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돌아보는 한국화
1980년대 한국화의 ‘도시’
송희경(이화여자대학교 연구교수)
도시는 인류의 가장 위대한 창조물이며 자연환경을 새롭게 바꿀 줄 아는 인류의 능력을 입증하는 증거물이다. 이는 근대성이 지닌 양면성 즉 개발, 풍요, 소비와 오염, 갈등, 불평등이라는 야누스의 얼굴을 지녔다. 그런 의미에서 도시는 근대사회의 도서관이자 실험실이며 공공의 삶을 향한 욕망과 투쟁의 장소로 인식되었다.
한국의 도시 공간은 자본주의적 근대성을 담고 있다. 그 형성은 1920년대이지만 이를 시각물의 소재로 삼은 것은 1980년대부터로 간주된다. 이 시기에 비로소 개발과 계획으로 도시가 급격히 성장했고, 이러한 변혁이 한국화에서 도시라는 소재의 선택과 해석 그리고 비판적 접근을 가능케 한 것이다. 시각물에 재현된 도시는 산업사회의 발전이 고스란히 드러난 공간이자, 인간의 본능적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장소이다. 도시를 삶의 터전으로 삼은 생활인은 도시 발전의 원동력이자 물질문명의 수혜자이기도 하지만, 그 이면에 가려진 황폐함과 부작용의 피해자이기도 하다.
1980년대 한국화에 등장하는 ‘도시’는 일상에서 쉽게 보는 주변이다. 김아영(金雅暎, 1953- )은 도시에 아직 남아있는 전통가옥과 골목길을 맑은 갈색의 채묵으로 재현했다. 중봉의 필선으로 가옥의 외곽을 튼튼하게 구획했고 그 위에 담채를 선염하면서 도시에 아직 남아있는 옛것을 따듯하게 포착했다. 곽정명(郭正明, 1955- )은 동색계열의 도시를 화면에 담았다. 섬세한 선과 담채를 여러 번 칠하는 기법을 선택했고 전면에 부각시킨 건물들 뒤편에 선명도가 낮은 원경을 배치하여 근경과의 대조를 형성했다. ‘시간성’을 느낄 수 있는 채색방법과 모노톤의 색조는 서민의 평범한 일상과 고즈넉한 도시의 뒤안길을 적절히 표현했다.
곽정명의 도시와 대조를 이루는 것이 석철주(石鐵周, 1950- )의 도시이다. 달동네를 위에서 조감했고, 전통적 수묵의 필선으로 사물을 묘사한 뒤 그 위에 담채를 덧입혔다. 화면전체에 강약을 평등하게 묘사한 것도 그의 특징이다. 세 작가가 관조한 도시는 판자촌을 상징하는 달동네의 경관이다. ‘달동네’란 산등성이나 산비탈 따위의 높은 곳에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를 의미한다. 이는 1960년대 이후 경제개발을 이유로 비정상적으로 발전한 서울에서 상대적으로 낙후된 주거공간의 일부이다. 무계획적이고 급진적 도시개발은 행정구간의 불균형적 발전과 이에 따른 도시민의 계층화를 초래했다. 80년대 들어서면서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도시개발의 부작용은 서울이라는 도시를 인간의 풍요로운 삶이 보장되는 문화공간과 열악한 빈민촌인 달동네로 양극화했다. 세 작가는 달동네라는 대상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바라보는 시선’으로 도시를 그렸다.
문봉선(文鳳宣, 1961- )은 도시의 전체적 조감 대신 도시의 문명을 상징하는 축조물이나 도구를 화폭에 담았다. 그는 ‘현대문명 속의 변화하는 세태’를 표현하고 싶었다는 의지를 표명하며 가장 도시다운 소재를 선택했다. 즉 도심의 빌딩이나 거리 전체가 아닌, 고가도로, 자전거 등 서민이 도시에서 늘 접하지만 간과하기 쉬운 일상의 장면을 포착한 것이다. <미술대전> 6회 대상수상작 <도시>는 길거리에서 바라본 고가도로와 시멘트벽에 흐르는 빗물을 포착한 작품이다. 작가가 설명처럼, 우연히 비를 맞으며 아현동의 고가도로 밑을 지나가면서 본 거리를 그린 이 작품은 당시 한국화의 새로운 소재개발과 기법을 발굴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기존의 주류로 인식되었던 전통산수의 퇴조를 촉진한 ‘도시’는 인물형상과 더불어 80년대에 중심소재로 확산되었고, 수묵과 채색의 이원구조를 극복한 수묵채색과 동색계열의 채색법으로 시각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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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아영 <연남동에서> 1979년, 종이에 수묵 담채 66×163.6cm ▶곽정명, <생활무한>, 1984년, 종이에 담채, 125×157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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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철주, <외곽지대>, 1981년, 종이에 수묵담채, 228×182cm ▶ 문봉선 <도시>, 1987년, 종이에 수묵담채, 180×140c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