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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화가 윤상천의 5번째 개인전. 현대 기계문명을 상징하는 'Bonnet'위에서 소나무들은 아름다운 곡선들과 함께 공간속으로의 확장을 시도. 본넷에 그려진 소나무그림들은 이전의 관조적 입장에서 솔숲을 보는 것이 아닌 솔숲 속에서 소나무와 함께 소나무가 비춰진 'Bonnet'을 보고 있는 느낌을 받게 된다.
자동차 보닛 위에 반영된 소나무의 영성(靈性)장미진 | 미술평론가, 미학박사
1. 소나무의 말씀(木言) 윤상천은 ‘소나무 작가’로 알려져 있을 만큼, 그동안 주로 소나무 그림을 통해 자신의 세계관을 투영해왔다. 소나무는 동양철학에서 인간 삶과의 유비 가운데 다양한 상징성을 지니는 나무로 칭송되었고, 현금에도 많은 사람들이 친숙하게 여기며 또한 경원해마지 않는 자연소재이다. ‘자연의 인간화’를 표방했던 유가 전통에서나 ‘인간의 자연화’를 구가했던 도가 철학, 혹은 불이(不二)철학의 핵심을 간파하고 있는 불가사상 속에도 소나무는 우주적 시공간을 상징하는 영물(靈物)로 비유되어왔다. 그런 만큼 소나무는 고금의 예술 소재로 각광을 받고 있다. 그러나 누가 있어 실로 소나무를 다 그렸다 할 수 있을까. 소나무와 정자, 소나무와 십장생, 소나무와 산수화, 소나무와 우주, 그리고 ‘소나무 만다라’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화가와 시인들이 소나무를 그리고 읊었지만, 기실 소나무는 여전히 새롭게 그려질 수 있는 날것의 영적인 소재로 남아 있다.
역시 소나무는 자라는 토양에 따라 ‘자연이 주는 디자인’으로 우주적인 다양한 내재율을 품어내고 있다. 아마도 지리산 근처 천년송을 끌어안아 본 사람이라면 천지간의 호흡을 온 몸으로 증언하고 있는 소나무의 기운을 제대로 느껴볼 수 있었을 것이다. 전국적으로 ‘솔바람 모임’이 있을 정도로 소나무의 법문, 소나무의 ‘말씀’은 동호회를 통해서도 민간에 널리 회자되고 있다.
2. 모티브로서의 소나무 작가는 <1980년대 이후 회화에 나타난 소나무의 상징성과 조형성>이라는 제목으로 석사논문을 쓸 정도로 소나무에 대하여 심도 있게 연구하였고, 전국의 소나무들을 찾아다니면서 그 기운을 옮기려 매진해왔다.
이 작가에게 있어 소나무는 작품의 소재이면서 표현의 주 모티브이고, 또한 예술 매체이기도 하다. 인간의 삶이 다양하듯이 작가의 화의(畵意)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 작가는 말한다: “한국사람은 소나무 아래서 태어나 소나무와 더불어 살다가 소나무 그늘에서 죽는다고 할 정도로 소나무는 예로부터 우리의 생활에 물질적, 정신적 영향을 끼쳤다. 우리나라의 문화는 소나무 문화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소나무를 통하여 전통과 현대의 맥을, 그리고 민족의 정서와 개인의 감성적 유대감을 투영하고 환기시킴으로써 정체성을 찾고 싶었다. ... 우리는 소나무에서 성장의 리듬과 연륜을 지각할 수 있는 선과 기운을 느낄 수 있고, 면면히 내려오는 역사의 기운과 땅과 하늘의 소통을 통한 생명력을 읽을 수 있다.”
이 같은 작가의 예술의지가 구현된 것이 그의 소나무 그림들이다. 청도의 <처진 소나무>를 비롯하여 안동과 봉화의 적송들과 춘양의 금강송, 흥해의 솔숲과 태백의 솔숲 등, 한 두 그루의 소나무에서부터 3미터가 넘는 파노라마의 솔숲 표현에 이르기까지 작가는 지역과 자생지에 따라 기운이 다른 각양각색의 소나무들을 꾸준히 그려왔다. 한 가지 소재에 천착했던 만큼 표현의 기량도 연마되어, 붉은 살가죽이 세월의 질감을 전하는 소나무의 줄기와 청청한 솔잎의 초록빛이 햇빛에 빛나는 그림들은 소나무의 기운생동 함을 투영하고 있다. 다양한 양식과 매체표현이 난무하는 현대미술의 와중에서 2007년 ‘올해의 청년작가전’(문화회관 기획)에 열 명의 작가 중 한 사람으로 초대 개인전이 열렸던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할 만하다. 그만큼 화가로서의 지구력과 진정성이 어느 정도 평가되었던 결과였다.
그런데 그동안 주로 캔버스에 유화물감으로 작업해오던 작가가 이번에는 자동차 보닛(bonnet) 위에 소나무 그리기를 시도한다. 현대문명의 이기로서 우리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금속성의 자동차들, 현대 삶의 속도감과 건조함을 대변하는 자동차의 한 부분인 보닛 강철판을 이용하여 그 위에 소나무를 그린다.
3. 반영된 소나무와 영성 대자연은 여전히 법문을 굴리고 있어도 현대인들은 그 자연의 말씀을 여유 있게 경청하지 못한다.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그냥 스쳐 지나칠 뿐이다. 그 보닛 위에 스쳐 지나가는 소나무의 실루엣들과 때로는 세워 둔 자동차에 비치는 소나무들에 작가는 주목한다. 형체가 왜곡되면서도 공기와 빛 속에 소나무들이 품어내는 선과 색채가 오묘하게 반영된다. ‘반영된 소나무’는 단지 보닛 위에 비치는 것을 묘사했다기 보다는 현대인의 심상 속에 잃어버린 나무의 기운을 환기시킨다는 의미에서 반영된 나무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그렇게라도 대자연의 내재율과 소나무의 영성을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 보닛은 강철로 된 변형 캔버스이다. 이전에 그는 평면위에 부조적인 마티에르 효과를 위해 유화물감을 두텁게 칠하고 나이프 작업을 병행하기도 하였고, 또는 도마나 문 위에 소나무를 그리기도 하였다. 이번에는 보닛 강철판을 연마하고 여러 공정을 거쳐 화면을 다듬은 후 그 위에 그림을 그림으로써 또 다른 효과를 도모하고 있다. 다양한 색의 소형차 보닛을 폐차장이나 정비공장 등에서 구해 에어 컴프레서와 원형샌더기를 이용하여 도색 안료를 베껴내고, 캔졸(consol)을 페트롤(petrole)로 희석하여 밑칠을 두세 겹 칠한 다음, 유화물감을 사용하여 그림을 그린다. 때로 전동 조각칼인 핸드피스(handpiece)를 사용해 하늘의 태양빛 반사 효과나 소나무 껍질의 양감을 살리기도 하고, 보닛의 광택효과를 위해 유화물감 위에 바니쉬(varnish)를 발라 마무리를 하는 여러 공정을 거쳐 작품이 만들어진다. 그의 이러한 작업은 거의 중노동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창작과정에서 희열을 느낀다고 한다. 한 점을 완성하기 위해 많은 수공과 시간을 드려야 하는 보닛 회화는 그가 얼마나 집요하게 소나무의 아우라를 현대의 감각으로 투영해내고자 고심하는지를 엿보게 한다.
‘소나무 만다라’(박희진 시집)라는 말이 가능할 정도로 소나무의 둥치와 가지, 잎들이 품고 있는 세계는 또 하나의 소우주이고, 그러한 풍경을 완상하며 음미하는 것 자체가 자아와 세계의 소통과정에 다름 아니다. 이번 작업에서는 현대적 삶 속에 반영된 풍경, 즉 형태가 왜곡되거나 흐릿한 이미지로 추상화되고 해체되는 전이과정을 드러내면서 현대인의 심상 속에 번안된 소나무들이 선보이고 있다. 또한 작가는 노동의 프로세스를 통해 한 그루 소나무가 품고 있는 시 공간의 무게에 접근해가는 묘미도 느끼는 듯하다. 이번에 전시되는 20여점의 작품 중에 9점은 베니어합판을 보닛 모양으로 가공하여 만든 작품들이다. 금속성과 나무의 질감 차이가 엿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작업이 소나무가 지니는 상징성과 수공의 효과를 앞으로 얼마만큼 아우르게 될지는 좀 더 지켜볼 일이다. 소나무를 통해 어떠한 메시지를 작위적으로 만들어 투사하는 데 신경 쓰기보다는 소나무의 형상(eidos)과 본질을 오히려 직관적인 형식으로 대면케 할 수 있는 사유와 창조적 장치가 더욱 필요하다고 느껴진다. 이러한 자극과 발전을 위해서 이번 전시는 그의 화력에서 하나의 계기가 되리라 여겨진다.
‘포스코 스틸아트’를 위해 구상한 작품 중에는 보닛 위에 화재로 무너져가는 숭례문과 소나무가 그려져 있으며, 가운데 공간을 뚫어 모니터를 장치하고, 영상과 소리 등을 통해 한국의 역사와 문화재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려는 의도의 작업 구상도 있다. 앞으로 어떻게 구체화되어 갈지는 지켜보아야겠지만, 자동차 전체를 갤러리 공간 안에 가져다 보닛 뿐 아니라 창유리나 트렁크, 차 지붕 등에 반영된 소나무를 그리고, 벽면에 그린 소나무 숲과 함께 솔바람 소리 등의 소리와 영상이 가세하는 현장을 떠올려보기도 한다. 묘사력이 뛰어난 만큼 그러한 묘사력을 살리면서도 소나무의 영성을 드러내기 위해 현대미술의 다양한 창조 전략들을 활용한다면 앞으로 보다 폭넓고 깊이 있는 작업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한다.
대백프라자갤러리Tel 053.420.8015/6
대구 중구 대봉1동 214번지
작가홈페이지 www.artpin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