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지 않은 나의 그림인생은 서울에서 중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을 한 2000년 후반부터 싹트기 시작하였다. 정년퇴임 후의 생애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의 대기 기간이 아니라 새로운 인생의 시발점이라고 보았을 때, 새로운 삶에 따른 보람은 어디서 찾을 것인가를 궁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얻은 결론이 경험해보지 않은 전혀 새로운 영역에서 새로운 삶의 방향을 찾아야겠다는 것이었고, 그래서 선택한 것이 바로 그림 그리기였다. 수학을 전공한 내게 무슨 그림 그리기의 재능이 숨겨있는 듯해서 선택한 것은 아니였다.
그렇다면 그림그리기에 대한 기초지식이나 기능이 전무한 나로서 그림 공부는 어떻게 시작을 할 것인가? 내가 사는 광명시에는 한국 청소년 연맹이 위탁을 받아 운영하는 서울시립 근로 청소년 복지관이 있다. 여기서는 근로 미혼 여성 2,000명 가까이 거주할 수 있는 아파트를 복지차원에서 임대 운영하고 있는데, 부대사업으로 성인을 상대로 하는 문화 강좌가 다양하게 개설되어 있었다. 그 중에는 그림 그리기 반도 있는데, 3개월 단위로 등록하며 1주일에 하루만 2시간씩 실기 위주로 지도해 주었다. 강사는 미술을 전공한 분 들이였으며, 뎃생으로부터 시작해서 수채화나 유화에 이르기까지 세심하게 지도해 주었기 때문에 나에게는 바로 안성 맞춤의 과정이였다. 문제는 함께 그림을 그리는 단원들이 모두 2,30대의 젊은 여성들이였고 그 중에는 5년여를 그려온 배테랑도 있었기 때문에 그 안에서 내 운신의 폭이 좁은 것이였으나, 모든 것을 접어 두고 열심히 참여해보기로 하였다.
강의는 주 1일만 있지만 그림 그리기 방은 1주일 내내 개방되어 있어서 언제나 사용할 수 있는 것이 내게는 천만 다행이였다. 왜냐하면 다른 단원들은 가정주부이거나 직장인들이여서 강의날만 그림 방에 나오지만, 나는 할 일 없는 사람이니 1주일 내내 그것도 하루 종일 개인의 화실처럼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늦게 배운 일에 날 새는 줄 모른다고 뎃생 공부를 시작할 때는 하루 종일 그림 방에서 연습을 하고도 집에 가서 새벽까지 온갖 잡동사니를 다 그렸고, 강의 날에는 그것들을 가지고가서 개별지도를 받을 수 있었으니, 실기 공부의 양은 대단하였다. 반원들은 우리 집에 가보지 않았지만, 우리 집 가구 집기들은 본 것처럼 훤하다고 하였다. 복지관에서 그림 그리기를 하는 동안에 복수로 등록하여 한국화의 십군자 그리기와 도자기 굽기 과정도 이수할 수 있었고, 20여년 즐겨온 서예도 더욱 익힐 수 있었으니 나의 미술 인생은 좀 더 살찌게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림에 전년하기 위하여 남성합창단 업무도 중지하였다.
일년간 그림을 그리자 이제는 미술에 대한 이론적인 뒷받침에 눈이 트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복지관 수강은 계속하면서 미대 실기 교육 과정에 등록을 하였다. 다시 캠퍼스에 몸을 담으니 마음도 젊어지고 스스로 자긍심도 높아질 뿐 아니라, 담당 S 교수님의 재치 있는 지도에 그림에 대한 애착은 더해만 갔다. 특히 내가 그린 그림에 부족한 점이 있어서 지적해 주실 때에는 요점만 살펴주시고, 내 그림에는 전혀 가필을 하지 않으시는 지도 방법에 익어 그 이후로 이제까지 어느 분에게 지도를 받아도 내 그림에는 가필은 받고 있지 않다. 수채화 과정 4학기 중에 크로키 과정도 복수 등록하여 이수 하였고, 미술에 대한 안목을 키우기 위하여 월간 전시 안내 책자의 도움을 받으면서 부지런히 미술 전시회를 찾아 다녔음으로 하루가 그림으로 시작하여 그림으로 끝났으며, 친구들은 정년퇴임 후 전 보다 더 만날 수가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나 스스로 내 그림 - 수채화에 대하여 의구심이 돋아나기 시작하였다. 남들은 수채화를 그렸을 때 화사하고, 소설에서 나오는 것처럼 수채화다운 수채화가 그려졌는데, 내가 그린 수채화는 갈수록 그것들과는 거리가 멀어져서 수채화도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유화도 채색화도 아닌 것이 되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복지관 강사들에게 내 그림에 대한 나의 느낌을 말하고 수채화다운 수채화로 환원할 방법을 물었는데, “왜 남들과 같아 지려고 하느냐 그것이 선생님 그림의 화풍이니 고민할 것 없다. 오히려 자신의 특성으로 알고 그대로 키워 가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위로는 되었지만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S 교수님께 다시 문의 해 보아도 위와 유사한 대답을 해주셨고, 한 걸음 더 나가서 개인전을 준비하라고 웃으며 말씀하신다. 그림 그리기 2년여 만에 무슨 개인전이냐고 반문하였더니 내 그림에는 2가지 특성이 있다고 하였다. 하나는 그림을 그리는 화풍이 남 다른데가 있고, 또 다른 하나는 나무나 나이테만 주로 그리는데 그림의 소재가 특이하다는 것이었다. 개인전에 대한 이야기는 격려의 말씀으로 듣고 지나쳤지만, 내 그림에 대한 우려되는 마음은 그래도 놓이지 않아서 과거 동료였던 미술 교사들을 찾아가 의논도 해보고, 심지어 미술과 조교에게까지 가서 내 그림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았지만 모두가 한결 같이 당신만의 화풍이니 그대로 그려나가라는 권장 뿐이였으므로 이 고민은 그만 접어두기로 하였다.
그러나 또 다른 한 편으로는 내 그림에 대한 불안이 도사리고 있었으니 그것은 내가 그린 그림이 정령 다른 사람의 눈에도 그림다운 그림으로 보이는 가하는 것이였다. 미술을 전공한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해서 뒤늦게 시작한 그림 그리기를 처음부터 어떤 정규 미술과정을 이수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내 미술기능에 대한 의구심이 생기는 것이었다. 이 의구심과 내 그림에 대한 불안한 느낌을 탈출하기 위하여 궁리한 것이 공모전에 응모 해 보자는 만용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말이 만용이지 치기에 가까운 만용이였다. 2000년 8월에 정년퇴임을 하고 6개간 간 쉬었다가 2001년 3월부터 그림을 그리는 새 길을 걷기 시작하였는데, 그해 여름에 수채화 공모전 광고를 보게 되었다. 그림반 동료에게는 말도하지 않은 채 그림 3점을 들고 응모작 접수장에 갔는데 장년 한 분이 출입문에 서 있었다. 그림을 보여주며 응모해도 되겠냐고 물었더니, 그림 한 번 보고 내 얼굴 한 번 보고 “해 보시죠” 한다. 용기를 내어 제출하였는데 결과는 불문가지, 명약관화, 낙선이였다. 그래도 내 그림이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도 그림으로 보여지는 날이 있겠지 하는 오기와 만용을 가지고 2년차, 3년차, 작년까지 6년차 들고 다니며 여러 공모전에 출품하였다. 그것도 미술품 운반 업체에 의뢰하여 제출하는 것이 아니라, 고희라고 하였는데 흰머리가 너울거리는 사람이 할 일이 없다는 핑계로 직접 들고 다니며 제출했으니, 내가 나를 보아도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마음속으로는 쾌재를 부르며 쫓아다녔다. 내가 좋아서 스스로 하는 6 살배기 늦둥이 그림인데 누가 뭐라 한들 어떠하랴.
두번 째 개인전을 계획하며
2005년과 2006에는 전국단위 공모전에서 매해 2번씩 모두 4번 입선을 하였다. 남들이 보기에는 쥐꼬리만도 못하겠지만, 나로서는 용의 발톱이라도 얻은 듯 용기 백배 하였다. 금년에도 계속 공모전에 응모하여 내 그림의 현상을 검증해 보려 한다. 그리고 S 교수님의 격려 말씀에 따라 2006년 6월에는 또 한 번의 만용을 부려 개인전까지 열었으며, 내친김에 금년 6월에도“나무가 그린 수채화 II전”을 펼쳐 볼 요량을 하고 있다. 그동안 10여회 그룹전 참여 경험을 삼아, 금년에도 여러 그룹 전에 참여하려한다. 여기까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여건과 장소를 마련해 주었을 뿐 아니라, 격려의 상도 주셨고, 부족한 그림을 상설 게시할 공간마저 복지관 중앙 현관에 마련해 주신 서울 근로 청소년 복지관 운영 측에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루브르 박물관에 간 적이 있었다. 사람들이 분비는 코너가 있어서 나도 발뒤꿈치를 들며 기웃거려 보았더니 조그마한 이중 유리 벽 속에 모나리자가 웃고 있었다. 앞으로 남은 인생을 생각할 때, 10년 또는 그 앞뒤로든 내가 살아 있는 그 끝자락에 가서, 내가 새로 살아온 미술 인생을 되씹으면서 회심의 미소를 지을 수 있기를, 그림이라는 늦둥이와 함께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