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천남
다른 나라, 외국에 나가 살고 있는 사람을 동포(同胞), 혹은 교포(僑胞)라 부른다. 엄밀히 말하면, 동포는 같은 겨레, 민족을 의미하고 교포는 외국에 살고 있는 동포를 일컫는다. 이들 교포들은 속인주의(屬人主義)에 따라 본국과 법적인 관계를 가지며, 다른 한편으로는 속지주의(屬地主義) 원칙에 따라 거주하고 있는 국가의 법적규제를 받는 특수한 지위에 놓여 있다. 어느 지역에 살고 있던 이런저런 이유로 대부분의 교포들은, 다소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혼란을 경험한다. 한국작가로서 해외에 나가 중․장․단기간에 걸쳐 유학하고 생활하며 작업하는 사람들 역시 교포라 부를 수 있다. 교포라는 특수한 지위와 신분의 한국작가들 역시, 대부분의 일반 교포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경험한다. 이러한 혼란과 고민의 과정들은 때론 창작의 주요 동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황호섭은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재불(在佛) 한인작가이자 교포다. 작가의 얼굴과도 같은 작품을 실물로 접하거나 실제 그를 만나본 사람은 작가 자신과 작품에서 묻어나는, 거부하기 힘든 자기 정체성에 대한 고민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자기 정체성에 대한 반성적 태도와 지적 고민이 배어 있는 황호섭의 작품은 종교적, 명상적 분위기가 강조된 일종의 회화적 자기 고백으로 보인다. 황호섭이 지난 수 년 동안 선보여온 회화 작업과 얼굴 작업은 그러한 복잡한 번민의 노정을 반영하듯 이런저런 감정들이 얼키설키 교차하거나 뭉치고 폭발하며 때론 켜켜이 중첩되고 얽혀 있다. 그러나 이들은 그의 작품에서, 결코 질서를 잃지 않으면서, 나름의 조형적 규칙을 유지하며 쉼 없이 시공을 넘나들며 호흡하고 교차한다. 삶의 후반생에 들어선 황호섭의 작업은, 파리의 이방인으로서, 작가가 경험하는 복잡하고 다층적인 감정의 씨줄과 날줄이 나름의 규율을 가지고 직조되어 있는 독특한 심상일기로 이해된다.
최근 들어 황호섭은 동·서양을 통합하고 신비로운 소우주를 창조해내는 ‘얼굴’ 연작과 회화 작업에 주목하고 있다. 수백, 수천의 구리망으로 빚어낸 인자하고 편안해 보이는 부처의 얼굴들은 대중적으로 익숙한, 혹은 익명화된 사회적 이슈를 얼굴들과 함께 중첩되어 빛과 시선의 움직임에 따라 다양한 형태와 색채의 변주를 선사하고 있다. 쏟아지는 은하수를 연상시키는 황호섭의 회화 작업은, 특유의 색채와 질감으로 담아낸 무한한 회화적 우주 공간으로 액션 페인팅을 연상시킨다. 작가가 투여한 행위의 흔적을 따라잡을 수 있는 단서들을 남겨 놓은 그의 친절한 화면은 평면이라기보다는, 표면질감이 살아 있는, 물리적인 입체감을 적극 획득하고 있는 전면적인 양상을 보인다. 이러한 회화 작업은 물감을 캔버스라고 하는 지지체 위에 올려놓고 그것을 긁어내고 밀어내는 작가의 집요하고 독특한 신체 행위가 반복되면서 누적되고 퇴적된 울퉁불퉁한 화면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황호섭의 근작들은 요즘 접하기 힘든 손맛을 듬뿍 느끼게 한다. 그는 철저하게 손을 사용하며 손을 통해 작업한다. 이번 성곡미술관 전시에 소개되는 그물망 부처 얼굴의 경우, 마치 나물을 다듬듯, 작가는 수많은 구리선을 손으로 직접 다듬고 휘고 엮어내어 일정한 크기의 구리망(銅網)을 만들고 그들을 부분적으로 밀고 잡아당기며 다양한 얼굴 형상을 만들어냈다. 부처의 형을 브론즈 주조 과정을 거쳐 떠내고 직조한 구리망을 씌운 후 손으로 누르면서 일정한 원하는 형을 찾아들어가는 작업과정을 거친다. 구리망을 뜨거운 불에 달구어 얻고자 하는 형태가 나올 때까지 두드리는 단조의 과정도 거친다. 인공의 기계적인 형압이라든가, 일정한 틀로 찍어내 듯 한 번에 떠내지 않았다. 황호섭은 캔버스 위에 이들 인물들을 중첩, 포치하고 사각의 틀로 끊어낸 다음, 그 위에 손으로 힘을 가해 주조한 부처의 얼굴을, 일종의 베일과도 같은 구리망을 씌운다. 이망은 동․서양과 과거․현재, 너와 나, 한국에서의 작가 황호섭과와 프랑스 파리에서의 작가가 만나고 소통하는 장으로서 황호섭은 이 망을 통해 그러한 과정에서 경험하고 사유하고 노정되는 시·공간을 통합하고 조율하는 연금술사적인 위치를 점한다.
이렇듯 이번 전시에 출품된 황호섭의 작업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손'이다. 철저하게 손으로 두드리고, 손톱으로 눌러서 형을 떠내고 밀어 넣으며 피부 속 골격을 들춰내듯 얼굴의 면을 좇고 면과 면 사이의 굴곡을 찾아들어가는 부단한 부다 작업의 결과물들은 이를 증명한다. 일견 하나의 표정으로 보여지는 심지어 동일해 보이는 이들 얼굴 연작들은 그러나 일정한 스토리가 있어 보인다. 그것은 타국에서 이방인으로서 매일 매일 경험하는 이질적인 문명에 대한 또는 공통의 관심사에 대한 지적인 관심이자 이방인으로서 경험하는 인간의 절대적인 고독이자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로 보인다. 따라서 그의 작업에서는 이질적인 시공간성, 현재와 과거 시점의 이동, 혹은 교차 그리고 동양과 서양의 차이와 간극, 이질적인 시공간에 대한 외로움과 설레임이 동시에 묻어난다. 마치 기계로 떠낸 듯 일정한 규칙을 보이는, 일견 간단해 보이는 그의 지난한 작업은 예술적 노동에 다름 아니다. 일찍이 예술을 인간 정신의 산물로 보았던 사람들이 보았다면 그의 작업을 예술로 인정하지 않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물론, 그의 작업이 손의 산물이라는 말이 아니라, 그만큼 그의 작업이 손맛이라고 하는 원초적인, 인간적인 느낌이 강하게 묻어나고 배어 있다는 의미다. 장력을 지닌 제법 견고하고 촘촘하게 직조된 구리망을 상대하는, 그것을 누르고 다스리며 형태를 잡아나가는 작업은 육체적 힘과 정신력이 상당량 소진되는 대단히 고된 과정이다. 고행을 마다하지 않는 황호섭의 작업 과정은 구도자(求道者)의 종교적 수행처럼 자신을 걷잡고 다스리는 일종의 자기수행 과정이라 하겠다.
작가는 무엇인가? 작업은 무엇인가? 정신은 무엇이고 손은 무엇인가? 동양은 무엇이고 서양은 무엇인가? 한국은 무엇인가? 한국인으로서 나는 누구인가? 파리의 한국인으로서 나는 무엇인가? 손가락과 손톱이 짓무르는 고된 과정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면서 수많은 상념들을 다스려나가는 황호섭의 태도는 마치 면벽을 하듯 캔버스와 구리망과 대면을 하고 그들과 부딪히며 그들 속으로 파고들어가 물아(物我) 존재 및 그 심연을 퍼올리는 일종의 종교적 실천이다. 황호섭의 이러한 행위가 얹혀지고 드러나는 캔버스나 구리망들은 모두 직조된 것들이다. 그가 꾸준하게 주목해온 혼돈이라는 개념이 아직 남아 있는 회화 작업과는 달리, 구리망으로 직조한 부처의 얼굴 작업은 마음속 수많은 다스림을 통해 도달한 해탈과 평안한 기운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 입체적 회화 작업이라 하겠다. 이러한 기운들은 2호 남짓한 작은 크기의 캔버스에 각각 나뉘어 담겨져 있다. 황호섭은 서울에서의 이번 전시를 위해 야심차게 대작도 준비했다. 작품의 크기와는 관계없이 이들 모두에는 공통적으로 부처의 얼굴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그것은 흔히 접하는 부처의 온화가고 인자한 이미지는 아니다. 부처의 얼굴 저편에 이런저런 지면과 매체 등에서 채집한 다양한 인사들의 얼굴 표정들이 자리 잡고 있다. 부처의 이미지와 중첩되어 읽혀지는 유명한 정치인, 영화배우, 대중 스타, 관능적인 여인들의 취하는 다양한 얼굴 표정들이 그것들로부터 경험할 수 있는 복합적인 메시지들과 함께 중층적으로, 병렬적으로 잠복되어 있다.
대통령의 이미지로부터 유곽의 나른한 여인들에 이르기까지 물리적․심리적 시공을 초월한 대중적 이미지들이 부처의 얼굴이라고 하는 제한된 공간 속에 작가 내면의 갈등구조와 함께 다중구조를 형성하며 오버랩되어 있다. 이들은 인간이 가지는 권력과 소유욕, 물욕 등을 망라하는 욕망기제들로 이해된다. 황호섭은 자신의 지난 삶에서 익명화시키고 은폐시켜 놓은, 혹은 유예시켜버린 이런 저런 사회적 모순과 과장된 욕망기제를 스스로 들춰내고 고발하거나, 혹은 파리의 이방인 내지는 주변인으로서, 프랑스현대사회를 살아오며 경험했던 삶의 다중적 애환을 비로소 조용히 고백하며 그들로부터 진정으로 초탈, 해탈하고자하는 자기 고백을 중의적으로 드러낸다. 이미 레테의 강을 건너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인물들도 추억하고 환기시킨다. 현재적인 시점으로 불러낸다. 마치 무당이 망자를 불러내듯, 주술적이고 제의적인 과정이다. 시공을 관통하는 중첩된 이미지들 속에 켜켜이 쌓여 있는 이런저런 이야기 거리들을 끄집어내고 환기시킨다. 오늘의 시제로 현현(顯現)하고 있다. 두드리고 구부리고 원하는 형상을 돌출시키고 뽑아내는 일련의 과정 역시 무당을 연상시킨다. 화면 속 흘러넘치는 욕망들과 함께 그의 에너지와 광기도 흘러넘치는 듯하다. 명예욕, 권좌, 세속적인 욕망, 부에 대한 집착 등이 부질없고, 덧없음도 지적하고 있다. 그의 작업은 마치 경구와도 같은 메시지를 담고 있다.
황호섭의 얼굴 작업에는 부처의 얼굴 이미지로 대표되는 자비로움과 영원한 신비 그리고 물질 만능 시대에 넘쳐나는 소비, 향락, 육체적 쾌락 등과 같은 찰나적인 인식과 기제에 대한 시각적 대비, 명백한 비판이 두드러진다. 그의 근작들은 이러한 가치 대립의 긴장 관계를 형식과 내용면에서 보다 직접적이고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물감을 긁고 벗겨내고 씻어내는 과정에서 드러나고 축적된 표정과 호흡들, 구리망을 직접 빚어내고 손으로, 온몸으로 꾹꾹 눌러가며 형태를 잡아나가는 일련의 과정은 시간이 오래 걸리는, 극히 지난한 작업 과정으로, 이들은 그동안 황호섭이 견지해온 작가적 태도를 미루어 짐작케 한다. 국내에서는 자주 볼 수 없었던 황호섭의 이번 서울 전시는 캔버스 위에 뭉개지듯 중첩되고 견고하게 퇴적된 인간 욕망의 더께와 그 덧없음, 채집된 얼굴 이미지들을 숨기듯 드러내며 품어 안고 있는 인자한 표정의 부처 얼굴들, 그물망 사이로 시시각각 교차하는 다양한 욕망들을 가까이서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시선에 따라, 위치에 따라 황호섭의 작업은 다양한 표정으로 말을 건넨다. 때론 요염하게, 때론 웃는 모습으로, 혹은 노려보거나 이상하리만치 슬픈 모습 등으로 다가온다. 보는 각도에 따라 수 십 가지의 표정 조합을 만들어내는 이 독특한 작업들은 므와레(moiré), 즉 일종의 시·공간적 착시 효과를 창출하며 보는 이의 시선을 잡아맨다. 보는 이의 심리 상태, 혹은 작품 속 이미지에 대한 이해 정도에 따라 그것은 각기 다른 세기로 다가오며 말을 건넬 것이다. 황호섭이 자신의 조형세계 속에 풀어 놓은 인간질서와 우주질서를 추체험(追體驗)해 보자. 세속과 영속에 속하는 이야기, 거역할 수 없는 세월의 도도한 흐름(flow)과 현실이라는 특정 시공(stock)을 교차하고 넘나드는, 재불작가 황호섭이 제시하는 동도서기(東道西氣)일 수 있고 서도동기(西道東氣)일 수도 있는 이 매력적인 장에 여러분을 초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