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래경
李大源 화백의 그림들은 환희에 찬 生命의 힘을 유화 붓 끝에서 잉태하게 하고 자연보다 즐거운 조형의 자연을 사람들로 하여금 만끽하게 한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듣는 즐거움은 이 세상을 사는 人間에게 가장 큰 위안이 되는 것처럼 그러한 아름답고 즐거운 세계의 그림을 만들어 보여준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그 얼마나 큰 보시가 되겠는가.
서울 혜화동 자택에서 70년간을 살아 오면서 이대원은 지속적으로 지켜온 자기약속의 생활 원칙을 견지하여 왔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소시적부터 보아 온 坡州 농원에 주말마다 가서 그림 그리는 일이었다. “계절에 따라 자라는 나뭇가지나 싹들은 새로움이 틀림없다.” 사시사철, 해마다 농원에 있는 과수나무는 늘 새로운 생명으로 가득 차있고 한시도 쉬지 않고 생명을 이으려는 식물세계 경영 의지에서 경이로움에 찬 감동과 더불어 그의 자연에 대한 인식의 폭도 잡혀만 가게된다. 그 길은 말하자면 변화하는 현상에서 변하지 않는 본질의 의미를 읽어내는 도정의 기도하였다. 그러한 사실은 그의 그림에서 그대로 투사되어 점, 선, 색채와 같은 조형요소에 대한 탐구와 더불어 화면상에 굳건히 자리잡게 되는 나무의 근간(根幹)을 중심으로 한 구성의 문제와 자연히 연결되게 한다. 그가 끊임없이 그리는 나무 그림의 변주에서 이러한 확신을 확실히 더듬어 볼 수가 있다. 그림은 다름아닌 눈에 보이는 세계를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자연경영의 의지력을 나무에서 읽어 내었다고나 할까, 그가 계속 나무가 있는 가까운 자연의 그림을 그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그렇게 본다면 이대원의 그림세계는 변화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기본 인식을 기저로 하여 현상적으로 가장 잘 포착할 수 있는 자연을 탐구함으로써 시각의 조형적 형성을 가능하게 하는 시각을 찾아내는 과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작가의 초기그림에 유달리 눈에 띄는 모티브가 있다면 그 하나가 멋대로 뻗어나는 나뭇가지가 있는 정물화에서 일 것이다. 그러한 성향은 나중에 한그루 한그루의 나무그림에서 더욱 뚜렷하게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후에 그가 “엽기적”이라고 말한 기이한 형태를 즐겨 쫓아서 그리는 일과 일맥상통 한다. 이러한 그림의 경향과 견주어볼 수 있는 또 한가지 자연 모티브가 수직적인 특성을 굳이 강조하는 산이나 돌바위, 나무 같은 60년대의 그림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경향은 앞서 말한 큰 가지에서 일탈된 나뭇가지 그림 못지않게 강렬한 표현력으로 구사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작가의 그림이 단순히 눈에 보이는 시각적 진실세계로서 자연을 모사한다거나 모방하는 차원에 만족하지 않는다는 점을 알게 된다. 즉 변화하는 현상적인 차원은 근간을 굳히고 있는 변하지 않는 원리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데서 오는, 차원이 다른 인식에 근거한다. 그의 그림이 극적인 일탈의 형태를 띄고 있으면서도 궁극에 가서는 뿌리와 줄거리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보다 높은 차원의 안정을 되찾는 변치 않는 자연의 원리를 터득 하는 일에 연결되어 있다. 이 과정은 점 또는 선에 의해 색채가 정리되면서 그의 수없는 모색과정을 통해 전개 발전되는 70년대중반 이후의 그림에서 확인된다.
그의 그림에 새로운 활기가 솟아 오른 것은 80년대 중반 부터이다. 그림은 더욱 간결해지고 사용되는 색채는 더욱 강력하며 붓터치는 더욱 확실해지는 대작들에서 그 진가가 드러나게 된다. 그것의 절정은 “엽기적”인 형태체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작 <농원>(1992)에서 도달했다고 할 수 있다.
자연에 비추이는 물적인 색채감이 대상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은 이미 추상으로 넘어가는 회화역사 도정에서 확인된 바와 같다. 그러나 그러한 자율적인 색채가 화면을 지배하는 독자적인 율동으로 전개된다는 사실은 가령 칸딘스키의 “색채울림”과 같은 새로운 개념의 등장으로 가능하다. 이에 비견할만한 이론이 이대원의 畵面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우리나라 전통미술 특히 빛나도록 화사한 색채를 가진 자수의 색채감에서 독특한 색채질서, 나아가서 색채간의 울림과 조화를 읽어낼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이대원은 자연이 가지고 있는 생명의 기본질서를 찾는 일에다가 조형에서 가능한 조형질서를 결합시킴으로써 자연에 병행하는 조형의 표출의지를 강하게 들어낼 수가 있게 된 것이다. 그러한 화가로서의 표현욕구는 제작을 거듭할수록 점점 더 그 열의는 더하게 되어 꾸준히 자기 그림세게에 몰입할 수 있었던 그간의 사정을 뒷받침해 준다.
이와 같이 이대원의 그림은 자연에 근거한 조형의 법칙성을 찾아내는 데서 독자적인 양식확립이 가능하였던 것이며 다른 화가와의 차별성을 여기에서 구할 수가 있는 것이다. 옛것을 가지고 새것에 도달한다는 그가 즐겨 익히는 온고이지신(溫古而知新)의 가르침은 여기서도 자연에 근거한 조형의 법칙성을 찾아낸 전통회화의 맥을 이해하고 계승하는 일의 의미에 방향을 제공해 준 셈이 된다.
이와 같이 뿌리와 흙, 물과 햇빛이 있는 가까운 자연에서 그가 확인하고 체험하게 되는 것은 바로 다름아닌 이 생명을 키워나가는 자연의 힘이며, 그 자연이 잡아주는 질서잡이에 대한 작가의 감동과 인식이다. 이대원이 自然을 그리는 일을 그만두지 못하는 것도 바로 이때문인 것이다. 말하자면 변화하는 자연 속에 변하지 않는 진리의 터득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자연 그리기를 그만두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생명에 가득한 자연이 영위하는 기본 경영원리에 이 작가는 매료되어 있다는 뜻이 된다. 그것은 다시 말하자면 변화하는 자연의 생기에서 만나는 즐거움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질서잡기라는, 자연이 영위하는 변하지 않는 기본원리를 재차 확인하는 두 가지의 큰 즐거움이 그림을 그리는 이 작가의 마음속에 가득 차 있다는 말이다.
복사꽃이 활짝피어 온 세상이 도원(桃園)과 같은 낙원이 되어버리는 것처럼, 하이얀 배꽃이 온 천지를 뒤덮고 그 위에 달빛까지 더하여 그 흰빛을 더해준다면, 이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옛 시인도 노래할만한 감흥이 될 것이다. 李畵伯의 그림에 눈발 같은 흰 점이 화면을 덮고 있는 그림이 있다. 물론 제목하여 <설경>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농원>에도 눈발 같은 흰 점이 온 화면을 덮고 있다. 이 설경 아닌 설경 같은 그림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아닌 배꽃이 만발하게 피고 낙하하는 모습 바로 그것이 아니겠는가.
이대원의 그림은 온화하고 즐겁고 또 해학적이다. 그러한 특성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은 굳건한 근간의 질서잡이가 있고 그 위에서 마음껏 일탈의 자유를 즐길 수 있는 이대원화백의 자연을 보는 관점과 그것의 조형적 표현의지에서 비로소 가능한 일인 것이다. 잃어버린 고향을 기억에서 되살리고 있는 현대인의 마음에 즐거움과 해학으로 와닿고 소통과 공감의 장이 되고 있는 것도 이화백그림의 그러한 특성이 하나의 원천이 된다고나 할까.
이대원화백의 화력 70년은 惠化洞에 거주해 온 70년 생활에 해당 되기도 한다. 그 시일은 파주 농원 과수원에 하이얀 배꽃이 피던 70년이기도 하다. 하이얀 배꽃이 마치 설경처럼 세상을 뒤덮는 이 5월에 그의 70년 그림세계를 기념하는 이번 기념 전시회 개최는 그만큼 의의가 더 할 것이다. 즐겁고 화목한 가정을 함께 꽃피워온 원만한 성품이 여기서 그 의미를 더해줄 것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