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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화의 보편성과 창작에 관한 시론(時論)박 옥 생 | 미술평론, 한원미술관 큐레이터
1. 보편성 & 성계(聖界)의 구현불교회화는 성스러운 부처의 세계(聖界)를 구현한 그림이다. 이는 엄격한 도상의 법칙과 구성의 규범을 갖고, 경험적인 현상계를 뛰어넘는 초월적인 세계의 모습을 시각적으로 형상화 한다. 정신적이고 관념적인 이러한 불계(佛界)의 구현을 위하여 불보살도상집(佛菩薩圖像集)과 같은 조형의 형식을 기록한 서적들이 일찍부터 완성되었다. 이것은 불교의 전파 경로를 따라 전해짐으로써 불교미술이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는 인식의 ‘보편적인 통일성’을 유지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주기도 하였다. 사실, 현대의 불교미술이 그 본래적인 기원(起源)과 원형(原型)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는 것으로도, 불교미술이 갖는 보편적인 조형의 규범을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불교미술이라 함은 도상의 전통성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으며, 또한 도상의 정확성은 성스러운 예배상을 가시적으로 드러내게 하는 방편이었음을 알게 한다. 사실, 이것은 불교미술에 종사하는 많은 예술가들에게 있어 불교가 갖는 조형의 보편성을 확보하며 동시에 창의성을 구현해야 한다는 이중적인 문제에 봉착하게 되는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나 7세기 활동하였던 중앙아시아의 위지을승(尉遲乙僧)과 같은 승려는 불교회화의 한 양식을 뚜렷하게 자리매김하였으며, 각 나라와 시대를 구분 짖는 양식적 변천들은 모두 고도의 창의성이 발휘되었던 결과들이기도 했다. 고려와 조선의 불교회화의 양식적 특징이나 500년의 조선시대 불화 역사에서도 양식적 추이가 감지되고 있듯이, 불교회화 속에서도 시대와 개인의 양식이 표출될 수 있는 여지는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양식의 변화에는 그 시대에 중심으로 신앙되어진 신앙의 형태가 중요하겠지만, 그와 동시에 그것을 만들어 내는 화가 집단의 성격과 개별 양식 또한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권지은이 선보이는 불교회화의 세계는 현대의 불교미술의 의미와 개인적인 양식, 현대적 창작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2. 권지은의 불교회화불화는 부처의 다양한 설법의 장면과 세계가 도설(圖說)된다. 지극한 아름다움의 성취는 그 궁극의 종교적 상징성을 드러내게 한다는 디트리히 제켈(Dietrich Seckel)의 말처럼, 불화를 그리는 자체는 고귀하고 성스러운 세계의 구현으로써, 장엄한 문양과 고운 선, 선명한 색으로 고귀한 종교성을 연출하게 된다. 먼저 모본을 정하고 정해진 모본을 바탕으로 정교하게 아교포수한 바탕에 초를 그리거나 비율적으로 확장시키는 것으로 불화는 시작된다. 권지은의 불교회화는 삼신도 후불화(비로자나 노사나 석가), 신중도, 천수천안관음보살도, 12지신, 금강역사상, 미륵하생경변상도, 500나한도 등 불교회화에서 신앙되는 영역들을 폭넓게 망라하고 있다. 그의 삼신도는 규모면에서나 내용성에 있어서 눈길을 끌게 하는데, 삼신도는 <1757년 화엄사 삼신도>를 모본(母本)으로 그린 것이다. 하단의 불단(佛壇)이나 비로자나불의 착의(着衣)와 문양, 색에서 화엄사의 초본을 권지은 식으로 재해석하고 새로운 창작의 영역으로 확대시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화엄사 삼신도와 같은 18세기 불교회화들은 착의에서 군청의 적극적인 사용이나 강한 바림처리가 눈에 띠지만, 권지은의 삼신도에서는 군청의 제한적 사용이나 바림의 절제가 감지된다.
또한 권지은의 화작들은 일관되게 비단에 채색작업을 하고 있다. 비단은 고려불화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재료인데, 조선후기에는 삼베나 모시로 변모하여 찾아보기 힘든 바탕이다. 비단은 착색(着色)이 좋고 부드러우며 발색(發色)이 선명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작가는 오리나무로 염색을 한 후 온화한 갈색이 연출 된 뒤 아교포수와 그림을 올리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고려불화가 갖는 차분하고 안정적이며 발색이 좋은 화면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미륵하생경변상도>를 통하여 작가가 느끼는 불교회화의 미적 관점을 뚜렷하게 제시한다. 미륵하생경변상도는 현재 3점이 현존하는데 작가는 2009년에 새롭게 발견된 <1294년 작 미륵하생경변상도>를 재현하고 있다. 미륵불이 도래한 미래의 다양한 시간과 공간이 함께 드러나는 서사적인 도해(圖解)의 미륵하생경변상도는 소의경전(所依經典)의 착실한 도상적 해설을 통해 고려불화의 세련되고 정교한 미적 완성도와 뛰어난 아름다움을 경험하게 한다.
작가는 이러한 고려불화의 비단과 석채와 같은 재료에서 오는 깊고 아득하고 선명한 색의 세계와, 인간의 호흡을 닮은 길고 섬세한 선, 원문(圓紋)과 같은 갖가지 정교한 금으로 호화롭게 치장한 문양에서 깊은 감동을 받고 있는 것이다. 정신적으로 완성된 이상계(理想界)를 보여주는 고려불화의 ‘절대의 미(美)’ 앞에서 우리는 무아경(無我境)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고려불화의 재현은 그림을 그린 화가의 경지를 경험하고, 가장 높은 조형의 완성과 그 과정에서 오는 절대의 몰입과 성취도를 체험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듯 고려불화의 조형적 특성과 아름다움(재료, 발색, 문양, 금)이 작가의 화작에 뿌리 깊게 침투해 있으며 현대에 새롭게 해석된 불교회화의 탄생에 기초가 되고 있는 것이다.
3. 불교회화와 작가(artist)불화의 조성 과정의 마지막으로서, 부처님의 상호는 예배 상으로써의 생명과 작가의 혼을 불어넣는 작업이자 부처의 원력(願力)을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조선시대 불화의 상호는 전체적으로 오밀조밀한 형상을 갖고 있는데, 조선시대 뚜렷한 활약상을 보인 의겸(義謙), 신겸(信謙)과 같은 화사들은 개인적인 양식을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의겸이 그린 상호는 전체적으로 원만하나 눈썹이 짧고 아래로 처지며, 입이 상대적으로 작은 것을 볼 수 있다. 신겸은 얼굴의 크기에 비해 비율적으로 큰 코와 작은 눈을 갖고 있는데 여타의 화사들이 그린 상호에 비하여 개성적이다. 특히 권지은의 부처님 상호에서 드러나는 둥글고 온화하며 이상화된 얼굴은 고려불화에서 보이는 붓다의 상호와 근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작가가 모본으로 하고 있는 화엄사의 삼신불도의 상호는 특징적인 민중의 얼굴과 그리 멀지 않은 대중 속으로 내려온 부처님이라면, 권지은이 그린 부처는 고려불화에 가까운 이상화된 형상이라 하겠다.
이렇듯 불교회화는 전통의 계승과 개성의 표출, 창작이라는 조형의 팽팽한 길항(拮抗)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사실, 경학에 밝은 고승(高僧)들은 경전을 재해석한 신선한 도상의 창출(1790년 월정사 동자형 관음보살변상도)을 시도하는 모습도 볼 수 있으며, 새롭게 유입된 외래문화들을 적극적으로 화면에 도입하여 새로운 불교회화(1790년 용주사 후불화)의 장을 여는 예(例)도 쉽게 발견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일반 회화의 화단(畵壇)에서와 같이 개성의 발현이나 작가(artist)로써 의지의 표출이 드러나는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닌 듯싶다. 신겸은 화사로서는 작가적 의지를 표출하는 선구적인 모습의 ‘벽호자(碧毫子)’라는 주문방인(朱文方印)의 도장과 봉황형의 수결(手決, 싸인)을 이미 1830년경에 남기고 있으며, 철유(喆侑)는 수묵의 자화상을 남기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곧 불화 또한 창의적인 예술의 한 분야로써 창작 인으로서의 강한 자의식이 있었다는 증거이다. 즉, 불화를 그리는 이에게는 그것이 창의적인 예술표출의 한 형태로 인식되어져 왔다는 것이다. 다만, 수행으로써 불교회화를 인식하고 있었던 점이나, 집단 불사(佛事)로써 엄정한 종교화 내에서의 제작 존재를 적극적으로 드러낸다는 것이 일종의 예(禮)에 어긋나는 행위로써 인식되어 졌던 것은 불교회화의 역사만큼 오래되고 고착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권지은의 불교회화는 조선불화의 초본(草本)을 따르지만 고려불화의 색이나 문양과 같은 양식을 따르는 부분적인 창의성도 드러난다. 그러나 자유로운 필선과 내용으로 구사하는 500나한도와 같은 작품에서는 작가 스스로가 고전의 엄격함 속에서 탈피하고 작가적 시각이 투영된 인간적이고 개성이 넘치는 작품을 완성하는 것도 볼 수 있다. 실제로 불, 보살, 신중과 같은 봉안(奉安)을 위한 존상(尊像)을 제외한 나한(羅漢)과 같은 불제자를 포함한 고사속의 인물들은 보다 더 적극적이고 자유로운 창작의 문을 열어놓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작가는 아마도 나한을 통하여 창작 인으로서의 자유를 만끽하고 그 면모를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권지은의 불화는 신체의 연결이 유기적이고 논리적이며 자연스러운 곡선을 구사하고 있다. 조선불화가 갖고 있는 즉물성을 작가는 배채(背彩)와 비단, 오리나무 염색과 같은 재료와 기법으로 깊고 중화된 색의 세계로 변모시켰다. 작가는 불교미술도 현대인의 미감 안에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또한 현대인의 미의식에 맞게 변형되고 창조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의 화면의 불보살, 신장상들은 균형이 잘 잡힌 8등신의 시원한 비율과 세련된 선을 갖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작가가 현대화에 관한 모색을 통하여 창의적인 조형을 창출함으로써, 불교회화가 갖는 낯선 시간의 간극을 메우고 친근하고 매력적인 모습으로 완성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본 전시에서 <귀의삼보 하옵고>와 같은 백제 불화를 고증한 작품은 화불(化佛)이 들어간 화염문 광배나 봉보주(捧寶珠) 보살상, 나무대좌와 여래상의 풍성하게 떨어지는 가사의 주름은, 현재 남아 있는 백제 조각상과의 연관성 안에서 그려졌음을 알게 한다. 이러한 작가의 고증(考證)은 백제 불화가 남아 있지 않은 현 시점에서 사료로서의 가치도 함께 지니고 있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
불교회화는 선(線)을 만들어 내는 것에 수행과 같은 지극한 시간을 필요로 하며, 선이 불교회화의 아름다움과 미적 목표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래서 선을 그어내는 과정 속에서 몰입과 같은 완전한 자유를 얻는 작가적 수행의 한 방편이 승려 화사들을 통해 오랜 시간 계승되어 온 것도 이러한 이유일 것이다. 작가는 이러한 불화 그리기를 통해 자신의 성찰과 기도의 시간을 갖는다고 한다. 즉, 불교회화는 그리는 이에게는 고전적 의미의 수행과 작가적 창작의 고민이, 관자에게는 신심(信心)을 발현시키는 교화로써의 의미와 지극한 미의 세계에 관한 관조(觀照)와 기쁨이 내재되어 있음을 알게 한다. 무엇보다 권지은의 불화는 불교회화의 현대적 해석과 표현에 그 방법적 모색을 시도하고, 보편적 통일성을 오랜 시간 확보해 온 전통 안에서 창작에 관한 고민하는 작가(artist)로서의 표현양식과 대안점을 제시하고 있다는데 그 가치와 의미가 있다 하겠다.
| 2010.11
권지은 불교회화전 KWON JY EUN 權志恩
선(禪)을 긋다.
전시일정 | 2010.12.15-12.21
초대일시 | 2010.12.15 수 오후 5시
전시장소 | 인사아트센터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 인사아트센타 1층 02-730-1020
홈페이지 | http://kwonjyeun.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