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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젊음의 거리 홍대 주차장 길에 개관한 갤러리나비는 신진작가 성장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9명으로 구성된 Traumatic ART 팀의 (구본석, 김정훈, 김한영, 배 빛, 신병준,윤보라, 윤부진, 이윤정, 이지혜) <TRAUMA>展을 개최합니다.


트로매틱 아트 - 외상적 예술.

“외상적 예술”이라 이름 붙여진 아홉 명 신진작가들의 전시. 타이틀이 표방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짚어보려 한다면 정신분석적 접근을 하지 않을 수 없겠다. 정신분석은 트라우마, 즉 외상이란 것을 과거에 남겨진 심리체계 속의 상처로 정의한다. 트라우마는 자아가 통제할 수 없는 사건으로서의 충격을 겪게 되는 의식이 이 경험을 억압하면서 발생한다. 이러한 억압은 물론 자아의 고유한 자기보호기능이다. 우리가 흔히 의식이라 부르는 것은 자신의 연속성과 안정성을 위협하는 모든 것을 통제하고 억압하는데, 과도한 성적 충동은 이러한 자아의 의식에 상당히 위협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대체로 트라우마라는 것은 이러한 성적 충동의 통제 불가능한 출현에 대한 방어 이후에 남겨지는 어떤 상흔인 것이다. 사실 이정도 설명이라면 외과적 개념의 외상과 별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충격이 있었으니 그에 대한 면역체계의 방어가 있을 테고 상흔이 남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라캉적 정신분석은 외상이 사실상 인간 문명을 정초하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갑작스런 비약으로 이해될 수도 있는 이러한 명제는 다음과 같은 설명에 근거한다. 즉, 외상이란 것은 상처로 남아 있는 어떤 결절의 지점인데, 이러한 결절, 파열, 통제 불가능의 지대가 있었다는 사실은 그자체로 인간의 의식 전체를 위협한다. 즉 다시 말해서 인간의 의식은 스스로 안정을 추구하는 현실원칙을 따르는 것이며, 이러한 원칙은 통제와 방어라는 의식의 기능들이 작동되도록 하는 근거가 된다. 그런데 통제 불가능의 사건에 대한 기

억은 이미 자아의 통제기능 자체를 문제시하게 되는 계기로 남는 것이다. 

따라서 벌어진 상처의 흔적은 아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를 끝없이 위협하는 불확실의 지대로 남아있게 된다. 한 인간의 의식 또는 인간의 문명 전체는 바로 이러한 상흔의 존재를 은폐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화려한 존재자로서의 유희를 펼쳐나간다. 이렇게 의식은 스스로가 와해될 수도 있다는 트로매틱한 경험의 기억을 억압하면서 만이 스스로의 완결성이라는 환상을 유지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트라우마에 대한 해석이 이러하다면, 이번 전시에서 모인 아홉 명의 작가들이 추구하는 바가 선명히 드러날 수 있겠다. 그것은 우리 의식의 투명한 지대가 억압 하고 있는 파열의 지점으로 접근해 가려는 것이 아닐까. 재현체계의 견고한 구조내부에 사실상 존재하는 검은 동공으로, 그 심연으로 하강하려는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서 그들은 존재자로서의 인간의 익숙한 구조가 아니라 그 구조가 감추고 있는

아주 오래된 상처-트라우마의 핵으로 접근해 가려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해서 이들이 추구할 수 있는 목표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 사유 구조의 외부를 욕망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주체라는 구조가 스스로를 폐쇄시키면서 억압하는 많은 것들을 해방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만일 인간의 사유가 폐쇄적일 수밖에 없다면, 그것은 앞서 언급한 자아의 통제와 억압의 원칙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술이라

는 실천이 이러한 폐쇄구조로부터 존재를 열어젖힐 수 있는 시도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이번 전시가 추구하는 것, 혹은 던지려하는 질문이 바로 그것이다.

김한영 작가의 절단되고 분절되어 더 이상 거울일 수 없는 거울의 유희는 이러한 폐쇄된 사유의 어긋난 지점들, 파열의 흔적들을 드러내려는 시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거울이 자기 정체성에 대한 나르시시즘적 인식을 상징하는 사물이라면, 이에 대한 물리적 해체는 그 자체로 외상적 경험을 형성한다. 거울단계라고 라캉이 명명한 단계 이전의 해체된 신체적 동일성의 지점으로 시각 경험을 역행시키는 것이다.

촘촘한 압정으로 사물의 표면을 뒤덮는 퍼포먼스를 통해 윤부진 작가는 기표체계라는 비인간적 상징구조의 반복적 속성이 어떻게 사물에 대한 억압을 실행시키는 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언어의 상징계적 구조는 사물의 표면을 재기(over-writing)한다. 마치 재봉틀로 표면을 수놓듯이 기표의 연쇄는 사물의 표면을 뚫고 들어와 의미를 각인시키는데, 이것이 바로 윤부진 작품의 제스츄어가 퍼포먼

스 하는 것이다. 사물은 문자 그대로 기표의 무수한 반복에 뒤덮여있다. 수천 개의 압핀이 상징적 거세의 무한 반복을 다시 반복하고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의 기표반복은 오히려 의미를 지우고 있다는 것.

구본석 작가가 밤의 도시 위를 수놓듯이 배열하는 화려하게 반짝이는 핫픽스들의은하수는 역시 기표-또는 재현체계가 가진 표면성과 그것의 환영적 차원을 매혹적으로 보여준다. 앞서 언급한 윤부진의 작업과는 동일한 구조를 취하면서도 전혀 상반되는 효과로서 기표와 기의의 관계, 재현체계의 물성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허상의 관계를 절묘하게 드러내고 있다.

또한 이지혜 작가의 자화상 이미지는 자아의 통제를 벗어난 지점, 즉 무의식의 심연에 정박하는 자아의 탈-자아된 신체의 표면 - “표정”을 드러냄으로써 외상과 마주한 존재의 탈주체화된 형상을 전통회화의 기법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김정훈 작가가 죽어가는 연체동물들의 꿈틀거림으로부터 얻어낸 검은 물감 흔적들역시 죽음이라는 개념 너머에 존재하는 심연, 인간이 결코 견뎌낼 수 없는 절대적“무”의 공간을 하나의 흔적으로 암시해 내려는 역시 “트로매틱”한 시도가 돋보인다.

반면, 윤보라 작가의 팝-이미지 작품은 그것이 언제든, 누구로 부터든 해체 가능하며 다시 재조합 가능하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그러한 구조의 이미지가 원더우먼이라는 팝 아이콘을 겨냥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시대의 환상과 그에 대한 해체의

시도를 통해 사회적 집단 환영의 불안정한 구조를 패러디하고 있다.

신병준 작가는 세밀한 계산을 통해 지구본을 정사각형의 형태로 “전이” 시킴으로서역시 우리 의식의 시스템이 기능하는 원리를 교묘하게 뒤틀어 보여준다. 원구의 지구본이 정확하다는 판타지는 정사각의 지구본 역시 정확할 수 있다는 패러디를 통해 해체된다.

배 빛 작가의 꽃 이미지는 사실 그것이 하나의 소멸, 즉 종이 소재를 불태워 없애는 과정을 통해 드러나는 아름다움이라는 점에서, 더해지고 쌓아나가는 연속성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파괴의 흔적을 더듬어 표현해 내는 외상적 아름다움이다. 파괴라는 과정을 감추고 피어나는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외상을 은폐하는 아름다움이다. 그것은 화려할수록 외상적 심연을 더욱 돋보이게 할 뿐이다.

이윤정 작가의 작품 역시 모순된 이미지들을 같은 공간에 배치하는 평면 이미지의 구성을 통해 나름대로 해체나 역설 등의 감성에 접근하는 듯 보이다.

이번 전시는 이렇게 저마다의 다양한 개성을 출발점으로 해서 의식과 자아의 통제에 대한 거부라는 외상적 상태를 향해 수렴하는 궤도를 그려내는 기획전이다. 그들의 다양성은 트로매틱 아트라는 기획을 초과하는 개별성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이러한 다양성은 오히려 트라우마의 양상에 대한 다양한 변주를 경험토록 해주는 효과를 산출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번 전시를 일단의 젊은 작가들이 미지의 것, 외

부, 숭고를 욕망하는 자신들 만의 미학의 윤리를 정초해 내려는, 현대 미술 속에서의 하나의 외상적 사건으로 간주해도 좋을 것이다. 그들의 작품은 "외상적" 예술을 실천하려는 오늘의 "아방가르드"가 고군분투하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조금의 부족함도 없기 때문이다.

글. 백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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