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남 - 사이에 스며들다.
이이남은 이번 전시‘사이에 스며들다’를 통해 동양의 고전, 서양의 고전 명화를 재해석한 작품 40여점을 비디오와 C-print 두 가지 방법으로 선보인다. 이번 작품들은 기존에 발표한 작품들의 연장선상에 있지만 더욱 다양해진 소재와 풍성해진 내러티브로 관람객을 만난다.
디지털의 힘으로 서로 다른 시공의 사이에 스며들다 : 이이남을 통해 만나는 겸재와 세잔
이이남은 디지털 기술을 이용하여 옛 명화를 재해석한다.‘디지털 기술은 신통하게도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 준다’고 이이남은 말한다. 그의 말처럼 다른 시간과 다른 공간을 뛰어넘는 불가능한 만남을 이이남은 디지털 기술을 이용하여 이루었다. 그가 지난 몇 년간 선보인 <모네와 소치와의 대화>는 시공간을 넘나드는 작품의 시작이었다. 여러 차례 작품의 내용을 발전시키며 단절된 시간과 공간을 연결하는 작업을 했고 마침내 모네의 <해돋이>와 소치의 <추경산수화>가 만나 교감할 수 있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보다 본격적으로 서로 다른 시공간을 매개하는 작품들을 선보인다. 신작 <겸재정선과 세잔>에서는 겸재가 1741년경 안개 낀 밤의 남산의 풍경을 그린 풍경화 <장안연월>과 세잔이 1904년경 그린 <생 빅투아르 산>이 만난다. 겸재의 산에 빗방울이 떨어지면서 세잔의 산이 오버랩 되고 작품은 시작된다. 겸재는 자연과 인간을 유리시켜 생각하지 않는 동양의 원근개념을 사용해 산을 그렸고 세잔은 인간이 중심이 되어 대상을 바라보는 서양의 원근법을 사용했다. 이런 시선의 차이는 동서양의 자연관과 사상을 반영하기도 한다. 하지만‘ 회화에는 두가지가 존재한다. ‘눈’과 ‘머리’이다. 눈으로는 자연을 바라보고 머리로는 표현수단의 기초가 되는 조직적인 감각 논리를 생각해야 한다’고 했듯이 세잔은 풍경 현장에서 눈으로 본 대상을 머리로 재해석하여 <생 빅투아르 산>을 그렸다. 이는 좋은 풍경에서 좋은 생각을 가지려 했던 가사여경(佳思麗景)의 동양 산수화들이나 겸재가 작품을 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세잔이나 겸재 모두 동일하게 실제풍경의 회화적 감동을 모티브로 삼아 화폭에 옮겼다. 두 화가는 각기 다른 시대에 다른 재료를 이용하여 다른 시선으로 작품을 그렸지만 결국 만물의 본질을 찾아가는 그 정신은 같았다. 이이남은 디지털 기술로 이 두 거장의 만남을 주선했다. 이 두 화가가 보여주는 시선의 차이와 감정적 유사성은 이이남의 영상 작업을 통해 극대화되었다. 시공의 사이에 스며들어 새로운 작품을 만든 것이다. 이이남에 작품에서는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이 만나고,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만나며 존재와 부재가 만난다. 이이남은 이처럼 단절된 공간과 시간, 결코 어울리지 않는 상반된 개념을 서로에게 동화되듯 조용히 스미듯 연결한다.
디지털이 소생시킨 절경과 조우하다 : 신-박연폭포, 신-몽유도원도
박연폭포는 폭포의 아름다움에 반해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찾으러 간 어머니가 죽자 아들인 박(朴)씨의 성을 빌어 그 이름을 지었다는 전설의 폭포이다. 또한 황진이, 서경덕과 함께 송도삼절이라 불릴 만큼 빼어난 절경을 자랑한다. 시원하게 흘러내리는 물줄기와 매우 맑고 투명한 폭포 아래 연못 물빛에 많이 예술가들이 매료되어 그 모습을 담았다. 이이남은 겸재의 걸작 <박연폭포>의 절경을 연출한다.‘쏴아’하는 소리를 내며 시원하게 떨어지는 폭포수, 아름답고 투명한 연못 등 이이남은 디지털 기술을 이용해 그 감동을 극대화했다. 개성이 아닌 서울에서, 18세기가 아닌 21세기 현재 우리는 6미터의 LED TV를 가로질러 떨어지는 박연폭포 물줄기의 장관을 눈앞에서 볼 수 있다. <박연폭포> 아래 선비들은 시원한 물줄기를 바라보며 담소를 나누는 등 상상하던 내러티브가 이이남의 작품을 통해 가시화되었다.
얼마 전 수만명의 관람객이 모으며 마지막으로 대한민국에 그 모습을 공개한 안견의 <몽유도원도>. 이이남은 그 원작의 감동을 모니터에 옮겨 담았다. <몽유도원도> 속 폭포에는 맑은 물이 쏟아지고 산과 들에는 알록달록 꽃이 피며 하늘에는 오색빛깔 예쁜 무지개도 등장한다. 이이남은 자신이 꿈꿔 온 몽유도원도의 이미지를 안견의 몽유도원도 속에서 재현했다. 디지털 기술로 재해석한 조선 최고의 고전 명화는 우리의 눈앞에 살아있는 파라다이스로 펼쳐질 것이다.
역사의 흐름속에서 시대를 이야기하다 : 09-금강전도, 신-단발령 망금강
고요한 금강산에 뭔가 심상치 않은 일들이 벌어졌다. 금강산의 산등성이에 첨단 미래도시가 나타나면서 흡사 전쟁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전투기가 등장한다. 수십대의 비행기들이 금강산의 하늘을 가로지른다. 어디서 강력한 폭탄이라도 터진 듯 하얀 연기는 뭉개 뭉개 피어난다. 이번 전시에 처음 선보이는<09 금강전도>의 스토리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금강전투도’라고 부르기도 한다. 금수강산의 상징 평화로운 금강산은 300여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안타깝게도 전쟁터가 되었다. 고전 명화 속 정지된 풍경은 그대로지만 시간이 흐르고 사는 사람들이 달라지면서 공간의 맥락이 다양해진 것이다. 이이남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정치, 사회적 상황이 변함에 따라 남북이 대치하는 전쟁기지의 상징성을 갖게 된 금강산의 모습을 마치 한편의 영화처럼 한 화면에서 보여준다.
아름다운 금강산과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버린다는 단발령. 한편의 시와 같은 풍경을 보여주는 겸재의 <단발령 망금강>풍경 속에도 세월의 흐름에 따라 자본주의가 피어났다. 이이남의 <신-단발령 망금강>에는 단발령과 금강산을 잇는 케이블카가 생기면서 그 소문을 듣고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도포를 입고 케이블카를 타는 사람들의 모습은 낯설고도 우습다. 이이남은 작품을 통해 한달음에 편안히 가고 싶은 옛 사람들의 이상을 실현시켜 주고 있다. 하지만 빨라진 속도와 산업화로 인해 자연은 훼손되었고 기다림이 미학은 사라졌다. 이이남의 작품은 이처럼 웃음을 자아내게 하면서도 무거운 질문을 던지곤 한다.
익숙함을 뒤흔들어 시선을 환기시키다 : 신-우는 소녀, 신-마를린 먼로
마르셀 뒤샹이 모나리자에 수염을 그리고 L.H.O.O.Q를 적어놓음으로서‘고전’의 권위에 도전했다면 이이남은 디지털시대에 가능한 방식으로 미술사가 부여한 권위와 명성을 환기시킨다. 팝아트 화가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의 상징은 바로 망점이다. 이이남은 리히텐슈타인의 <우는여자>속의 망점을 날려버림으로서 그 작품의 미술사적 가치를 삭제한다. 한편 이이남은 앤디워홀의 작품 <마를린 먼로>의 트레이드마크인 입술 위 점을 아주 천천히 이동시켰다. 너무나 당연하고 익숙한 위치의 사물을 서서히 이동시킴으로서 고정관념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미디어아트의 소통 방식에 새로운 장을 열다
미디어아트는 의례히 한정된 공간에서만 관람이 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다. 작품 상영을 위해 필요한 여러 가지의 기구들은 복잡하고 조작도 난해했다. 이이남은 미디어아트의 이런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고 마침내 새로운 방식을 찾아내기에 이른다. 단순한 송·수신기인 TV를 예술을 장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올해 초 5000대 한정판으로 삼성전자와 함께 진행한 LED TV 프로젝트는 기존의 미디어아트가 관람객과 소통하던 방식과 질서를 뒤집은 획기적 사건이었다. 이를 통해 관심은 있지만 가까이 하기에는 어려웠던 미디어아트는 TV에 내장되어 가장 일상적이고 편안한 공간인 거실에 파고들었다. 이이남은 이렇게 미디어아트의 소통방식에 새로운 장이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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