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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권 목판화전

  • 전시기간

    2010-10-06 ~ 2010-10-19

  • 참여작가

    김준권

  • 전시 장소

    나무갤러리

  • 문의처

    02-2011-1995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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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선각 목판화와 일본의 다색목판화 우키요에, 그리고 중국의 수인판화를 익힌 작가의 2007-2010 4년간의 작업을 전시

먹으로 찍어낸 허정虛靜의 산수미山水美
김준권의 2007~2010년 수묵목판화


이태호李泰浩 |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교수





1.

지난 8월 중순에 김준권金俊權 선생의 한국목판문화연구소를 방문했다. 충청북도 진천군鎭川郡 백곡면栢谷面 사송리沙松里 두주마을에 위치해 있다. 유난히 무덥고 비가 오락가락 하던 날이었다. 진천 지역의 납작납작 둥그스레한 능선들이 김준권의 산 그림에 보이는 푸근한 형태와 몹시 닮아 반가웠다. 작업실은 잣나무골 솔밭이 우거진 두주마을에서 맨 꼭대기 산중턱의 전망 좋은 터였다.
이곳에 오르니 주변 숲과 산세가 영락없이 최근 김준권의 브랜드로 정착한 수묵목판화 〈산에서〉나 〈숲에서〉 연작과 유사하게 전개된다. 진천에 살면서 눈에 익은 산 능선으로 한국적인 산 이미지를 창출해낸 셈이다. 김시천 시인은 김준권의 그런 마음 속 마을 풍경화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읊었다.

사람사는 마을에서 김준권을 만났다.
그가 사는 마을에는 언제나 바람이 불고
허리 굽은 늙은 소나무와 함께
……
그는 언제나 그가 사는 마을을 눈 속에 넣고 다녔으며
마음속에 고여 출렁거리게 하다가
달 좋은 날 숲 속 빈터에다가 내려놓곤 하였다
……
가끔 그가 집을 떠나 비인 동안에도
사철 해가 뜨고 지는 그가 사는 마을의
작은 언덕빼기 외딴 집 뒤에서는
진한 송진 냄새가 났다.

진천鎭川은 예부터 ‘생거진천生居鎭川’이라 하여 사람이 태어나 살기좋은 터전으로 손꼽힌다. 비산비야非山非野이면서 인심좋고 풍요로운 탓이다. 진천의 풍경을 훑어보니, 장엄한 능선들이 펼쳐진 지리산이나 암석미岩石美가 화려한 금강산과 비슷한 산세도 없다. 드넓은 지평선의 김제 만경과 같은 평야도 없다. 그야말로 비산비야의 풍광이다. 사람들이 산들내를 끼고 마을을 이룬, 우리나라 땅의 가장 전형적 공간이 아닐까 생각된다. 살면서 친근한 경치가 그저 사랑스럽다고 할 만한 곳이다. 여기에서 김준권이 그 자연과 더불어 판화예술을 꽃피운 것을 보면, 김준권은 ‘생거진천’의 진면목을 증명하는 좋은 사례이다.
살아 있을 적 만이 아니고 진천은 사후에 지낼 터로도 좋은 곳인 모양이다. 문백면 도하리에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문인화가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1712~1791)의 묘소가 있다. 덕분에 참배하고 그를 기리는 시간을 가졌다. 소탈한 필치의 산수ㆍ화조ㆍ사군자 등을 즐겨 그린 문인화가이자 비평가이다. 단원 김홍도를 키운 스승으로 유명하다.

소요하고 사색하는 숲과 산의 자연환경, 먹고 자고 독서하고 수묵화를 연습하는 생활공간, 목판화를 새기고 찍는 작업장, 그리고 작품을 모아놓은 갤러리. 상당히 너른 두채의 연구소 건물은 내외부가 모두 정갈하기 짝이 없다. 판화 공방이라기보다 독서량이 상당한 스님의 선방禪房에 들어선 듯한 인상마저 풍긴다. 김준권의 깔끔한 성품과 수성ㆍ다색판화 작업의 정교함을 수긍케 하는 공간이다. 지난 20년동안 김준권이 이곳에서 청정한 솔내음을 호흡하며 도를 닦듯이 판화작업을 수행해온 노고가 머리에 그려졌다.





2.

김준권이 진천에 작업실을 마련한 것은 1991년 가을이었다. 작업에 몰두하고자 하는 열망을 실현하기 위함이었을 게다. 민주화운동으로 패기 넘치고 험난했던 1980년대가 막 지난 시점이다. 1991년 봄 명지대 강경대 열사의 장례식을 마친 뒤였다. 그때 김준권은 민족미술협회 사무국장을 지냈고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았다. 당시의 선후배들은 모두 김준권을 미술운동의 조직을 성실하게 꾸린 살림꾼으로 기억한다. 진천에 정착하여 그 피로감을 씻고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한 것은 1992년 봄부터였다.
1980년대 김준권은 교사운동을 하다가 민중미술운동에 뛰어들었다. 참교육운동에서 미술교육과 민족적 정서의 결합을 모색했다. 1982년부터 방학이면 임실이나 남원 등 전라도를 쏘다니며 스스로 풍물굿을 배웠다고 한다. 학생들과 함께 전통적 리듬에 따른 조형미를 추구했고, 공동체놀이로써 미술교육의 방향을 설정하였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뜻 맞는 동료 교사들과 함께 연구회를 꾸렸고, 먼저 교사를 위한 풍물과 판화 강습 그리고 문화 강좌들을 마련하였다. 동시에 당시 민중작가들과 마찬가지로 민화나 불화와 같은 전통회화와 판화에 관심을 기울였다. 서양화를 공부한 유화작가의 변신이었다. 시민군을 그린 〈상像-오월광주〉(1982)를 비롯하여 인물화와 초현실적 분위기의 작품들로 꾸민 유화개인전(1984) 이후, 리얼리즘 판화작업으로 전환하여 지금까지 일관해온다.

교사운동 시절 〈태극도〉〈나는 밥이다〉(1985) 등을 시작으로 〈하늘과 땅〉(1986), 〈선재동자〉(1986), 〈만복도〉(1986), 민주교육ㆍ민족교육의 〈사師〉(1987), 〈상생도〉(1987), 〈대동세상〉(1987), 〈새야새야〉(1987), 〈대동천지굿〉(1988) 등을 선보였다. 고무판이나 목판에 새겨 찍은, 교육 현장의 민주화 요구와 조국통일의 염원을 담은 작품들이다. 흑백 판화외에도 여기에 채색을 곁들인 작품들은 차후 다색판화의 밑거름이 되었다. 짙은 우울이나 분노, 저항과 상생을 힘진 칼질로 현실감 넘치게 실어냈다. 태극이나 문자도 같은 전통도상과 민화나 불화의 서사적 구성방식을 패러디하고, 신명을 춤사위로 형상화해낸 작품이 많다. 판화쟁이로 타고났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목판화에 전력을 기울였다. 교사운동으로 강제 퇴직된 이후 복직 기회를 포기하고 판화 작업에 몰두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도 그렇다.
1980년대 말부터 김준권은 흑백 목판화에 채색하던 기법에서 다색판화로 눈길을 돌렸다. 1989년 〈봉천동1,2〉에서 자신이 살던 달동네 풍경을 청회색과 담홍색 다색판화로 시도한 바 있었다. 그 이후 다색목판화를 적극 활용한 것은 1991년이다. 〈엉겅퀴〉〈태백겨울〉〈지리산겨울〉 등과 더불어, 〈조개등〉〈두고 온 고향〉〈붉은 산〉〈소나무〉등 목판에 채색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1980년대가 요구하던 소재에서 벗어난 풍경화들이다. 이 작품들은 학고재 화랑에서 마련한, 민족미술협회 사무국장을 지낸 홍선웅ㆍ김준권ㆍ유연복 3인의 판화전에 출품되어 주목을 끌었다. ‘갈아엎는 땅’이라는 제목의 전람회였다.
〈조개등〉이나 〈붉은 산〉과 같은 작품은 민주화운동의 열기가 가신, 그러면서도 민족민주운동의 성과를 손에 쥐지 못한채 스산했던 당대의 정서가 물씬 묻어난다. 갈아엎을 땅의 풍경인 셈이다. 민중운동과 교육민주화에 대한 신념을 내 땅 대지에 대한 비장함으로 되새겨낸 듯한 감명도 준다. 먼 산이나 밭언덕을 배경으로 삼아 근경에 엉겅퀴나 소나무를 화면 가득 배열한 구도가 즐겨 활용된다. 땅으로 눈높이를 맞추어 낮게 우리 풍경을 바라본 시점이 역력하다. 더불어 그가 태어나 자란 영암의 들녘 고향풍경을 추억하였다. 김준권의 고향은 남도의 작은 금강산이라 불리우는 월출산 자락이다.




3.

5~6년간 판화작업에 집중했던 김준권은 자연스레 우리의 전통목판화에 관심을 쏟는다. 한국의 전통목판화는 그 역사가 깊다. 잘 알다시피 우리 목판화의 특성은 선묘 위주로 수묵의 사용에 있다. 신라말 화엄사 서탑에서 출토된 탑다라니, 고려중기의 팔만대장경 변상도變相圖 판화, 조선후기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 등 단색조의 판화는 불경이나 유교경전 등 인쇄문화와 함께 발달하였다. 1980년대 후반 필자는 틈만나면 목판화가들에게 우리식 전통의 먹으로 찍는 기법을 찾아보라 권유했고, 무조건 수묵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좋지 않겠냐며 독려하기도 했다.
김준권은 팔만대장경이 모셔진 해인사를 먼저 찾는다. 1988년에서 1989년 사이 해인사에서 이중호 선생을 만나 팔만대장경의 선각 변상도를 찍어내는 수묵 인화기법을 배웠다. 번지지 않게 찍기 위한 먹의 제조법과 판화를 인출하는 바렌으로 머리카락을 사용하는 방식등을 전수받았다.
초기 작품부터 흑백판화에 채색을 얹었듯이, 유화를 전공한 김준권은 본디부터 다색판화에 관심이 컸다. 그런데 우리 전통목판화는 미세한 선묘의 선각기술이 빼어난 반면에 다색판화가 시도되지 않았다. 결국 김준권은 1989년 가을 일본으로 건너갔다. 에도江戶시대부터 발달한 수성 다색목판화 우키요에浮世繪를 공부하러, 동경의 아타치판화연구소를 방문했다. 3대에 걸쳐 우키요에를 제작해온 전통적인 장인의 공방이다. 이곳에서 김준권은 다색판화 제작기법과 수성으로 찍는 수묵채색 인화기법을 직접 확인했다. 1991년의 〈설곡雪谷〉〈지리산 이야기〉〈노고단에서〉〈사북에서〉등 다색목판화에는 수묵선묘와 어울린 미묘한 담채톤의 우키요에 화법이 엿보인다.
또한 김준권은 수성 판화와 다색목판화 기법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1994년 중국에 갔다. 심양審陽의 노신미술학원魯迅美術學院 연구원으로 유학한 것이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명明ㆍ청淸시대부터 수성 다색판화가 발달하였다. 20세기 전반에는 격동의 역사속에서 그 민족현실을 새긴 흑백목판화가 주축을 이루었고, 후반에는 전통형식을 계승한 다색목판화와 수묵의 번짐효과를 내는 수인판화水印版畵 기법이 유행하면서 대중성을 얻었다. 1980년대 중반 중국의 현대 수묵화와 더불어서 그러한 목판화 작품들이 소개되어 우리에게 자극을 주기도 했다.
김준권은 노신미술학원에서 우리로 치면 석사과정을 밟은 셈이다. 헌데 노신미술학원에만 머물지 않았다. 중국의 전통 다색목판화인 수인판화를 탐구하기 위해 전국의 원로 판화작가들을 만나러 다녔다. 사천성四川省의 흑백판화, 절강浙江ㆍ강소성江蘇省의 전통적인 다색판화와 현대의 수인판화를 눈여겨 봤다. 수인판화는 중국인들 사이에서도 그 비법을 잘 공개하지 않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 어려움을 딛고 김준권은 중국의 주요 수인판화 작가들을 찾아 발로 뛰었다. 중국의 북방 수인판화인 두꺼운 종이에 찍는 다색판화 기법과 남방의 얇은 종이에 찍는 수묵의 번짐기법을 익혔다.
그러면서 자신의 취향에 따라 천진天津을 중심으로 형성된 북방 수인판화기법에 관심을 쏟았다. 그 성과로 1995년 12월 노신미술학원 미술관에서 김준권 목판화전을 갖기도 했다. 이때 다색목판화의 실력을 인정한 노신미술학원은 김준권을 1996년부터 명예 부교수로 임명했을 정도이다. 특히 천진에서 조해붕趙海鵬 선생과 교분을 두터이 하였고, 그곳에 자신의 판화작업장을 마련했다. 귀국하여 1997년에는 진천 백곡에 한국목판문화연구소를 열었다.
이처럼 김준권은 한국의 선각 목판화와 일본의 다색목판화 우키요에, 그리고 중국의 수인판화를 배웠다. 동아시아의 목판화 기술을 다각도로 섭렵했다. 형상새김과 다색판 제작은 물론이려니와, 종이에 수성 안료를 찍어내는 인화印畵의 기술을 거의 완벽하게 터득했다. 김준권의 판화작업이 물올라 자칫 딱딱해지기 쉬운 흑백 목판화의 한계를 딛고 회화적인 맛을 한껏 살려내게 된 것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전반까지는 수묵과 채묵彩墨의 수성판화보다 다색목판화가 주축을 이룬다. 물론 유성의 다색목판화도 수성판화의 감각을 살린 작품들이 대거 제작된다. 1996년의 〈노방자老房子〉〈수향水鄕〉〈동호東湖〉〈소흥紹興에서〉 등 중국의 현지를 담은 목판화, 귀국한 이후 전국을 여행하면서 스케치한 풍경판화 작품들이 그러하다. 1990년대 초반 풍경화들의 스산함이나 비장함을 떨치고, 밝고 명랑함을 채색한다. 날카로운 칼맛과 따스한 수묵농담이나 채색이 그같이 중화를 이룬 점은 김준권의 낙천적 기질과도 무관하지 않을성 싶다.
1990년대 후반 이후 진천에 은거하면서도 전국 각지의 평범하고 아름다운 터를 섭렵하였다. 〈백곡에서〉〈명암리의 겨울〉(1996)에서 시작하여 남도, 제주, 동강, 월류봉, 화원반도, 피아골, 북한강, 금강산, 장흥, 강진 등 곳곳에 발길이 닿았다. 머릿속에 남은 우리나라 풍경의 전형적 형상들을 재창조했고, 화사한 꽃비부터 흰 눈 쌓인 겨울까지 사계절을 담았다. 색채의 현란함과 함께 형상의 다채로운 표현이 눈에 띈다. 근경의 솔밭 풍경들을 대거 찍었고, 〈엉겅퀴〉에 이어 민들레, 매화, 패랭이, 조팝나무, 미류나무 등을 근경에 둔 산언덕이나 강변, 논밭풍경들은 김준권의 다색판화기법을 자랑했다. 이들 다색판화는 화사한 꽃마음이나 그리움, 대지의 청량감을 담아 상당한 대중적 인기를 끌었다.
2000년대 들어 〈터-새싹〉〈6월의 아침〉〈푸른 언덕〉〈미루나무 마을〉〈철새를 따라〉〈석야夕野〉〈겨울 산마루〉〈겨울이야기〉(2003),〈꽃비〉(2004),〈청보리밭에서〉〈7월의 아침〉〈새벽강가에서〉(2005), 〈그리움〉〈열정〉〈먼 훗날〉〈새아침〉〈핀크스-낙원樂園〉(2006) 등이 제작되었다. 작품제목부터 우리 강산의 서정을 읊으려는 의도가 역력하고, 윤기 넘치는 해맑은 감성이 담겨 있다. 능란해진 기술과 함께 대상에 대한 애정과 자연의 서기瑞氣를 읽는 인간적 성숙을 선명히 드러낸다. 이러한 경향은 〈산운山韻〉〈숲에서〉〈꽃비〉〈청보리밭〉〈소나무처럼〉등 최근의 수묵이나 채묵목판화까지 유지된다.
이들과 달리 단순한 형상미와 수평구도의 〈갈대〉〈갈숲 지나서〉(2002) 같은 수묵목판화는 김준권의 커다란 변화를 예고하는 듯하다. 2004년의 제주도 〈오름〉 연작부터 수묵과 채묵의 수성 목판화를 작업의 중심으로 삼으면서 그런 성향이 뚜렷해진다. 이는 2009년 ‘산기수심山氣水心’이라는 타이틀로 개인전을 가진바 있다. 타이틀에 걸맞게 수묵목판화로 담담하며 깊은 맛의 한국적 산수화풍을 완성해낸다. 우리식 수묵목판화 기법을 토대로 일본의 우키요에와 중국의 수인판화를 배워 수성 목판화의 새 지평을 열었고, 김준권표 판화세계를 이루었다. 이로써 김준권은 명실공히 동아시아 세 나라의 판화 기법을 통합한 현대목판화가로 우뚝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4.

맑고 서늘하다. 목판에 새겨 먹으로 찍은, 종이에 스민 물맛이 담아淡雅하게 다가온다. 최근 김준권이 다색판으로 인화印畵한 수성水性 목판화의 첫인상이다. 수묵 농담변화의 담백함이 소쇄瀟灑한 풍경들과 어울려, 차라리 한 폭의 수묵산수화를 우려낸 듯하다. ‘산’과 ‘섬’에 관련된 연작으로 수묵水墨이나 채묵彩墨의 수성 목판화가 각별히 그런 느낌이다.
산과 섬은 텅 빈 하늘에 낮게 내려앉은 자태이다. 그 풍경에는 적막함이 감돌고, 허정虛靜한 공간과 단순한 조형미가 돋보인다. 화면은 고요하고 넓어 요활寥豁하다. 간혹 풍경속에 등장하는 큰새나 새떼조차 소리없이 움직이는 듯하다. 묵음?音의 선미禪味가 물씬하다. 옛 문인화의 사의적寫意的 수묵산수화풍을 연상시킨다. 농담변화의 능선이 겹겹한 산세는 전통적 문인화의 ‘임리淋?’하다는 분위기와 딱 맞아 떨어진다.
김준권이 찾은 이런 풍경의 이미지는 또한 마음에 담은 산수를 표현한다는 ‘흉중구학胸中丘壑’의 전통적 산수화론에 근사하다. 마치 동양 전통산수화론의 고전인 북송대 곽희郭熙의 주장대로 ‘임천林泉의 마음’으로 풍경을 바라보고 그려낸 것 같다. 그래서인지 곁에서 본 김시천 시인은 앞서 언급했 듯이 ‘그는 언제나 그가 사는 마을을 눈 속에 넣고 다녔으며 / 마음속에 고여 출렁거리게 하다가 / 달 좋은 날 숲 속 빈터에다가 내려놓곤 하였다’라고 증언한 바 있다.

김준권의 마음산수를 담은 수성 목판화는 2004년의 〈오름〉연작에서 시작하여, 지난 7년여 진천 백곡의 작업장에서 수련한 결과이다. 특히 2007년 이후 80점이 넘는 이번 전시 작품들은 김준권 판화예술의 정화精華로 꼽을 만하다. 동양적 문인화론에 근접한 심화心畵 와 한국적 산하의 이미지 찾기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완만한 곡선의 산 능선과 층층이 중첩한 심협深峽의 실루엣은 우리나라 노년기 지형의 특징을 잘 살린 리듬과 형상미이다. 안개속의 강변, 숲, 섬의 표정 역시 마찬가지이다. 김준권은 새벽이나 아침, 저녁놀, 비안개나 눈 내리는 시간을 즐겼다. 그리고 이들 풍경의 마음을 읽고 사생해왔다.
또한 최근의 작품들은 마음에 품은 산하의 한국적 조형미가 수성으로 찍어내는 기술과 거의 완벽하게 통합되었다고 여겨진다. 인화印畵 맛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단단하지도 무르지도 않으면서 섬세하게 물길을 적절히 받는 판목을 선택한다. 우리나라에서 자란 은행나무, 피나무, 버드나무를 주로 쓴다. 동시에 화선지의 선택도 까다롭다. 부드러운 먹이나 수성안료의 농담변화를 보면, 고도의 찍는 기술을 갖추었다. 그러면서도 자연스레 먹이 살짝 엉기거나 물기의 흔적을 남기는 여유에는 김준권의 무심함이 묻어난다. 손으로 찍었다라기보다 마음으로 찍은 심인心印의 단계에 오르지 않았나 생각들 정도이다.




5.

2007~2010년 4년간의 작업이 84점이면 그리 많은 양은 아니다. 헌데 한 작품당 판목이 대여섯장 혹은 10장이 넘으니 5~600여장 이상의 나무판을 새기고 찍는 복잡한 공정이 필요하다. 얼핏 비경제적이다 싶기도 하다. 그런 탓에 목판화 작업을 끝까지 유지하는 작가가 드문 편이다. 그럼에도 김준권이 이 일을 즐기는 걸 보면, 진정 타고난 판화쟁이 맞다. 요즈음 관심을 쏟는 2m 남짓 혹은 2m가 넘는 대작의 수묵이나 채묵목판화도 눈길을 끈다. 대자연의 웅혼함이 돋보인다. 마치 태고의 땅이 열리듯 상서祥瑞로운 분위기마저 감돈다. 더불어 세폭이나 다섯폭의 병풍그림처럼 구상한 작품들은 우리 산하를 모두 품으려는 듯한 김준권의 의욕이 넘쳐 있다.
〈산에서〉 연작들은 분명 김준권 목판화의 백미일 게다. 이같은 회화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관념화가 진행된 점을 떨칠 수 없다. 연구소 갤러리를 둘러보고 난 뒤 그런 생각이 퍼뜩 스쳤다. 단순화한 유사형상의 동어의 화법이 때로는 지루한 느낌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이들에 비해 근경의 짙고 큰 능선에 딸린 투명하고 오롯한 〈오름〉들(2004~5)의 수묵목판화, 남쪽바다에서 올려다 본 장흥 탐진강의 〈천관산天冠山〉〈정남진正南津 기행〉(2008)의 수묵목판화, 그리고 〈강진만에서〉와 강진만 〈까막섬〉(2010)의 채묵목판화는 별격의 감흥을 던져준다.
수려한 암산으로 천자의 면류관을 닮았다고 해서 이름지어진 〈천관산〉을 막 터지기 직전의 연꽃 봉우리 모양으로 구상한 형상화가 아름답다. 작업실 안에서 반복한 구성보다 새로운 장소에서 새 형상을 창출하는 모범을 보여준다. 농담 변화의 맛을 섬세하게 살린 회화성은 김준권의 수묵목판화를 대표할 만하다.
김준권의 수성 다색목판화는 한국 현대산수화의 방향을 제시할 만큼 독보적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조선후기 진경산수화의 겸재 정선이나 단원 김홍도를 계승한 조형미를 떠오르게 하여 반갑기 짝이 없다. 현실의식을 기반으로 하는 국토사랑, 부지런한 발품, 생거진천의 땅에서 받는 에너지, 50대를 넘어선 판화기술과 예술적 완숙, 한 작품에 대여섯판 이상 파고 찍는 강도 높은 노동을 감내하는 장인정신 등 여전히 건강하다. 김준권이 지금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지 않나 싶다. 앞으로도 상당기간 생동生動하는 기운氣韻을 유지할 것 같다. 우리 시대 동아시아를 넘어 세계적인 목판화의 대표작가로 평가되리라 확신한다.



김준권 : 목판화 2007-2010

2010.10.6-10.11
인사아트센터 B1
110-300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 B1
Tel 02.736.1020

2010.10.6-10.19
나무화랑
110-300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5 4F
Tel 02.722.77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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