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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애 : TRANS VUIT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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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비통의 힘 혹은 사진의 힘



김진영 | 예술비평


고 영애의 사진들은, 일별할 때, 특별하지 않다. 평범하다. 이 평범함은 무엇보다 고 영애의 사진을 구성하는 두 가지 친숙성의 코드 때문이다. 고 영애의 사진들은 세계적인 명품 기업 루이비통을 오브제로 삼는다. 세계 유행의 본산지인 파리와 뉴욕은 물론 동경과 방콕 그리고 서울에 이르기까지 사진 프레임 안에는 전통과 현대성, 세련미와 귀족성의 아우라를 지닌 루이비통 토털 패션의 백화점 혹은 매장의 모습들이 들어 있다. 반드시 명품 패션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루이비통이라는 브랜드가 소비경제화 된 일상 안에서 보편적 아이콘이라는 점에서 그 사진 오브제는 보는 이에게 친숙함의 코드로 다가온다. 오브제와 더불어 고 영애의 사진이 제공하는 또 하나의 친숙성의 코드는 그 오브제를 이미지로 드러내는 표현 방식에서 온다. 세계 곳곳의 도시 풍경을 배경으로 포착되는 루이비통 매장들은 그 외양이 다양해도 그것들을 이미지로 바꾸는 사진적 표현방식 (정면 촬영법과 브랜드 로고에의 집중)은 평범한데 이 평범함은 사진을 보는 이들에게 분류의 자유를 허락한다. 우리는 저마다의 시각적 기호에 따라서 고 영애의 사진들을 자의적으로 특별한 사진의 한 장르에 소속 시킬 수가 있다. 예컨대 그녀의 이미지들은 대도시 풍경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풍경 사진이기도 하고 루이비통 특유의 건축물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건축 사진이기도 하다. 또한 사진 이미지들이 심미적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파인 아트이며 루이비통의 브랜드 로고를 집중적으로 조망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업 광고 사진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브제와 표현 방식의 평범함을 통해서 보는 이에게 낯설음 없이 다가서는 고 영애의 사진들이 정말 평범하기만 한 것일까? 아니면 역설적으로 그 특별하지 않음이 어떤 특별함을 지니는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그 특별하지 않음의 특별함은 고 영애의 사진들 속에서 어떤 메시지를 읽게 만드는 것일까? 고 영애의 사진을 이해하는 일은 이 평범함의 코드들 속에 들어 있는 평범하지 않음의 메시지를 독해하는 일일 것이다.



내가 보기에 고 영애의 사진들은 세 개의 메시지 층위로 구분되어 읽힐 수 있다. 우선 '시각적 층위'가 있다. 세계 곳곳의 루이비통 매장들을 촬영하는 고 영애의 사진들 속에는 일관된 이미지의 중심이 있다. 그건 루이비통의 브랜드 로고이다. 그것이 낮에 찍은 사진이든 밤에 찍은 사진이든 또는 정면 이미지이든 측면 이미지이든 고 영애의 카메라는 보는 이의 시선을 루이비통의 브랜드 로고로 정착 시킨다. 그리고 그렇게 의도적인 카메라의 시점화를 통해서 브랜드 로고로 유도된 보는 이의 시선 앞에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건 이 세계적인 명품 패션 기업의 신화적 얼굴이다. 19세기에 태어나 다섯 세대를 거치며 변함없이 세계 명품 소비시장을 지켜 온 150여 년의 역사, 루이비통의 이니셜 L과 V를 조형하고 꽃과 별을 아르누보적으로 디자인 하여 이후 명품 브랜드의 대명사가 된 모노그램 캔버스, 그 독특한 문양을 다양하게 변주하여 귀족적 토털 패션의 시스템을 구축한 각종 패션 라인들 등등...... 브랜드 로고를 사진의 중심으로 설정한 고 영애의 사진은 보는 이로 하여금 국제적인 명품 기업 루이비통을 둘러싸고 있는 신화성의 아우라를 시각적으로 경험하게 만든다.



다음으로 전달되는 메시지의 층위는 '인식적 층위'이다. 시각적 메시지 층위가 루이비통의 브랜드 로고에서 비롯한다면 인식적 메시지의 층위는 촬영 장소를 명시하고 있는 사진들의 타이틀과 프레임 안을 채우고 있는 루이비통 매장들의 건축 양식 사이에서 발견되는 모순성에 근거를 둔다. 사진들의 타이틀은 촬영된 루이비통 매장들이 서로 다른 문화적 정체성을 지닌 도시들 안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하지만 사진 프레임 안의 매장 이미지들은 그러한 문화적 특수성과는 무관하게 자기만의 건축 양식을 고집하면서 고유한 도시 문화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루이비통의 얼굴을 보여준다. 그러한 장소와 건축 양식 사이의 모순성을 통해서 우리가 우선 인식하게 되는 건 글로벌 자본주의의 이름 아래 수행되는 파괴적 문화 트랜스 현상, 더 정확히 말해서 개개 문화의 고유성을 인정하지 않는 다국적 혹은 무국적 기업의 시장주의적 제국주의 성이다. 하지만 제국주의적 명품 기업 루이비통의 얼굴과 더불어 우리가 만나게 되는 또 하나의 얼굴은 모르는 사이에 그 얼굴의 거울상으로 변해가는 우리들 스스로의 욕망의 얼굴이다. 비록 루이비통의 귀족적 명품 취향과는 거리가 있다고 해도 글로벌 자본주의와 다국적 시장주의에 의해서 무력하게 식민지화 되어가는 문화적 무국적 성으로부터 과연 누가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인가?



마지막으로 고 영애의 사진들로부터 발견되는 메시지의 층위는 '지각적 층위'다. R. 바르트가 사진의 외 시적 층위 (denotation)라고 불렀던 이 층위는 우리가 사진을 읽지 않고 응시하게 되면서 만나는 메시지의 층위다. 고 영애의 경우 이 지각적 층위는 그녀의 사진들을 특별하게 만드는 평범함의 코드들과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다시 말해서 고 영애의 평범한 사진들은 그 안에서 평범하지 않은 메시지를 독해하도록 유도한 뒤 다시 평범한 사진 이미지 자체로 되돌아오게 만든다. 사진 읽기를 거쳐서 사진 보기로 돌아왔을 때 우리가 고 영애의 사진들 속에서 조우하게 되는 건 더 이상 루이비통의 신화적 정보도 다국적 패션기업의 제국주의성에 대한 인식적 메시지도 아니다. 이국적인 거리 풍경, 한가하게 거니는 익명의 사람들, 서로 등을 돌리고 앉아 있는 벤치, 마주보고 서 있는 두 그루의 가로수, 외롭게 서 있는 가로등, 자동차, 자전거...... 의미 읽기를 마치고 고 영애의 사진 이미지들을 응시하면서 우리들이 발견하는 건 우리들 자신의 지각과 프레임 안에 들어 있는 사물 이미지들과의 오래되고도 친숙한 교감이다. 그러한 교감의 발견은 고 영애의 사진 공간을 전복적인 지각 공간으로 바꾼다. 다시 말해서 사물 이미지들과의 교감 경험을 통해서 고 영애의 사진 공간은 더 이상 루이비통이라는 국제적 패션 기업의 신화적 공간이 아니라 저마다 고유하게 사물들과 만나는 사진적 지각의 공간이 된다. 그리고 그 지각 공간 안에서 우리가 해후하게 되는 건 루이비통의 얼굴을 닮아버린 자본주의적 욕망이 아니라 그 욕망의 그림자 밑에서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저마다 고유한 욕망의 얼굴이다. 우리가 고 영애의 평범한 사진들 앞에서 걸음을 멈추게 되는 건 무엇보다 이 평범하지 않은 욕망과의 특별한 만남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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