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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관전

  • 전시기간

    2005-11-02 ~ 2005-11-08

  • 전시 장소

    인사아트센터

  • 문의처

    02-73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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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바라보는 그림

박 정 구 | 미술사


여러 날 전부터, 그러니까 열대야와 집중호우가 여전히 엇갈리던 늦여름부터 해가 지면 어느새 방울벌레가 울기 시작했다. 마실 물 끓이는 것조차 포기할 정도로 바닥을 드러내고 있던 인내심에 그 소리야말로 천군만마 원군의 나팔소리였다. ‘조금만 더 참으면 뜨겁고 찐득한 골목에서 웅웅대는 에어컨 실외기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겠고… 남의 눈 돌볼 여유도 없이 열어젖힌 창문으로 식은 바람이 들어오면 눕는 자리만큼은 가리게 좀 닫을 수 있을 것이다…’ 몇 일후 그 반가운 소리를 뜻밖의 곳에서 또 만났다. 그 소리는 집 앞 가게 채소와 식품을 진열한 냉장고에서 들리고 있었다. 제철을 만났다고 여긴 그 녀석은 냉장고 어느 구석 침침한 곳에서 낮부터 내내 짝을 찾고 있던 것이다.

가을벌레 소리는 더위에 지칠 대로 지친 심사에 더없는 위안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존재를 확인하게 하는 것은 울음소리일 뿐, 녀석들의 실체를 눈으로도 같이 확인했던 것은 이젠 오래 전의 일이다. 밟히는 풀잎 이리저리로 그것들이 튀어 오르는 길을 걸어 본지도 오래일 뿐더러, 일찌감치 저녁 먹고 담배라도 피우면서 들여다보는 화단 구석에서 그것들의 모습을 발견하던 것도 이제는 그다지 일상적이거나 흔한 경험만은 아닌 환경 속에서 살게 되어 버렸다.
준공검사를 받기 위해 회초리 같은 나무 몇 그루 박아 놓은 다세대 주택 자투리땅이나, 아파트 화단에서 들리는 벌레소리나 듣고 자란 아이들에게도 그들은 가을을 가장 먼저 알려주는 ‘전령사’일까…. 봄이 오면 배추나비, 여름엔 매미 여치, 가을이 되면 귀뚜라미와 고추잠자리는 도시에서만 살아온 내게도 찾아들어 바뀌는 계절을 확인시켜주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아파트에 날아든 잠자리가 삶의 결실을 반짝거리는 자동차 지붕 위에 참극으로 맺는 것은 일상적인 풍경이 되었고, 매미들이 공사장 보다 심한 소음원으로 원성을 산다고, 주택가 벌집제거가 119구급대에게 가장 빈번한 출동원인의 하나가 되어버렸다고 하는 뉴스를 보며 산다. 살 곳을 빼앗겼으니 어디서든 살아남으려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고, 살 곳을 공유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들은 친근한 이웃일 수만은 없게 되어 버렸다.





그러고 나서 또 몇 일이 지난 후에 작가 김진관의 작업실에서 그들의 모습을 다시 보게 되었다. 길섶에 자란 들풀과 거기에 깃들어 사는 곤충들은 작가의 오랜 소재이다. 그에게 그 시간은 다들 하찮게 여기는 것들로부터 생명과 삶의 존귀함을 발견하는 노정이었고, 또한 인간의 오만과 편견을 들추고 분수를 돌보게 하는 일이 되어왔다.

몇 해 만에 다시 본 그림 속 곤충들은 이전처럼 거대하게 확대되어 공간에 떠있는 듯한 낯익은 모습만은 아니었다. 대개는 주의 깊게 살피지 않으면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원래 그들 크기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단색조에 호분을 더해 그린 이전 그림에서는 자연 속에 살아가는 그들의 생명력보다는 마르고 퇴색한 실험실의 표본이나 거미의 허물처럼 삶의 허무와 덧없음이 더 짙게 담겨 있는 듯이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여름 무렵 나무 등걸에 달라붙은 매미의 허물은 한때나마 생의 절정을 잉태했었다는 보람보다는, 그 화려한 우화의 기억조차도 함께 각질화시켜 버석거리는 쓸쓸한 잔해로 다가온다. 그처럼 작가의 그림 속 생명들도 인간에 의해 살 곳을 잃어버린 존재들이며, 또한 그들에 비해 결코 나을 것 없는 처지를 외면하고 눈앞의 삶에 급급한 인간에게도 고스란히 돌아올 종말을 눈앞에 들이대어서라도 정신을 차리게 하고 싶은 작가의 심사 같아 보였다. 들풀 역시도 왕성한 생장과 생산의 분수령을 지나 탈색과 고사의 계절 앞에 선 듯했다. 그래서 나에게 그의 그림은 사소한 뭇 생명들의 약동하는 생명력을 기림으로써 삶의 의미를 확인시키기 보다는, 주목받지 못하는 삶들의 애잔한 스러짐을 통해 생명의 의미와 가치를 환기시키는, 희극보다는 비극이 주는 삶에 대한 또 다른 긍정으로 다가왔다.

그러한 생각 많은 부분은 그의 작업방법에서 왔던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흔히 하는 식으로 말한다면 그는 채색화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화려한 진채의 시절이 있었으며, 현재 그림도 미리 바탕을 준비하기도 하고, 여러 차례에 걸쳐 색을 입히거나 가라앉히는 채색화 기법을 기반으로 한다. 한데 그의 그림에는 거의 언제나 채색화에서 보는 밝거나 화려한 색조는 없다. 대신 갈색이나 청색, 녹색의 단색조에 여러 번 겹쳐 올려 만들어진 화면이 언뜻 잘 띄지는 않아도 아주 깊은 두께로 멀리 공간을 만든다. 곤충과 풀잎들은 그 공간 이곳저곳에 자리하며, 그런 공간 속에서 허물처럼 유영하듯 부유하듯 원령처럼 드러나 있다. 그것은 그의 그림에서 적극적인 드러냄보다 소극적인 드러냄이 보다 강렬한, 역설의 효과와 의미를 느끼게 하는 이유가 되었다.








이번에 본 그림에서는 작가의 생명체들이 그늘 속에서만 절제되어 적당한 빛을 드러냄으로써 자신을 확인시키는 방법만을 고집하려고 하지 않는다. 대개는 화면에 맞추어 자연의 크기를 그대로 지닌다. 뿐만 아니라 심연으로 닿아 있을 듯한 화면 저편의 어두운 공간에서 나와 우리 눈이 감당할 만한 깊이의 공간으로 돌아와 있다. 그래서 화면은 우리에게 익숙한 들판 한구석 어느 장면이 되고, 현실적인 생명감이 보다 강화된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인 것이다.
확대된 이미지를 가진 그림에서는, 그 이미지가 사실적이지만 자체로 비현실적임으로 해서 보는 사람에게나 그림 스스로에게나 추상적인 효과를 낳았다. 그리하여 작가가 정확한 관찰과 묘사를 바탕으로 삼는 채색화의 규율을 유지하는 가운데 관념적이고 사색적인 그림을 그리는 성공적인 방식의 중요한 얼개가 되어주었다.

반면에 근자의 그림들은 그와는 또 다른 방식을 취하는 흐름이 점차 뚜렷하다. 관점을 보다 구체적이고 작은 대상에 두어 현실적으로 묘사한다. 한편으로, 화면 모두를 채우는 채색화 방식보다는 여백을 둠으로써 그것이 ‘묘사된 바’와 서로 더 의미 있게 하는 관계가 강화되는 수묵화 방식을 강화하고 있다. 이미 오래 전부터 해온 것이지만 구사에 더더욱 구속감을 털어낸 자유로움을 느낀다.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오랫동안 초충을 그려오면서 전통 초충도를 늘상 염두에 두어온 작가지만, 형식적인 면만큼은 오히려 요즘 그림이 일면 그런 초충도를 닮아가고 있는 듯하다. 작가의 말처럼 채색화가 반드시 꼼꼼하게 윤곽을 다듬어 색을 메워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바탕작업 없이 먹이 되었든 물감이 되었든, 혹은 호분이 되었든 필요에 따라 필요한 곳에 입히고 눌러가면서 되었다싶을 때 손을 떼면 되는 것이 아닐까…. 공교하고 세밀한, 또는 화려하고 선명한 특성만이 채색화의 미덕은 아닐 터이고, 대상에 접근하는 작가의 태도에 따라서 얼마든지 자재로울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전통적인 채색화 기법을 정통으로 따르기로 작심한 그림이 아니라면.



근래 들어 더욱 강화된 이러한 면모는, 벌레와 풀이 화면을 압도하는 이미지로서보다는 화면을 구성하는 여러 개 요소 중에 하나로서 보다 많은 기능을 하게 한다. 이것은 대상에 보다 많은 자율성이 부여되고, 그 자율성은 결국 그들 하나하나가 똑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서로 다른 생명체들의 군집임을 보는 이로 하여금 인식하게 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래서 풀잎을 밟고 지날 때 사각이며 쓰러지는 줄기들 사이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들풀이 들어오거나 때맞춰 사방으로 튀고 날아오르는 풀벌레 무리를 직접 눈으로 볼 때와 같은 생동감이 보다 뚜렷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에서 우리가 단박에 느끼는 것은 생명의 적극적인 면모라고 하고 싶다. 그래서 작가의 작업은 진양조의 울적함에서 어느 틈에 중모리나 중중모리의 보다 경쾌한 활기로 옮겨간 듯하다. 움트는 생명의 순간을 간략히 포착한 소품들은 수묵화를 보듯 경쾌하고 담백하며, 바로 그 대상에만 집중됨으로써 간결하다. 이는 이전의 작품에서 보는 그것과는 또 다른 추상성과 정신성의 근원이다. 정제된 형과 색이 만들어내는 조형적인 측면이 그 하나이고, 한 순간 포착되어 정지한 생물과 그 배경들의 대비와 조화가 이루는 효과가 다른 하나이다. 배경은 작가의 예의 그 깊은 공간이거나, 그냥 여백이거나, 혹은 색면으로 이루어지는데, 그 그림들은 선종화를 보듯 명상적이다. 생명을 주제삼아 보는 이에 따라 제각기 화두 하나를 던져 자문자답 할법하다.


그 귀결의 하나로 뚜렷해진 장식성을 들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앞서 말한 간결하고 담백한 화면구성에서 오는 것이라고 본다. 무채나 낮은 채도를 바탕으로 부각된 연녹색 싹이라든가 세밀하다기보다는 이제는 섬세하고 친근하다고 하는 것이 보다 합당할 작은 생명들은 일면 옛 선비들의 초충도를 관련짓고 싶도록 하지만, 화첩에 자연을 희롱한 것에 비하기에는 작가가 내내 담아온 주제가 무겁고, 옛 그림의 절묘한 필치를 완상하는 즐거움에 대하기에는 그 생명들의 현실이 절절하다.

어쩌면 크지 않다면 크지 않을 수도 있을 변모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도래한 그림의 현재는 작가가 애초에 그림을 그리고자 하면서 지자했던 짐의 무게를 이제는 무게만으로 여기지는 않을 삶의 연륜과 함께하는 것이라는 데에 생각을 미치게 했다. 그 연륜 속에 작가는 자연과 생명을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 생명관을 관류하는 정신으로 담아왔으며, 그래서 그 속에서 한국화 전통의 정신과 형식 양자에 뚜렷한 한 현재형을 확인하는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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