그렇게 풍경의 나무 기둥이 되도록 기물의 상상력을 품은 숲을 이루는 나무가 된다. 

자우녕 작가는 인간이 애초에 살기 위해 이동했듯, 예술에 삶이 투영되는 다양한 곳곳을 살아보고 걸어보기 위해 이주를 반복한다. 도착하여 살아보기 위한 이주이다. 작가의 떠남과 도착은 곳곳의 현장과 관계하기 위한 시절의 변화와 모험이다. 그리고 예술로 기생하여 예술적 공생의 증산작용을 일삼는 목적의 현장에 시간을 두고 매료된다. 모험의 시작은 한곳에 정착하기 싫은 싫증 혹은 장소에 대한 부정의 행위가 아닌 예술가인 자신에게 제안하는 스스로 살아보는 역할인 동시에 외부와 감각하는 최초의 관계자로 잉태되는 환경의 발걸음이다. 그것이 예술가 자우녕의 작업으로 지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발견한 진정한 장소의 이끌림은, 인간과 관계된 여러 경로의 깊은 진동의 서사들이 항상 포함되어 있다. 그것이 자우녕 작가를 불러내고 불러들이는 경로의 힘이다. 시간이 같으나 풍경이 다른 장소에서 살고 있는 사람의 속내들과 숨긴 이야기를 들춰내는 공생, 공진화 그것은 작가에게 매우 매혹적인 것이며, 그것을 작가 스스로 품기 위해 지독한 예술적 풍토병을 앓기도 한다. 풍경의 몰입으로 다시 걷는 행위에서 여러 형태의 삶의 변형과 순환된 변질의 순간을 깨닫는다. 그간의 떠남과 머물기의 장소에서 걷는다는 행위로 건진 여러 형태의 부산물들이 예술가의 심정과 손에 이끌려 마치 새로운 영혼을 담아내는 주술적인 언어로 만들어지고 야생의 자연스러움으로 머릿속 상상의 공진화된 각색의 숲을 본다. 

필승 작가의 노천 소성 기물의 표면을 본다. 아니 작가의 피부가 기억하는 환경을 가늠해 본다. 작가의 피부와 노천 소성 기물의 표면에서 상응되는 여러 요소들을 풍경으로 이끌어 낸다. 흙, 물, 불을 다루는 인간의 시간과 장소의 특정적 환경이 작업의 표면에 담긴다. 세상의 모든 종種은 경쟁을 경험한다. 필승 작가는 완전한 노천 소성 기물의 완성까지 흙과 물, 불과 강력한 경쟁을 일삼는다. 인간의 유목에서 정착의 증거로 나타난 토기의 시절부터 지금까지 좋은 흙을 찾고, 빚고, 빚기 위해 물을 섞는 방식이 동일하다. 사용법에 맞는 강도를 갖기 위해 수많은 노력과 경쟁을 했을 것이며, 불을 사용하기까지 여러 대안들을 주변의 환경으로부터 경쟁하며 찾아 떠돌았을 것이다. 흙과 물을 섞어 빚은 기물에서 물이 증발되는 동안 땔감의 나무를 찾았을 것이고, 불에 잘 타는 나무를 선별하기 위한 노하우는 자연의 현상들을 알게 했을 것이다. 나무 땔감에 기물을 넣어 불을 지피는 순간과 불의 절정이 기물의 표면에 흔적으로 남으며 강도는 높아졌을 것이다. 그렇게 주변 상황이 가늠되는 상상의 풍경이 기물의 표면에 모두 담기는 것이다. 불을 이기지 못한 기물의 파편은 다시 흙으로 돌아갈 것이고, 견고하게 불을 견딘 기물들은 불의 아름다운 흔적을 자랑하며 사용될 것이다. 그 표면에 기생하는 것을 풍경으로 상상한다. 진화가 아닌 세상에서 사라진 풍경-숲을 상상한다. 노천 소성 기물의 표면을 바라보는 것에서 우리는 풍경-숲의 요소들이 저절로 작동하여 하나의 숲으로 각색한다. 근래에는 노천 소성 기물에 식물을 심는 행위를 한다. 물의 흔적과 흙인 상태의 표면에 자생하는 이끼의 흔적을 관찰하는 작가의 관심이 강렬하다. 이 또한 진정한 장소 풍경-숲을 상상하는 일이라 하겠다.      

어느 동네 농부의 말이 새삼 떠오른다. ‘나는 자연 속에서 집을 짓고 연못을 파고 나무를 심고 농사를 짓고 살려고 고향의 마을에 왔어. 지천에 새와 나무와 꽃과 풀들이 가득하니 살맛이 나! 꽃과 풀이 가득한 곳에 나 조금 먹고 장날 내다 팔만큼만 농사를 짓고 사니 참 좋아! 그런데 몇 해 전부터 동네에 이상한 악취가 진동을 해서 동네를 돌아보니, 농사짓기 힘들고 땅을 놀릴 수 없어서 멀리 도시개발의 갈 곳 잃은 흙들이 실려오더라고..돈을 주고받고..’ 

커다란 산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푸른색의 나무와 붉은색의 흙은 어디로 갔을까? 우리는 곁에 있는 것에 의심을 가하지 않고 자연의 상태들이 계속 널은 벌판으로 펼쳐져 있을 거라 착각한다. 이미 사라졌고 또 곧 사라질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 진정한 장소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진정한 장소에 예술로 민감하게 반응하며, 여기 진정한 장소의 근원이 자연에서 출발한 그대로의 것을 만지고 느끼는 일이라 말하고 싶다. 단지, 상상하는 일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예술로 자연의 근원이 담기는 일련의 과정과 결과물을 연결하여 예술로 공생한다. 진정한 장소-숲으로 번역한다. 우리는 자연을 각색하는 예술가가 아닌 자연과 함께 순환하는 공존의 대상이길 꿈꾼다.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