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진
전시회인가 전람회인가
이태한교수의 사진 전람을 계기로 ‘이태한사진전’, ‘이태한사진전시회’, ‘이태한사진전람회’, 어떻게 부르는 것이 좋을까에 생각이 미쳤다. 속으로 별것도 아닌 일로 머릴 쓴다고 하면서도 이런 명칭, 저런 명칭을 생각하는 것이 버릇이라 여기에 미치게 되었다.
요즘 열리는 사진전람 행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주로 ○○○전, ○○○전시회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 같다. 무엇이 맞고 정확한 명칭인지 모를 때도 있고, 한편 사진을 보여주고 발표하는데, 이렇게 여러 명칭으로 불러 우리를 고민해 빠지게 하는가에 대한 생각까지 들었다. 신문이나 잡지에 난 전람 행사에 관한 기사를 봐도 전시회라는 명칭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전시회와 전람회 명칭을 구분조차 않고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전시회라고 지칭해야 할 행사를 전람회라고 하는 경우도 있고 또 전람회라고 해야 할 행사를 전시회라고 지칭하는 경우도 있었다.
우리말사전을 찾아보아도 이 명칭들에 대해 속 시원한 해답을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명확하게 구분해 설명해놓지 않았다.
한글학회에서 나온 큰 사전(1961년 판)에는 “어떠한 특정한 물건, 곧 동물, 식물, 무기 따위의 표본, 실물들을 진열하여 일반에게 참고 자료를 보이는 회”를 전시회라 했으며, “여러 가지 물건들을 많이 벌이어놓고, 거기에 대한 문견(聞見)을 넓힐 목적으로 구경시키는 회”를 전람회라고 적었다. 그 외의 사전에도 “여러 특정한 물건, 즉 우수한 상품, 학술적인 표본 등을 전시하여 일반에게 참고가 되게 하는 모임. 예를 들면 국산품 전시회”를 전시회, “전람품을 진열해놓고 거기에 대한 식견을 넓힐 목적으로 사람들에게 관람시키는 모임”을 전람회로 구분해 설명하고 있으나, 언 듯 봐서는 전시회와 전람회의 구분이 잘 되지 않는다.
이와는 달리 북한에서 간행한 조선어사전(북한 과학원출판사 1990년 판)에는 “일정한 전시품을 벌이어놓고 일반에게 보이는 모임. 시제품전시회”를 전시회라고 했으며. “전람을 목적으로 하는 모임. 미술전람회, 사진전람회. 나는 그날 학교에 전람회에 출품할 그림을 그리려고 대동강 유보도로 나갔습니다.”라고 예까지 들어 설명해 어는 정도 구분이 된다.
일제 강점기인 1922년, 조선총독부에서 조선미술전람회를 개최하려고, 그 규정을 관보에 고시한 적이 있었다. 그때 붙인 명칭은 조선미술전람회였다. 순종께서도 왕비와 함께 이 전람회를 구경했는데,『순종실록부록』 1922년 6월 5일조에 순종이 왕비와 함께 조선미술전람회를 구경했다고 기록한 바 있다.
그런가하면 1921년 8월에 해강 김규진이 충남 공주에서 즉석 휘호한 작품을 전시했는데, 이때는 회화전시회라고 했던 적도 있으며, 또 1929년 3월에 정해창이 광화문 빌딩에서 사진전을 했을 때에는 예술사진작품 전람회라고 신문에 난 적이 있다.
1949년 문교부에서 고시 제1호로 국전을 창설될 때에도 대한민국미술전람회라고 했는데, 6,25한국전쟁 이후부터 전시라는 명칭을 주로 시용하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전람회는 거의 사용하지 않고 ○○○사진전, 아니면 ○○○사진전시회라는 명칭을 주로 사용하고 있다.
이태한 사진전람에 대한 글의 첫머리에 이런 논의로부터 시작한 것은 과거의 명칭을 다시 사용자거나 과거로 다시 돌아가자는 뜻에서 명칭 문제를 거론한 것은 아니다. 사전에서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이러니 사용하면 안 된다거나 된다는 강요는 없다. 그러나 동식물, 또는 무기 등의 표본을 펼쳐 보이고 이를 선전하는 전시와는 달리, 정신적인 작업이자 창작의 결정인 사진을 비롯해 미술, 디자인 등의 작품을 감상하는 장소, 또는 이를 위한 행사는 전람회라고 정리된 예도 있는 만큼, 명칭이라도 제대로 부르고, 사진 전람의 본 뜻을 재대로 정립해 보자는 소박한 생각에서였다.
탑에 대한 이야기
탑에 대한 이야기는 끝이 없다. 불교의 독특한 종교 건축인 탑은 인도에서 B. C 486년 부처가 임종하자 다비한 유골을 8개국에 나누어 보존하기 위해 세운 것이 시초라고 하며 명칭도 인도의 Stupa, 중국에서 탑파(塔婆), 두파(兜婆), 투파(偸婆)라고 음역한 말을 우리도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탑은 일종의 부처님 무덤이랄까,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탑도 있고, 부처님의 말씀, 불경을 모신 탑도 있고, 부처님의 말씀을 손으로 직접 베낀 경전을 그 속에 모신 탑도 있다. 또 사찰을 조성할 때 필수적으로 건립된 탑도 있고, 부처의 몸과 동등하게 취급한 공양탑, 심지어 기념탑도 있다.
우리나라의 탑 조성은 불교가 전래된 370년대 이후 사찰을 창건하면서 시작되었다고도 하고, 사찰이 창건되기 전에 탑이 먼저 세워졌다는 설도 있다. 또 탑의 재료는 흙을 사용하기도 하고 금속, 나무 분황사탑처럼 벽돌 등을 사용하기 했으나, 대부분 석재를 사용했다.
이런 이야기도 있다. 신라의 석탑은 몇 개를 제외하면 지방의 특색이 전혀 없고, 고려시대의 석탑은 지방색이 잘 드러나 있다. 중부 지방 이북의 탑들은 고구려나 원나라의 탑을 본뜬 사례가 자주 발견되고, 충청도와 전라도의 석탑은 백제의 석탑을 모방한 것이 많으며 경상도의 석탑은 신라의 3층 석탑을 모방한 것이 많다고 한다. 신라의 석탑이 지방색이 없는 것은 경주의 석탑의 조영에서 탁월한 기술을 인정받은 장인들이 지방의 석탑도 만들었기 때문이고, 반면에 고려시대의 석탑은 상당수가 지방에 거주하는 장인들이 만들었기 때문에 토속적이며 투박한 작품이 많다고 한다.
또 전국의 탑들 가운데 전라도지방의 탑들, 예를 들면 김제, 남원, 지리산 주변의 탑들은 그냥 친근감이 들어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은 느낌이 들고, 경상도 쪽에 있는 탑들은 너무 말끔하게 잘 생겨 말을 붙이기도 어렵고 얘기를 꺼내도 대답해 줄 것 같지 않은 느낌을 주고, 경상도 쪽의 탑들은 너무 말쑥하고, 전라도 쪽의 탑들은 꾸미지 않아서 소박한 느낌이 든다고도 한다.
그래서 사진 찍기도 신라 쪽의 계열에 있는 탑보다, 백제 계열에 있는 탑들이 수월하고 무언가 많은 애기도 사진 속에 담을 수 있다고 한다. 제주도에는 탑을 조영하는 재료 때문인지 오래된 탑이 거의 없다. 탑이 가장 많이 보존되어 있는 지역은 아무래도 신라의 본거지인 경상도 쪽, 경주에 고탑들이 가장 많이 보존되어 있다.
원래 불교 전성시대의 탑은 신앙의 대상이었고, 문화의 중심, 미적 대상이 되었다. 절에 가면 예배 대상이 탑이었고 그 다음이 불상이었는데, 요즘은 예배 대상에서 밀려난 것도 난 것이지만, 그 조차 전혀 의식하지 못한 것 같다. 부처님의 모습을 형상화 시킨 불상만이 예배 대상이고 그곳에 경배를 하지 탑파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탑은 그냥 절을 장식하는 조영물이 아니라, 절의 중심이 탑이고, 존경의 대상이고 경배해야할 그런 대상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잘못된 형태로 해서 탑은 버려지고, 우리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되고 말았다.
이태한의 탑사진 작업 역정
촬영자의 얘기를 듣거나 사진을 보고 있으면, 이 사진을 전시하기까지의 역정에 대해 설명을 듣지 않아도, 그렇게 녹녹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탑도 찍혀 있고 또 탑이 그곳에 서 있는 얘기까지 찍으려면, 대상을 찾는 일부터 그 자리에 그렇게 서 있어야 할 모습이 조성될 때까지의 기다림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탑 촬영의 역정, 이 전람을 이끌어내기까지의 지나온 과정을 세삼 생각하게 한 사진전이어서, 이태한의 탑사진 작업 역정이라고 한 항목을 만들어 봤다. 이 부분은 작가의 인터뷰를 중심으로 구성했다.
1992년에 경주를 찍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이 사진들을 찍게 되었다. 동기는 우리 것을 찍고 싶었고 그러다보니까 우리 것이 가장 많이 있는 곳이 경주였기 때문에, 그곳의 문화유적을 열심히 찍었다. 불상도 찍고 탑들도 막연하게 찍었다.
그 후 몇 가지 사건으로 나 자신의 작업에 대한 회의랄까, 자신의 사진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모색의 과정을 아주 절박한 심정에서 맞닥뜨리게 되었다. 충실한 모습 보다는 껍데기만 찍고 있는 것이 아닌가에 대한 회의였다.
이러한 계기는 경주 석굴암을 촬영할 때 주지 수님의 법어 같은 꾸지람을 통해 나의 사진을 되돌아볼 수 있었다. 주지스님의 말씀 중에는 상대의 배려, 상대에 대한 의식을 갖지 않고 나만의 상대를 찍는 그런 잘못에 대한 반성을 촉발시켰다.
이러 생각에 미치자 문화재에 대한 공부를 좀 더 해야겠다고 해서 책을 사서 보기도 하고 그 방면의 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나중에는 중앙대학교 사진과 대학원을 끝내고 동국대학교 대학원 불교미술학과에 들어가게 되었다. 불교미술과는 이론만이 아니라 실기도 겸해서 공부하게 되어 불교 미술 불상이라든가 탑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해석이 가능해지고 주관적인 해석도 가능해지면서 사진작업도 어느 정도 길이 튀이게 되었다. 불교를 모르면 문화재를 모르고, 문화재를 모르면 사진을 찍을 수 없을 것 같아서 불교미술을 전공했는데, 나의 사진 작업의 판단 기준을 세우는데, 중요한 과정이 되었다.
또 이런 과정도 있었다. 영종도의 신 공항, 오늘의 인천공항을 건설할 때 영종도프로젝트를 세워 열심히 찍었다. 신 공항 건설 현장이라든가 그런 공사작업 등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찍었는데, 어느 날 인화작업을 한 사진들을 살펴보다가 깜짝 놀랐던 사건이 있었다. 암실작업을 해 말리기 위해 걸어놓고, 밖에 나가 볼 일을 보고 다시 암실에 다시 들어와 사진을 보았더니, 내가 만든 사진인데 굉장히 낯설고 내 사진 같지 않았다. 이것은 내 것이 아닌데, 하는 생각도 들고 나중에는 남들이 썼던 카메라, 남들이 썼던 앵글, 남들이 썼던 기법을 답습한, 가짜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주변의 사진가들의 사진도 새삼스럽게 보게 되었는데, 별반 차이가 없는 것 같고 어느 사람의 사진은 보기에 부족한 느낌도 들고, 좋고 나쁜 것을 떠나서 촬영자의 소속감이 들지 않기도 했다. 피사체의 선정, 어떤 대상을 찾아 어떻게 찍어야 할 것인가. 과연 한국적인 것이 무엇일까, 어떤 피사체나 대상을 통해 한국적인 사진을 표현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것, 한국적인 사진을 표현할 수 있는 자세, 나 자신도 그렇고 피시체도 그렇고, 고민과 갈등이 너무 심해 한 1년 동안 사진을 전혀 찍지 못했다. 슬럼프라기보다는 아예 사진을 포기하다시피 한 그런 상황에 놓였었다. 사진 찍는 것을 그만두고 싶은 정도로 깊은 고민 속에 빠졌다.
1998년 일이었다. 경기도 여주 신륵사에 놀러갔다가 우연히 초여름의 석양 무렵, 강변 쪽에 있는 절의 석탑을 보게 되었는데, 고즈넉하게 보이면서도 고풍스럽고 당당하게 서 있는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순간적으로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고, 향수 같은 느낌도 들고, 반가운 고향 친구를 만날 때처럼 반가움, 서운함, 슬픔 등 만감이 교차되었다.
이렇게 탑이 내 마음에 들어오면서 강열한 호감을 갖게 되고 사진을 다시 찍고 싶은 충동에 빠졌다. 절마다 탑이 없는 절이 없었는데, 왜 이렇게 많은 탑을 보지 못했을까 하면서 그 전에 찍은 사진들을 뒤져보니까 꾀 많은 탑을 찍었었다. 경주에서도 여러 탑을 찍었으나 그걸 모르고 지나갔던 것이다. 초기에는 경주를 표현하려고 했으니까, 탑에 대한 관심을 전혀 갖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우리 것이 가장 많이 모여 있다고 해서 경주를 표현하려고 했을 뿐, 소재주의에 빠져, 오래된 것들, 그것만 찍고 우리 것을 찍었다고 생각했다.
1992년부터 경주 남산을 찍기 시작한 사진들을 모두 버리고 재작업을 하게 되었다. 제일 먼저 촬영 작업을 시작한 것은 탑이었다. 탑이란 것이 중국에서 와서 일본에 전해지긴 했지만, 중국과 일본과는 다른, 우리나라만의 고유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전 세계에 없는 그런 형태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 탑이 가지고 있는 정체성이 우리를 표현해 줄 수 있는 대상물로서의 기록을 할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나의 정체성도 탑과 함께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저런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의 석탑을 촬영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많은 곳을 다니면서 열심히 촬영했다. 우리나라를 한 4, 5바퀴나 돌았을까, 그렇게 여러 곳을 돌아 다녔다고 하면 과장된 표현일까. 그렇게 탑을 찾아 전국을 누비고 다녔다. 봄여름가을겨울 이렇게 찾아다니는데, 90년대 초는 오늘과 같은 좋은 장비들도 없었고, 기록을 더듬어서 현장을 가 봐도 탑이 그곳에 없거나 동떨어진 곳에 방치된 탑들도 많고, 그 곳 주민들도 잘 모르고 그랬다.
탑의 변용과 미학
탑도 사람처럼 각각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전국의 수많은 탑들이 그냥 지나치다시피 보면 그 탑이 그 탑 같지만 그렇게 수많은 탑은 하나도 같은 얼굴, 같은 형태로 된 것은 없다. 탑은 불심의 결정이고, 돌을 깎고 세기는 망치소리 하나하나에 믿음과 기원을 담아 조영된 석조예술품이다. 예술과 신앙으로 이뤄진 불탑을 사진 찍는다고 하는 작업은 어쩌면 지난하고 지난한 작업일는지 모른다. 필자가 신문사에서 잡지사진을 찍던 사진기자시절. 르포르타주 같은 작업을 할 때에 국보나 보물로서의 탑일 경우에는 이것을 꼭 찍어야만 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탑만을 찍어야한다는 고정 관념 때문이었을까, 아무리 잘 찍으려 해도 잘 안 되고 찍어놔도 볼품없는 사진이 되고 말았던 생각이 난다.
탑은 탑 자체만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주위환경과 함께 서 있는 것이다. 아니 탐을 만들 때 장인들은 어디에 세울 것인가도 마음에 두고 탑을 조영해 세운 것은 아닐까. 문득 옛날 고전음악을 열심히 듣던 때의 생각이 났다. 사진가가 탑을 찍은 사진은 마치 탑을 주제로 한 변주곡, 탑 주위, 탑 자체의 형태, 탑이 서 있는 지리적인 여건 등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표현한, 그런 음악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탑이라는 우리 문화재를 사진 찍는다면, 물론 그 외의 문화재, 이미 예술작품으로 평가된 피사체일 때에는 그 피사체의 아름다움, 예술품의 존중도 존중해야 하지만, 음악에서의 변주곡처럼 정리된 자신의 사진세계를 통해 이러한 피사체를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 어쩌다 보니까 나도 선문답에 빠지고 말았다.
필자는 작가와 긴 얘기를 나누면서 그의 사진에 대한 속 시원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자신의 사진세계에 관한 것이었다.
내가 찍은 사진은 책이나 도록에 쓸 그런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다. 탑의 실상이나 형태만을 그대로 보여주는 작업과는 별개다. 소재는 탑이지만, 탑을 통해 표현하려는 목적은, 어느 탑은 수천 년 동안 그 자리에 묵묵히 자리를 지켜오면서도, 그 주변을 변화시키려고도 하지 않고 또 동화되지 않으면서 자기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주변과 어울려져 있는 탑의 모습을 나타내려 한 것이다.
사진을 찍으러 간 게 아니고, 탑이 내가 되고 내가 탑이 되어 친구가 되는 것처럼 서로 친구가 되어, 그 탑과 대화를 가려 간 것이다. 어떤 탑은 살기 힘들다고 하는 경우도 있고 어떤 탑은 즐겁다고도 했다. 탑의 주변에 오랫동안 함께 서 있는 소나무나 풀도 탑이 되고 친구가 되니까, 풍경으로서의 탑이 아니고 탑으로서의 풍경이 아닌, 탑과 풍경이 함께 어울러져 이뤄진 세계가 내가 추구한 사진이었다. 나는 탑이라는 피사체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 얘기를 사진으로 전달해주는 매개자의 역할을 하려고 했다.
작가는 불교신자는 아니지만, 오랫동안 탑을 촬영해서 그런지 모르지만, 신자보다도 더 자연스런 선문답 같은 말로 설명해 주어 나 역시 잘 이해가 안 된 부분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사진에는 분명한 것이 있다. 탑만이 아니라, 탑이 서 있는 주변, 산이나 들, 숲, 나무 등이 어우러진, 그러한 세계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앞에서 탑을 주제로 한 사진작업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탑이 위치해 있는, 산야와 어울러져 있기 때문에 풍경사진처럼 보일지 모르고 이 점을 무심히 넘어가서도 안 된다.
우리는 결론을 유보한 채 그러나 주변의 정황을, 일반 사진계에서 말하는 풍경이라고 지칭하기로 의견을 모아. 풍경 사진 같은 논리를 만들어 냈다.
만일 탑도 풍경의 요소이고 주변 산세라든가 들판, 숲과 나무 등이 어우러진 세계도 풍경이라고 한다면, 이태한의 탑 사진은 풍경과 풍경이 어우러지고 탑의 대화가 그 속에 스며있는 그런 사진, 그러면서도 주위의 풍경에 잠긴 그런 탑이 아니라, 탑을 설명하고, 탑이 왜 거기에 있는가를 보여주는 그런 사진이다. 다시 작가의 얘기를 들어보자
나는 풍경사진을 한 번도 찍어 본적이 없다. 피사체와의 느낌이, 피사체와 나와의 소통하는 관계 속에서 느낀 것을 찍었을 뿐이지, 그 사진이 풍경처럼 보일수도 있고 정물처럼 보일 수 있지만, 구분해서 찍어 본적은 없고 탑은 탑으로만 찍었을 뿐이다. 찍는 일환으로 찍었을 뿐이다.
사진가의 얘기를 들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태한의 탑은 오늘의 탑일 수도 있고 아니면 수천 년의 세월 이전에 세워진 탑일 수도 있을 것이고, 또 탑만 세워져 있는 것이 아니라, 탑도 있고 탑이 서있는 그곳도 있는 그러한 사진이다. 라는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