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양철지붕 아래서 : 화가 오병욱 산문집
- 청구기호814.6/오44ㅃ
- 저자명오병욱 지음 ; 오병욱,안기천 [공]사진
- 출판사뜨인돌
- 출판년도2005년
- ISBN895807132X
- 가격12000원
1. 한 화가가 들려주는 자연 교향악
소풍 나온 듯 15년을 살다
<빨간 양철지붕 아래서>는 잘나가는 강남의 큐레이터에서 어느 날 돌연 할머니가 사시는 경북 상주의 빨간 양철지붕 집으로 내려가 작품 활동을 하게 된 저자가 15년 동안 그곳에서 지내며 겪은 소소한 일상과 자연을 통한 사유를 화가 특유의 섬세한 관찰력으로 그림을 그리듯 아름답게 써내려간 매혹적인 산문집이다.
한여름 소나기가 후두둑 떨어지는 빨간 양철지붕 아래서 일어나는 일상, 시시때때로 모습을 바꾸는 자연의 빛깔과 향기, 어느 날 찾아온 반가운 손님 딱새 이야기, 구수하고 정겨운 시골 이웃의 모습, 작업실인 폐교가 물에 잠기는 바람에 2년간의 작업들을 고스란히 떠내려 보내야 했던 일, 신비주의자로서 삶과 그림 사이에서 고뇌했던 젊은 시절, 그리고 애틋하고 그리운 유년의 기억들이 세련된 언어들로 한 편의 시처럼 펼쳐진다.
2. 그림을 살고 싶었고, 시를 살고 싶었던 화가
미술계의 주목을 받으며 2004년‘스타타워 갤러리’에서 다섯 번째 전시회를 연 화가 오병욱은 한때 신비주의자였다. 온몸으로 예술을 살고 싶었던 그는 시인이 되기 위해 시론을 공부한다. 시를 통해 내면의 눈을 뜨고 독서와 경험, 사색과 글쓰기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 그는 몇 년 동안 거의 매일 밤 끊임없이 고민하며 쓰고 지우기를 거듭했었다. 하지만 기록에 급급해 현재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에 시 창작에 염증을 느끼곤 냉랭한 관찰자보다는 뜨거운 행동가가 되리라 마음먹고 그동안 썼던 시를 모두 불태워 버린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녹록치 못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고, 아이가 생기고, 또 주변의 기대 속에서 이론가, 큐레이터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을 깨닫게 된다. 한때 구름 속을 날아다니던 신비주의자의 날개가 꺾여 버린 것이다. 일상을 한없이 겉돌던 그는 결국 삶과 예술을 화해시키지 못한 채, 도망치듯이 상주로 내려간다.
한동안 일부러 책도 읽지 않고, 글도 쓰지 않고 그림도 그리지 않고 그저 돌담을 새로 쌓고, 웅덩이를 쳐내고, 고기를 새로 잡아넣었으며 무너진 굴뚝을 세우고 집을 수리하는 일에 시간을 보낸다. 때때로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마을 주변을 산책하고, 냇가에서 조약돌을 좁고 길에 핀 들꽃을 꺾고, 달이 좋은 밤 마당을 서성거리고, 눈발 송송 날리는 작은 길을 걷는다.
그러나 그 사이에 그는 풀꽃을 자세히 볼 수 있고 되고, 매미허물을 조심스럽게 만질 수 있게 되며, 거미줄이 완성되어 가는 모양을 오랫동안 지켜볼 수 있게 된다. 반짝이는 자연 속에서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게 된 작가는 분노에 쌓였던, 행동하지 못했던, 예술을 살지 못했던 자신의 내면과 화해하게 된다.
3. 일상에서 발견한 설렘. 반짝임 그리고 그리움
저자의 뛰어난 문장은 이미 미술계에선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빨간 양철지붕 아래서>에 그동안 간직했던 문학에 대한 열정을 아낌없이 쏟아내고 있다.
빼어난 문학적 감수성과 정교하게 날이 선 명징한 언어들로 완전무장한 이 책을 통해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일상에서 발견한 설렘, 반짝임 그리고 그리움이다.
“뽀얀 간유리 밖으로 반짝이며 움직이는 게 뭔가 싶어서 창문을 막 열어젖힌 참이었다.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눈 녹은 물이 돌담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따사로운 햇살에 영롱한 구슬조각이 이리 튀고 저리 튀어 황홀한 봄날 아침이다. 고드름 조각이 철컥철컥 떨어진 주변이 벌써 푸릇푸릇하다. 눈 녹은 물은 참 맑기도 하지. 초봄에 이렇게 큰 눈이 오다니. 저 눈 녹은 물이 흘러가는 속도로 봄이 다시 다가오는 것이리라. 그래, 봄 눈 녹듯이, 그저 봄 눈 녹듯이 그렇게….”
- ‘폭설’ 중에서
그의 글엔 지친 일상에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설렘이 있다. 녹아내리는 눈 속에서, 햇살이 눈부신 기찻길 옆 플랫폼에서, 그리고 골목길 모퉁이를 돌아서면서 누군가가 기다릴 거 같은, 무슨 일인가 일어날 것 같은 두근거림을 전해준다.
“살구꽃이 아직 채 피지도 않았는데 벌들은 벌써 급하다. 마구 날개를 휘저어 바쁘게 날아다니면서 빨리 꽃이 열리라고 주문을 외고 마술을 건다.
어쩌다 바람이 불어 하얀 꽃잎이 눈보라처럼 휘날리면 나는 그만 절망적인 심정이 되고 만다. 세상 전체가 한 바탕 꿈처럼 ‘쨍’ 하니 깨어져 버릴 것만 같다. 그렇지 않아도 성긴 꽃그늘로 발에 춤추는 꽃잎 그림자. 어디를 밟고 어떻게 지나가야 할지 땅 디디기도 송구하다. 여기까진 어떻게 왔나 뒤돌아보면 지나온 발자국이 새로 꽃잎에 묻히고 있다. 벚꽃 아래 우산을 쓰고 걸어보지도 못하고 또 올해도 봄날은 그냥 가는가.“
- ‘자연의 빛깔, 자연의 향기에 빠져들다’ 중에서
흐드러지게 핀 살구꽃, 감나무에 와닿는 바람소리, 불붙은 호랑이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산불 등 그는 정겨운 고향 마을의 모습을 독자들의 눈앞에 하나하나씩 펼쳐놓는다. 눈에 보이는 것뿐 아니라 소리까지도 생생하게 형상화하여 작은 나뭇잎 하나까지도 가까이에서 숨을 쉬는 듯 느껴진다. 그는 글 속에서 자연은 하나하나 의미를 갖고 반짝이고 있다.
“갑자기 우리가 쓴 우산이 뒤집어졌을 때가 생각나 혼자 웃었습니다. 비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마주보고 웃던 그날이 언제였지요? 가지런히 빛나던 그 하얀 이를 차갑고 매끄러운 그 창백한 손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같이 빗속에 간간이 바람이 섞여 보는 날이면 일부러 우산을 들고 밖으로 나가봅니다. 어느 순간에 아득히 잊혀져 가던 그날들이 너무나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바람에 혼자서 놀라기도 한답니다. 시간은 저기 저 강물처럼 가끔씩은 소용돌이도 치고 제자리에서 맴돌기도 하는 걸까요? 제 가슴속에서 쉬지 않고 맴도는 이 그리움처럼 말입니다.”
- “비 오는 저녁 강가에서” 중에서
지우개 달린 몽당연필, 오래된 철 대문, 수돗가의 사기요강을 보며 우산을 쓰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저자는 불현듯 지키지 못한 약속을, 망설이던 맹세를, 그리고 돌아오지 않는 친구를 떠올린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애틋한 그리움이 책 속에 깊이 배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