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2008-08-21 ~ 2008-09-12
조환
02.720.5114
이슬로 사라지는 삶, 그 흔적 누구나 인생을 살아가면서 삶의 전환기를 맞이한다.
어떤 경우에는 그 변화의 편차가 커서 괄목상대(刮目相對)하는 경우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 전환의 변화가 미미해서 눈에 띄지 않거나 혹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내면의 은밀한 의식에만 작용할 때도 있다. 경중에 차이는 있을지라도 삶의 향방을 바꾸는 의식의 전환은 인생관의 변화에서 온다. 즉 세계를 바라보는 눈의 높이나 각도가 달라짐에 따라 세계에 대한 의식의 작용과 반응 또한 달라진다. 인생을 바라보는 시선이 변할 때 우리는 그 삶을 둘러싼 크고 작은 깨달음을 얻는다.
중년을 훌쩍 넘어선, 만약 조선시대 같으면 벌써 원로의 대열에 들어섰을지 모를 작가 조환. 삼십 년의 화업을 이어온 그가 기존의 작업 방식을 벗어나 새로운 세계에 대한 탐색의 전환점에 섰다. 조환은 그간 삼십 여년의 작업에서 인간 삶의 고뇌와 행복, 그리고 삶의 본질의 모습을 다양한 민중의 삶의 양태를 통하여 표현해 왔다. 그의 눈은 사회적 소외 계층을 향해 있었고 그들의 삶 속에서 삶의 아픔과 숙명 그리고 인간의 한계를 보고, 숙명을 넘어선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고자 하였다. 동시에 그는 그들의 삶과 자신의 삶 형식의 배후, 그 역사성과 문화적 배경에 대한 반성을 통하여 전통의 계승과 현대적 변용의 문제에 깊이 있는 천작을 보여 주었으며, 그의 정제된 작업이 현대 한국수묵 인물화의 발전 과정 속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적지 않다.
삼십 여년을 하나의 주제에 천착하여 자신의 세계를 탐구하였던 그가 이번 전시에서 자신의 작업을 대폭으로 일신하였다. 일순간 그의 작업에는 반평생 닦아 왔던 기능적 작용, 붓과 먹, 종이가 만나 상호 작용하는 섬세한 모필의 묘미와 운치와 구체적 형상이 사라지고 추상적 이미지들이 난무하며 철판과 조명 같은 상대적으로 딱딱하고 의식적인 재료들이 등장하였다. 그의 작업이 이처럼 갑작스럽게 중간 과정의 완충 작용 없이 한 순간 달라진 까닭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의 말을 들어보면 이러한 작업 전환의 동기는 사회적 변화와 함께 더불어 온 의식의 환기 때문이었다. 5년간의 유학생활을 통한 새로운 시각과 문민정부 시대가 들어서면서 그는 자신의 작업에서 소외 계층을 따뜻한 눈으로 보고 감싸고자 했던 사회적 기능들이 그 효용을 다한 것 아닐까라는 회의를 품기기 시작했다. 작업의 이러한 기능적 작용에 대한 회의는 그의 사고가 이제 더 깊은 근원적이며 본질적인 문제로 향하기 시작했음을 암시한다. 그는 예술의 목표가 단지 사회적인 문제의 환기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과 삶의 본질을 이해하는 수단임과 동시에 표현임을 의식하게 된 것이다. 예술 가치는 눈에 보이는 감각적 형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느껴지는 인생의 회한과 삶의 반성을 되새김하는 직관적 음미에 있다. 이러한 예술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자신의 작업에 대한 총체적이고 전면적인 재고를 요하게 된다.
조환은 자신의 기존 작업에 대한 성찰을 통하여 자신의 예술관을 한 단계 더 넓고 깊은 경지로 끌어 올렸다. 인식의 시야가 넓어지듯 그의 작업이 포용하는 경계가 넓어진 것이다. 예술 역시 삶을 해석하고 이해하며 다시 삶에 반영하는 것이듯 예술적 표현 또한 삶의 이해에서 나온다. 형식과 내용이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듯이 예술 표현 방식이 달라짐은 작가가 삶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방식이 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번 전시에서 조환의 의식을 반영하는 가장 커다란 특징은 그가 인생 궁극의 문제에 대하여 천작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귀로(歸露)-흔적(痕迹), 이번 전시의 타이틀인 “이슬로 돌아간다”는 말은 그의 인생관을 대변하는 용어이다. 삶을 살아가는 모습은 다양하지만 결국은 본래의 모습으로, 있던(존재의 본원本源)데로, 가야만 하는 것, 그 본래의 모습이란 역시 의지가 작용하지 않는 세계, 스스로 그러한 세계로 이해된다. 조환은 그 도가의 허무와 자연의 세계를 불가의 반야의 세계로, 피안(彼岸)으로 또는 진리로 이해한다. “진리가 너를 자유케 하리라”는 성경의 말처럼 인식과 행위를 해방시키는 의식의 자유는 진리이다.
그러나 그에 있어서 ‘허무’의 인식이 모든 존재가치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세계관에 있어서 ‘허무’란 존재를 인식하는 하나의 방식이지 그 존재가 그 존재의 가치를 체험하는 실존의 세계는 아니다. 존재는 존재로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삶의 의미를 체득하고 그것을 표현하는 정신적 세계를 영유한다. 그곳에 인생의 희노애락이 있고, 매 순간 일어났다 사라지는 정(情)이 있다. 그 정의 기복을 관조하며 인생의 의미를 맛보는 유희가 있다. 그 유희의 맥락을 조환은 흔적으로 표현한다. 모든 존재가 허무로 돌아가는 것이겠지만 이 세상을 다녀간 흔적, 사람에 따라 그것은 학문이 되고 예술이 되고 종교가 된다. 즉 인간이 세계의 본질을 이해하려고 노력한 흔적, 문화이다.
어떠한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지든 문화적 태생을 벗어나기는 힘들다. 조환의 작업이 재료의 운용과 표현 형식에 있어서 이전의 작업과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그 내면의 기제는 동일한 의식 선상에 있다. 이번 전시에서 조환이 본질을 찾아 나아가는 방법은 그가 삼십 여 년 동안 연마해 왔던 ‘서화동원론’과 ‘서화용필동론’이라는 동양의 화법에 근거한다. 복잡다단한 현대의 삶의 양태 속에서 그가 발견한 형상(形象)의 근원은 획(劃)이었으며 그 획의 가장 축소된 형태인 점은 그의 작품 형식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조형 요소로 작용한다.
조환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그 세계를 들어가기 위한 실마리는 결국 서예인 셈이다. 철필의 필획이 난무하는 그의 이번 전시는 마치 초당의 위대한 서예가 장욱(張旭)처럼 필획의 잔치라 불릴 만하다. 그의 필획 또한 장욱이 공손대랑(公孫大娘)의 검무를 보고 운필을 깨우쳤던 것처럼 또 한 노파와 짐을 진 사내가 길을 서로 비껴지나가는 것을 양보하는 것을 보고 필법의 뜻을 탐색한 것처럼, 삶의 여러 모습 속에서 발견한 세계에 대한 인식이다.
이처럼 그가 연출하는 작품 하나하나는 모두 시서화일률의 문화적 이상을 체현하고 있다. 어느 정도 부식이 진행된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는 철판, 그 철판에 가지런히 뚫린 점들은 획의 축소된 형태인 점들이다. 그 점들은 인간의 지혜가 집적된 문자의 흔적으로 상징된다. 철판에 옛 서적 형식을 빌려 구멍을 뚫고 그 밑에서는 엷은 조명을 비춘다. 빛은 그 점들을 뚫고 올라온다. 빛은 생명을 지닌 모든 존재가 생멸하듯 나타났다 사라짐을 반복한다. 그 위에 바위가 올려있고 바위 위에는 물이 담겨 있다. 이러한 정적인 느낌은 다분히 선(禪)적인 분위기를 연출하여 관객을 새로운 세계로 몰입하게 한다.
그의 작업은 많은 부분 서예와 전각의 장법형식과 바둑의 화점을 놓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또한 문(文)에 대한 이상의 추구와 유희적 태도, 풍류를 즐길 뿐 집착하지 않는 작업 방식은 동양 고대 예술인들의 이상을 반영한 것이다. 조환은 석도(石濤)를 그의 멘토로 상정하고 그의 이상적 경계를 추구한다. 전시장에는 한 모퉁이에는 석도 화언(畵言)이 내걸려 있다. 형식은 다를지라도 예술이 추구하는 경계는 동일한 것 조환은 석도의 이상을 쫓아간다. 이처럼 형식상 기존 작업과 많은 차이를 보이는 조환의 이번 전시는 기실 기존 작업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세계관의 확장과 시선의 차이에 따른 의식의 확장 속에서 나타나는 필연의 결과라 여겨진다. 예술이란 직관적 통찰을 통하여 인생의 의미를 되새김질 하게 해주는 것이며, 그 본질을 이해하면 그 언어는 부차적인 것이 된다.
누구나 삶과 죽음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문제는 삶과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고 받아들일 것인가이다. 삶과 죽음의 문제는 존재의 가치에 대한 질문인 동시에 어떠한 방식으로 세계와 소통할 것인지 그 존재의 인식론과 인생관을 결정한다. 자연의 규율 속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하나지만, 그 현상을 이해하는 방식은 수없이 다양하다. 세계를 바라보는 눈의 차이는 문화의 차이를 낳고 존재의 차이를 낳는다. 그리고 차이는 가치를 낳는다.
중년을 넘어선 조환이 바라본 세계란 무엇인가. 거리를 두고 인생을 관조할 수 있는 나이에 조환은 많은 성인들이 통찰한 것처럼 삶이란 본디 아침 햇살에 스러지는 이슬과 같이 덧없음을 이해한다. 삶의 그 덧없음을 이해하는 순간 의식은 자유를 얻고 행위는 속박에서 벗어난다. 존재란 함께 더불어 살아가지만 궁극은 고독하고, 삶은 현란한 모습을 띠지만 본질은 적막하다. 모든 존재는 역시 도가의 말처럼 존재의 근원인 허무(虛無), 자연(自然)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겠는가!
김백균(중앙대 한국화학과 교수)
FAMILY SITE
copyright © 2012 KIM DALJIN ART RESEARCH AND CONSULTING. All Rights reserved
이 페이지는 서울아트가이드에서 제공됩니다. This page provided by Seoul Art Guide.
다음 브라우져 에서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This page optimized for these browsers. over IE 8, Chrome, FireFox,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