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언
필자가 조각가 김선구를 만나기 전부터 그의 이름은 알고 있던터이다. 그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일본 경마협회에서 공모한 국제 말조각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했다는 신문보도를 접하고서이다. 엄청난 금액의 상금도 그렇지만, 수상작품의 주제가 일반인의 예산과는 전혀 다른 것이어서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경마장에서 필요로 하는 말의 포즈는 당연히 박진감 넘치는 질주 모습이나 우승마의 의기양양한 모습이어야 당연한 것이거늘, 오히려 경주에 낙오하여 고개를 떨구고 의기소침해 있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승자의 이야기를 다루어야 한다는 통념을 깨고 패자의 이야기를 조각에 담았다는 것은 거의 전설 같은 이야기이다. 말조각의 종주국이라 할 만한 유럽의 쟁쟁한 작가들을 제치고 대상을 거머쥔 것이다. 유럽에서 말조각은 예나 지금이나 거의 인체조각에 필적할 정도의 비중을 지니고 있다. 아무튼 필자는 그때부터 작가를 승부사적인 기질의 소유자, 무언가 통념을 극복하고자 하는 도전적인 작가로 기억을 해 왔다.
김선구의 조각은 독특한 칼라를 지니고 있다. 인체나 동물 등의 대상을 표현함에 있어 그의 독특한 모델링 양식은 유례를 찾기가 어렵다. 일본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통념을 깬 도전으로 이룬 쾌거라고 말할 수 있지만, 더 근본적으로 작품 자체가 어필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어쩌면 유니크한 그의 작품 형식이 크게 호응을 얻었으면, 작품 속에 담긴 이야기는 덤으로 얹어진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패배자를 다룬 작품이라는 점에서는 내심 찜찜했는데, 작품 형식이 워낙 특출하여 화제작으로 띄울 만한 확신을 가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솔직히 필자는 후자일 것이라고 지금까지 믿고 있다.
정말이지 인체나 동물의 대상이 해부학적으로 분해된 것 같은 골격과 근육의 모습은 색다르다 못해 이질적이다. 보통의 경우 인체를 골격이나 근육 상태로만 표현했을 때 친숙하고 정감 있게 접근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러한 표현이 보통의 조각가들에게서 기피되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도 작가에게서는 절묘한 구성과 독특한 표현형식이 의외의 신선함과 묘미를 주는 것이다. 사실 인체라는 소재는 현대조각에서 식상한 것 혹은 진부한 것으로 치부된다. 그런데 작가가 다루는 인체에서는 그러한 부정적 인상이 지워지고 있다. 역시 작가만의 역량과 개성이 응축된 작업이 거두는 성과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김선구는 조각가로서의 재능을 타고났다. 대상의 사실적인 모델링도 그러하지만, 그것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노련하게 재구성 혹은 변형하는 감각도 타고난 것이다. 타고난 조형감각도 감각이지만 그에겐 역시 해부학적 이해와 순발력있는 응용력이 뒷받침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한 의미를 가질 것 같다. 해부학적 이해가 뒷받침될 때, 인체나 동물이 드러내게 될 포즈가 정적이든 혹은 동적이든 간에 자유자재로 빚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해부학적 토대 위에서 약간의 변형이나 재구성이 주어지는 순간 그 골격과 근육은 상상치도 못할 생명력과 약동감을 발산하게 된다. 변형과 재구성은 다분히 재능적인 감각과 관계하지만, 중요한 것은 역시 인체에 대한 깊은 이해와 경험 없이는 그 재능적 요소들이 발휘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한 해부학적 기초 위에 작가는 인체기본 요소들에서 조형의 출발을 하고 있다. 인체의 해부학적 기초위에 작가가 독특하게 삽입하는 것이 있다면 부드러운 선의 요소가 유선형으로 연결되면서 근육의 매스들을 연결해 주고 있다는 점이다. 그로 환원하여 볼 때 작품 내 매스들 간의 양념 혹은 촉매제와도 같은 역할을 하는 선조성으로서 작품 전체에서 리드믹한 음학적 역할을 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이렇게 독특한 형식을 가진 작가의 작업은 엄숙한 듯하면서도 일견 코믹해 보이고, 신중하고 심각한 듯하면서도 경쾌함과 산뜻함을 동시에 주는 묘미가 있다. 역시 작가의 작업은 역동적인 동작에 대해 상당한 장점을 지니고 있다. 달리기 출발을 하는 사람의 동작, 활을 쏘는 사람의 여러 동작들, 저돌적으로 돌진하는 황소의 모습 등에서 표현되고 있는 근육의 양상은 탄성을 자아낼 만한 것이다. 특히 댄서의 포즈를 표현한 작품의 경우 동적인 포즈와 정적인 포즈의 경계점에 있는 상태를 다룬 것으로 재치와 순발력이 돋보인다. 댄서의 자태와 용모가 화려한 의상에 의해서가 아니라 의상 속에 감추어진 대상의 신체성에 대한 정확한 포착에 의해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근작에서는 여러 가지 색다른 시도가 발견되고 있다. 우선 주목할 만한 대목은 작품에 무언가 다양한 메시지를 담고 싶어 한다는 점이다. 물론 이전의 작업에서 메시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군더더기가 없는 신체의 포즈 자체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메시지가 그것에 함몰되는 경향이 없지 않다. 그러나 그러한 한결 같은 양상에서 벗어나 비교적 여러 가지 양상의 작업들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형태의 명료성이 다소 은유적인 양상으로 생략되거나, 작품 표면이 마치 거푸집에서 막 주물을 꺼낸 것 같은 꺼칠한 효과를 보여주는 등의 다양한 시츄에이션이 서술되고 있는 것이 그 예이다. 특히 하나의 대상에서 복합적인 이미지를 중첩시키고 있는 표현은 작가가 확실히 전환적인 시기에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앉아 있는 포즈의 인체상을 중간쯤에서 절단하여 중간 부분을 제거하고 다시 접합하였을 때 아랫 부분에서 나타나는 층간이 주어진다. 그것은 마치 험산준령을 구비구비 걸치고 있는 고갯길이 잇는 모습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
한편 근작에서 작가가 야심적으로 시도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각면(角面) 조각양식이다. 작가 특유의 해부학적 신체구조를 종래의 곡선과 곡면적인 형태로 처리한 것과는 달리 입체적인 각면 처리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각면 양식은 역동적인 포즈와 맞물려 용솟음치는 에너지의 분출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이 역시 해부학적 감각이 없으면 어려운 대목이다. 게다가 공간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모델링 감각과 기량이 뒷받침 되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작품의 양식에서도 작가는 시사성을 반영한 메시지의 전달을 겨냥하고 있다. 물론 작가는 그러한 메시지들이 지나치게 설명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메시지는 어디까지나 작업 형식에 충분이 용해되어야 하며, 따라서 어떤 소통의 의도만이 앞서가는 방식의 설익은 표현은 작가 스스로 절제하고자 하는 철칙이다.
오랫동안 작가를 지켜 본 필자는 그의 작업을 접할 때마다 그가 천부적인 조각가라는 생각을 갖는다. 탄탄한 모델링 기량, 개성적이고 독창적인 양식, 왕성한 에너지, 작업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근성, 승부사와도 같은 작업에 대한 집중력 등을 볼 때 그야말로 흠잡을 데가 없는 작가이다. 사실 오늘날 조각계 전체를 볼 때 모델링 기량이 저하되고 있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하고 있다. 물론 조각이 모델링만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모델링이 있을 때는 잘 느껴지지 않을지라도, 그것이 없을 때의 공허와 빈곤은 유난히 두드러진다. 바로 오늘의 우리 조각계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을 감안할 때 김선구의 존재가 곧 우리 조각계의 저력의 상징이라 말하면 지나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