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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순화 금속전

  • 전시기간

    2004-03-10 ~ 2004-03-16

  • 전시 장소

    인사아트센터

  • 문의처

    02-73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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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테마로 한 순환의 문제를 다룬 것으로 금속 조형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한 전시
세계는 변화하고 있고 우리도 마찬가지다. 세상이 넓어졌고 더 복잡해졌으며 변화의 속도 역시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현실이 그러하듯 미술 역시 그 새로움을 미덕으로, 저항과 부정을 강박으로 삼아왔으며 나아가 하나의 게임이 되었다. 역설적으로 예술가는 이제 실재 저 너머에 있는 의미를 찾는 이, 사물의 외관 이면에 있거나 물질계를 초월해있는 실재를 찾아내 그 심오하고 비이성적인 비밀을 계시하는 자, 또는 자신이 속한 시대를 해석할 의무가 주어진 자로서의 통찰력 등을 요구받기도 한다. 이 말은 거의 예외없이 예술가로 하여금 현행 규범과 제반 가치에 대한 비판의식을 지닐 것을 요청한다는 의미이다.

곽순화의 근작은 상당히 온건하고 보수적인 사유의 자락을 느리게 내비치는 동시에 신랄한 비판이 그림자처럼 자리한다. 그는 현재 우리 삶에서 시대적 요청처럼 강제되는 변화와 새로움에 슬쩍 방지 턱을 마련한다. 결론적으로 말해 변할 수 없는 것, 변해서는 안되는 것도 있다는 사실의 자각, 삶에서 요구되는 불변의 진리, 엄숙한 우주 자연의 법칙 같은 것들을 한 번 생각해보자는 식이다. 추려보자면 동시대의 인간과 삶, 세계에 대한 천박한 이해를 넘어서는 시선과 마음의 요구 같은 것들이 조명으로 다가와 번진다. 그것은 현실에 대한 작가의 나름의 대응이다.




실리콘으로 떠진 작은 두상 안에 무언가가 들어있다. 마치 빙하 속이나 호박 안에 자리한 것처럼 꽃이나 풀, 작은 나무가지와 뿌리의 신체와 부피, 그 실존의 실루엣이 은은하게 투영되는 장면은 무척이나 영상적이다. 안에서 빛이 스며 비쳐 나오는 장면으로 인해 더욱 그렇다. 식물들의 존재성, 생명력은 다소 사색적인 듯한 얼굴 안에서 함께 한다. 인간과 식물이 이렇게 공생하고 있고 무수한 인연으로 연루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납작하고 단호하게 잘린 머리의 윗면은 보는 이에게 나머지 부분을 상상으로 채우게 하는 그런 잉여의 공백으로 남겨진다. 그 안은 텅 빈 공간이라 꽃이나 여러 사물을 담을 수 있는 공간, 그릇의 역할도 한다. 두상 안에 숨겨진, 그러나 보는 이들에게 관음적으로 보여지는 식물은 순서상의 배열에 따라 자연의 순환을 보여주는 이미지로 다가온다. 자잘한 열매나 씨앗이 있는가 하면 가지와 뿌리, 활짝 핀 꽃들이 있는데 이는 열매를 맺고 꽃이 피고 결국 몸의 수분이 다 빠져나가 흙으로 돌아가는 엄정한 자연의 법칙에 대한 은유다. 그것은 자연계가 보여주는 엄숙한 법칙이고 불변하는 진리다. 사실 인간이란 존재는 그런 시간대 위에서 반복적인 삶을 살다 간다.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 있고 지켜야 할 것이 있고 변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런 순리에 순응하는 것이 우리네 삶이다.

실리콘과 브론즈로 이루어진 이 단순화된 두상은 황동, 알루미늄 등으로 형성된 좌대, 받침과 연결되어 있다. 뿌리처럼 다소 복잡하게 구획된 선들로 이루어진 좌대는 사색의 혼란스러움과 복잡한 마음의 심난하고 난해한 굴절과 주름을 연상시킨다. 두 개의 다른 단어가 만나 조합된 새로운 문장을 엮어 나가는 체험 역시 감촉된다. 그런가하면 그것은 실내의 어느 한쪽을 차지하고 빛으로 그 공간을 적시고 안온하게 침잠 시켜 주는 스탠드, 조명기구로 기능한다. 여전히 금속공예, 금속조형이 실용성을 주된 축으로 삼으면서 은연중 내용과 맞물려있다.




또 다른 작업은 단순한 원통으로 이루어졌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원통의 표면에는 작은 점들, 구멍이 투각되어있다. 그 모습은 흡사 별자리들 같다. 원통 안에 자리한 조명의 빛이 밖으로 번져 나오면서 이내 그 점들은 은하계의 별자리들로 돌변한다. 원통은 모터에 의해 조금씩 소리를 내며 회전한다. 천천히 돌아가는 원형의 기둥은 어두운 공간 안으로, 주변으로 흩어지는 별무리를 환영적으로 보여준다. 별들의 운행이 낭만적으로 다시 환기되는 이 작업은 보는 이의 기억을 자극하고 주어진 공간을 상상적 공간, 자연공간으로 대체시킨다. 망점에서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빛들은 흔적 없는 이미지를 주변 공간에 산란시킨다. 보는 이의 몸과 바닥, 벽면과 천장으로 물처럼 흐르고 바람처럼 돈다. 그러한 순간 공간은 기이한 체험을 자극한다. 이렇듯 근작은 대부분 기계와 빛의 접목에 따라 금속공예가 설치적이고 뮤지올로지적으로 확산되어 가는 추이를 보여준다.

그런가하면 반원형의 구가 짧은 좌대를 받침으로 자리한 것도 있는데 그 반구의 표면에도 역시 세계 전도와 별자리가 각각 투각 되어 있다. 그것은 금속의 표면에 그려진 회화다. 이번 근작에서는 그 같은 회화적 욕망이 두텁게 감촉된다.




그리스를 중심으로 한 지도가 그려졌는가 하면 다른 하나는 극동을 중심으로 한 지도가 있다. 동양과 서양을 대변하는 상징인 셈이다. 그 표면에는 수지로 제작된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의 조각상과 불상이 부착되어 있다. 각기 동양문화와 서양문화의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는 이미지이자 오브제로서 구실을 한다. 이 반구들은 바닥에 놓여져 있어 보는 이들은 시선을 지표에 일치시켜 내려다본다. 역시 안쪽에서 조명이 들어오고 그것들은 움직이면서 서서히 색상이 바뀌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시간의 이동과 변화를 부여주기 위한 장치라면 그 위에 덧붙여진 그리스 신상과 불상은 변함없는 가치, 불변하는 진리를 상반되게 보여주는 장치다.

하늘과 별, 우주를 꿈꿔보다가 문득 작가는 자신의 삶의 주변에서 우연히 나무 하나를 발견했다. 그리곤 그 나무를 일정한 시간 동안 관찰하고 시간과 계절의 변화에 따라 생장하고 변화하는 모습을 영상에 담았다. 메마른 나무에 무성한 녹음이 깃들고 이내 단풍이 들면서 서서히 낙엽들이 떨어지고 다시 마른 나뭇가지로 변한 나무의 순환, 생장의 주기를 기록한 작업은 원통의 피부 위에 사계절 나무의 모습을 새긴 것으로 나왔다. 동판에 부식시켜 이미지를 그리고 더러는 채색을 깃들여 그림으로 만든 표면은 부드럽고 아름다운 그림으로 다가온다. 조명의 변화와 자잘한 점선들을 통해 번져 나오는 빛에 의해 그 나무는 다소 신비스럽고 명상적으로 스민다.








여기서 빛은 모종의 진리를 가시화 시키는 장치다. 빛은 모든 존재를 비로소 밝혀주는 것이자 다양하게 드러내는 도구로 쓰이며 희망의 상징이기도 하다.

빛에 의해 표면에 드러나는 나무란 존재는 무엇일까? 겉모습과 현상은 시간에 순응하지만 나무는 사계절 모두가 나무의 모습이자 그 어떤 것도 나무가 아니다. 어느 특정한 시간대에 멈춘 나무가 나무의 본질이 아니라는 얘기다 어쩌면 나무의 본질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저 나무는 끝없이 변화하고 생장하고 순환한다. 그 모습이 그대로 나무다. 그러나 우리들은 대개가 어느 순간에 본 나무만을 나무라고 생각한다. 모든 것은 변화하지만 본성은 하나다. 나무는 흙이고 물이고 사람의 몸이다.

그것은 일종의 근원적 세계관으로 나간다. 근원적 세계관이란 인간과 자연의 일체를 꿈꾸는 전체론적 사고를 의미한다. 우주생태계를 장엄한 생명의 장, 커다란 조화와 공생의 장으로 파악하는 이런 인식은 다분히 동양적 사유에 다름 아니다. 동양의 전통적인 우주관은 ‘존재의 사슬’이다. 전체적으로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존재가 유기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는 그물로 짜여져 있다는 것이다. 작가는 수시로 변화하면서도 불변하는 나무를 보면서 생명체를 깨닫는다. 무엇이든 정의하여 한정시키면 그것은 이미 생명체가 아니다. 정체하는 것은 곧 생명을 잃는 것이다. 생생한 생명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자리, 보고 듣고 말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가능하다.

그렇다면 작가라는 존재는 이미지를 이미지로 느끼는, 무와 죽음, 공을 아는 자이다. 내 삶과 자연의 삶이 육체적 대화를 통해 죽음과 죽음의 과정 속에 있음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자연이 끊임없이 연기(緣起)하는 그 움직임에 동참하면서 자연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만물의 유기성 안에 살고 우주의 미로 안에 살아있는 유기적 인간의 본래적 모습을 반영하는 것이 다름아닌 작가라는 존재이며 미술은 바로 그러한 변형의 역할 속에 있음을 그녀는 나즈막히 속삭인다.

박영택 | 미술평론, 경기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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