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충환
꿈꾸는 도시(2007, 스페이스 아침), 꽃피는 도시(2008, 안단테 갤러리), 그리고 태양의 도시(2010, 예술의 전당)에 이르기까지, 류신정은 근작에서 일관되게 도시라는 특정 주제에 천착한다. 일종의 도시생태학으로 범주화 할만한 이 주제의식을 매개로 작가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도시의 생리적 지도를 그려나가는 한편으로, 이를 통해 개별적 경험의 경계를 넘어 보편성을 획득한다(도시는 우리 모두가 몸담고 있는 삶의 장이기도 하다).
외관상 이 주제들은 밝다. 꿈꾸는, 꽃피는, 빛으로 환한. 그런데 정작 이 밝은 어휘들은 그 이면에 어둠을 숨기고 있다. 일종의 반어법으로 읽으면 된다는 것이며, 나아가 그렇게 읽을 때에야 비로소 그 속뜻이 드러나 보인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도시는 사실은 더 이상 꿈을 꾸지 않고(혹은 꿈을 꾸지 못하고), 꽃을 피워내지 못하는 암울한 상태, 라고 보는 것이 도시에 대한 작가의 진단이다. 꿈은 꿈꾸듯 반짝거리는 별빛이나 반딧불 무리와 어울리지, 도시와는 영 어울리지가 않는다. 아주 이따금씩 도시도 꿈을 꾼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가 있는데, 멀리서 가물거리는 아파트 불빛을 쳐다볼 때가 그렇다. 그때마저도 여하튼, 회색 빛 콘크리트 속 도시에서 꿈을 꾼다는 것, 그것은 왠지 서글픈 정감을 자아내고 쓸쓸한 파토스에 감싸이게 한다.
그리고 도시는 꽃을 피워내지 못한다. 도시는 꿈에 대해서 불임인 것만큼이나 생명에 대해서도 그렇다. 꽃, 자연, 생명은 그 본래의 의미가 축소되거나 변형되거나 왜곡되지 않고선 결코 도시에 기숙하지 못한다. 물론 도시에도 꽃은 있지만 그 의미는 화초로 축소되고, 자연이 있지만 정원이나 공원으로 변형되고, 생명이 있지만 애완의 개념으로 왜곡되고서야 비로소 인간과 도시를 나눠가질 수가 있게 된다. 이를테면 새들은 점차 황폐해진 자연을 피해 도시에 둥지를 튼다. 그 새들은 건축현장에서 물어온 못이며 판자조각 따위를 분비물과 버무려 집을 짓는다.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건축가인 새들의 재주가 참 용타, 싶다가도 훼손된 자연의 바로미터를 보는 것 같아 섬뜩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태양의 도시. 태양의 제국이라고 한다면 옛날에 태양신을 숭배한 국가들, 이를테면 잉카나 마야 같은 고대문명국가를 일컬을 터이지만, 태양의 도시는? 무슨 영화제목 같은 이 주제처럼 도시가 빛으로 환하게 빛날 때가 있긴 하다. 그러나 그것은 낮이 아닌 밤에 그렇다. 낮이 밝고 밤이 어둡다는 것은, 다만 자연의 법칙이며 자연시계에 한정된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는 거꾸로 자연의 낮은 도시의 밤에 해당한다. 도시는 낮에 자고 밤에 깨어난다. 밤을 밝히는 인공태양이야말로 도시를 도시답게 해주며, 미몽의 상태로부터 도시를 갱신시켜주는 태양신의 축복(?)이다. 그 인공태양 아래에서야 비로소 도시는 가장 생생하고, 그 생체시계는 가장 활발해진다. 밤을 잃은 도시. 도시는 생리적으로 밤을 견디지 못하고, 어둠을 참지 못한다. 그 도시의 주민들은 밤과 함께 어둠을 잃고, 잠을 잃고, 휴식을 잃고, 침묵을 잃었다. 그리고 고향과 원형과 정체성마저도. 충혈 된 눈을 홉 뜬 채 그는 밤새도록 어딘가로 내달리고, 흡사 느와르 영화 속 장면처럼 세팅된 도시의 뒷골목을 어슬렁거리며 희생양을 찾아 헤맨다. 이로써 태양의 도시는 현실에 대한 인식의 결과라기보다는, 사실은 밤을 잃은 도시, 불면의 도시, 비정한 도시의 반어법적 표현임이 밝혀진다. 그리고 꿈꾸는 도시(꿈꿀 수 없는 도시)나, 꽃피는 도시(불임의 도시) 역시.
이 일련의 주제의식에 반영된 도시에 대한 반응은 작가의 작업 중 입체나 설치보다는 특히 평면회화의 저변을 지배하는 정조로 보인다. 이 그림들에서 작가는 자연과 도시, 자연과 인간을 대비시킨다. 그리고 반어법을 통해서 황폐해진 자연의 현실을 주지시키고, 훼손된 자연과 인간관계의 복원을 꿈꾼다. 이를테면 꽃과 새와 무지개 같은, 그리고 화면을 온통 붉게 물들이는 노을 같은, 그림에 곧잘 등장하는 자연의 표상들은 도시에서 실제로 발견된 것들이라기보다는, 사실은 상실된 것들을 그리워하는 희망과 바람을 표현한 것이며, 궁극적으론 자연성의 회복을 향한 염원을 암시한 것이다.
이 그림들에서 도시는 결코 그 실체를 온전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도시는 생리적으로 정체를, 휴지를 모른다. 항상 어딘가를 향해 바삐 움직이는, 도시의 생리는 바로 속도감이다. 이처럼 내달리는 도시를 작가는 마치 초점이 나간 사진처럼 흐릿해진, 희미해진, 다만 유기적인 덩어리로 겨우 암시될 뿐인, 무슨 추상화처럼 옮겨놓고 있다. 도시의 주민들은 바로 그 속도감의 휘몰이 속에 함몰된 탓에, 작가의 그림에서 사람을 찾아보기는 어렵다(이따금씩 도시와 함께 질주하는, 아마도 도시 밖으로, 혹은 도시 속으로 탈주하고 있는 것 같은 사람이 등장할 때가 있지만, 대개는). 대신 사슴이나 곰 그리고 고양이 같은 동물들이 도심의 변두리(이를테면 고속도로나, 혹은 한적해서 오히려 차들이 더 속도를 내는 국도 같은)에 낯선 이방인처럼 어슬렁거린다.
속도감과 더불어 희미한 흔적으로 암시되는 도시에 비해, 오히려 사실적이고 또렷한 실체 감을 갖는 것으로 그려진 동물들이 대비되면서 이런 이질감을 강조하고, 이방인의식(?)을 극대화한다. 그리고 그 그림 속 동물들이 그림 바깥쪽의 또 다른 이방인들을 정면으로 쳐다본다. 내달리는 도시와 얼어붙은 듯 멈춰선 동물과의 대비가 로드 킬(그 자체가 현재 자연과 문명과의 잘못된 관계를 암시하는)을 예고하며, 정면을 응시하는 동물들의 눈빛이 화면에 극적 긴장감을 드리운다.
이처럼 작가는 자연과 도시, 자연과 인간, 자연과 문명과의 관계를 주제화하면서, 이를 회화로 풀어내고, 더러는 그 경계를 입체와 설치영역으로까지 확장시킨다. 회화와 조각,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넘나드는, 소위 탈 장르 내지는 탈 경계의 논리를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도 역시 각 <인상; 해돋이>로 명명된 입체작품 2점을 선보인다. 그 중 하나로 작가의 전작에서 이미 상당할 정도의 유형화가 진척된 전형적인 형식을 변주한 경우가 있고, 비교적 최근에 새롭게 찾아낸 또 다른 형식의 조형물이 있다.
먼저 야외광장에 설치된 한 조형물을 보면, 제목 그대로 해가 막 바다 위로 떠오르는 순간의 장관을 포착해 조형화한 것으로서, 수면에 길게 드리워진 햇살과 그 햇살이 유래한 둥근 태양이 하나로 합체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조형물의 측면에는 곡선을 따라 LED를 장착함으로써 특히 밤에 조명과 함께 일정한 장식적인 기능을 부가하고 있다. 아마도 인공적인 빛으로써 주제에 나타난 자연적인 빛(태양)에 조응하도록 배려한 것일 터이다. 그리고 조형물 표면에는 수면에 이는 파문을 가녀린 실선으로 그려 넣어 구체적인 형상 성을 더했다. 이처럼 태양과 햇살이(그리고 파문이 가세된) 하나의 덩어리로 조형된 이 조형물은 부드럽고 유기적인 곡선을 그리며 길게 드리워진 형상으로 인해 그 자체 벤치로도 사용할 수가 있다. 단순한 조형물의 경계를 넘어 일종의 실용미술의 가능성을 엿보게 하는 대목일 것이다.
이처럼 하나의 유기적인 덩어리로 조형된 작품이 있는가 하면, 부분들이 모여 전체를 이루는, 작가의 작업에 특징적으로 나타난 심벌을 이용해 조형화한 작품이 있다. 작가의 작업에 관한 한, 일종의 유형화된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보기에 따라선 더 중요할 수도 있겠다.
작업을 보면, 스테인리스 봉 위에 심벌을 고정시킨 탓에, 멀리서 보면 지지대 역할을 하는 봉은 보이지 않고 그 위에 얹혀진, 군집을 이룬 심벌만 눈에 들어온다. 이런 연유로 조형물이 마치 허공 중에 떠 부유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이를테면 한 방향으로 움직여가는 치어 떼나, 집적된 물방울 형상들이 그려 보이는 파문을 보는 것 같다. 이 작품의 제목이 <인상; 해돋이>임을 감안하면, 그리고 이번 프로젝트의 전체 주제가 <태양의 도시>임을 감안하면, 예의 심벌과 그 심벌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형상은 수면 위에서 자잘한 조각들로 산란하는 빛의 파편들, 빛의 편린들로 볼 수도 있겠다. 이로써 그 자체가 전에 없던 풍경을 열어놓는 계기로서 작용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조형물이 들어서 공간의 성질을 변형 내지는 변질시키는데, 조형물이 놓여지는 공간이 저절로 조형물을 위한 배경 역할을 떠안게 되는 것. 이로써 조형물이 놓여진 공간은 저절로 수면 내지는 하늘로 변형되는 것(일종의 가상현실이 열리는 것)이다. 여기에 조형물이 거울을 배경으로 설치됨으로써, 그 시지각 적 범주가 실제 공간에서 나아가 거울 속의 반영상으로까지 무한 확장되고 있다는 점 역시 흥미롭다.
부분과 전체, 응집과 해체의 유기적이고 역동적인 관계를 보여주고 있는 이 조형물의 최소단위에 해당하는 심벌은 치어, 물방울, 씨앗, 씨알을 암시하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생명의 최소단위인 정자를 의미한다. 이에 비해 다른 항목들은 이 정자가 변주된 개체들(생명의 다른 이름들을 부여 받은 개체들)로 볼 수도 있겠다. 그것을 무엇으로 보든, 정작 중요한 것은 이를 통해서 작가가 생명의 원초적인 본능을 주지시키고, 훼손된 자연성의 회복을 예시해주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