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범
지금 당신은 무엇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그것은 당대 문명의 기술적 발달을 고려하지 않고는 답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느린 발걸음으로 풍경을 관조한다면, 그것은 시선의 이동이 없는 정지된 모습 풍경을 볼 것이며, 빠른 이동 수단을 통해 풍경을 관조한다면, 순간순간 변하는 유기체로 풍경을 관조할 것이다. 빠른 속도를 요구하는 현대사회를 고려한다면 인간의 시각 체계는 대부분 후자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심정적 판단에 지나지 않는다. 정작 우리의 대부분의 삶은 느린 시간에 의해 규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현대사회를 빠른 속도로 규정하고 그곳에 적응하기 위해 필사적이다.)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것은 빠른 속도가 가져오는 시각 변화의 층위이다.
스펙타클한 현대사회의 시지각
우선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대상(풍경)과 바라보는 주체가 어떻게 마주하는 가이다. 대상의 내부로 들어가려하는 시선은 빠른 속도로 인해 다음 대상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그곳에서도 시선은 멈추지 못하고 또 다시 다음 대상으로 이동하기 마련이다. 즉, 시선은 대상의 내부로 향하지 못하고 대상의 외피만을 훑고 지나간다. 그러기에 빠른 속도에서 세상을 지각하는 방식은 주체의 개입이 상실된 평면 이미지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대상을 ‘본다’는 동사는 구체적 의미를 지니는 대상을 주시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므로, 주체의 적극적인 태도가 개입되기 마련이다. 주체의 개입을 막는 기술문명의 발달, 그리고 주체가 개입할 수밖에 없다는 ‘본다’는 행위의 본질적 문제. 이 두 문제가 가지고 있는 역설적 괴리가 강유진의 화면에서 조우하며 충돌한다.
강유진의 작업은 이러한 상황에서 어떤 특정한 곳에 자신의 시각체계를 온전히 내려놓지 못한다. 그는 세상을 이분법으로 분절하고 단지 그들 ‘사이’를 오가고 있을 뿐이다. 에나멜로 착색되어 매끈하고 광택을 발하는 그의 작업 표면에는 다양한 이분법이 산포되어 있다. 침실, 거실, 부엌 등 생활공간은 물론이고, 도시의 한 켠을 그린 그곳에도 변함없이 이분법이 드리워져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분법으로 세계를 바라본다는 것은 얼마나 상투적인가. 세계를 내부와 외부의 이원구조로 규정하고, 그 외부를 헤집고 그 속에 그리고 그 너머에 은밀하게 도사리고 있는 무엇인가를 끄집어내는 것. 이것은 세상을 투시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흔히 취할 수 있는 관점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강유진은 그 흔한 이분법을 이용해 또 다시 자신의 화면을 채우고 있다.
강유진의 표면적 대상은 인공미로 가득한 스펙타클한 현대 도시의 모습이다. 고층건물, 항공기, 수영장, 상점의 진열장, 갤러리 등 그 대상들은 거대한 스케일과 화려한 외관을 지니고 있다. 매끈하게 처리된 화면은 현대 도시의 화려함의 외피를 그대로 드러낸다. 뿐만 아니라 화려한 대상을 덮고 있는 2차원적 패턴(흘리고, 붓는 페이팅 기법) 역시 강유진의 화면의 화려함을 확대하는 요소이다. 그러기에 표피적으로 접근하면 강유진은 도시의 화려함 뒤에 잠재되어 있는, 즉 화려함을 지탱하기 위해 숙명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피 말리는 ‘속도감’을 이미지의 시각적 화려함으로 가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강유진이 그리는 대상의 층위를 점검해보면, 단순히 거대한 도시’ 뿐만 아니라 분할된 ‘미소(微小)’한 거주 공간(테이블, 침실, 부엌, 거실)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그러기에 강유진은 화려한 도시 자체를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의 시지각을 형상화 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당대 시지각을 표현하는가?
강유진이 제시한 화려한 화면을 따라가다 보면, 그가 하나처럼 보이는 화려함의 요소를 이분법에 의해 극명하게 규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차원의 공간이 제시된 표면에 2차원의 패턴을 만들고, 구상적 요소로 가득한 그림에 추상적 요소를 가미하여 현실과 이상이 교차하는 몽환적 세계를 만든다. 뿐만 아니라 곡선과 직선, 우연과 의도, 뜨거움과 차가움 등 그의 작업에서 일차적으로 감지되는 많은 요소들은 대립하거나 충돌하지 않는다. 그저, ‘함께’라는 이름으로 매끈하고 광택이 나는 표면에 서로 엉켜 안착되어 있다. 이러한 공존을 통해 강유진이 드러내고자 했던 것은 사회 구조적 체계 안에서 이분법이 제거 했던 틈새일 것이다. 이분법의 이것이 지향하는 바와, 저것이 지향하는 바를 동시에 적극적으로 노출시킴으로 그 사이에서 벌어져 있는 틈새, 즉 이것도 저것도 아니기에 사라졌던 것들이 보이게 된다. 그것이 강유진이 지향했던 이 시대의 시지각 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