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방된 해석의 장,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의 <무제>
2020년, 문화체육관광부의 주도로 예술인 일자리 제공 및 주민 문화 향유 증진이라는 목적 하에 ‘우리 동네 미술’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 예술인과 지역 공동체의 소통을 기반으로 예술인에게 창작의 기회를, 지역 공동체에 도시 활성화의 기회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문화 뉴딜’이 아닐 수가 없다. 하지만 반년 만에 졸속으로 시행된 ‘우리 동네 미술’의 실상은 사뭇 달랐다. 짧은 추진 기간에 예술인들이 고심하여 기획안을 작성할 여유도, 지역민들이 그들과 소통하여 기획안을 발전시킬 여유도, 완성도 높은 작품을 창출할 여유도 모두 없었다. 대부분의 지자체는 조형물과 벽화처럼 촉박한 시간 내에 시행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선발하였으며, 감천문화마을을 벤치마킹하자는 무언의 약속이라도 한 것인지 천편일률적으로 낙후 지역의 담벼락을 알록달록하게 칠하는 중이다. 사업 시행 당시 일각에서 대두되었던 “우리 동네 미술이 우리 동네 흉물로 전락할까 두렵다.”, “퇴행성 환경 미술 양산을 초래할 것이다.”와 같은 우려의 목소리가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Felix Gonzalez-Torres, <Untitled>, 1991, Billboard, dimensions variable, ⓒ MoMA
잘 만들어진 공공 미술은 무엇인지, 이상적인 공공 미술이란 어떠한 구색을 갖춰야 할 것인지. 명쾌한 답을 내리기 어려운 질문들이 떠오르는 요즘, 생각나는 작품이 하나 있다. 바로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Felix Gonzalez-Torres)의 <무제 (Untitled)>다. 흑백조의 가라앉은 분위기, 눌린 자국이 있는 베개, 흐트러진 이불. 간결하기에 곧장 의미를 읽어내기 어려운 이 작품은 작가의 사적 기억의 편린을 담아낸 것이다. 특별할 것이 없는 침대지만, 이는 곤잘레스 토레스가 사회적 편견으로부터 자유롭게 동성 연인인 로스(Ross Laycock)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안식처였다. 로스가 에이즈로 사망한 1991년에 제작된 이 작품에는 자신의 곁으로 돌아올 수 없는 연인에 대한 그리움과 시간의 흐름 속에서 희미해져갈 두 사람의 사랑을 영구히 보존하고자 하는 욕망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무제>는 부재하는 로스의 흔적을 되새김질하고 작가의 감정을 표출하는 연가(戀歌)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빈 침대 이미지는 1992년 5월 15일부터 6월 30일까지 뉴욕 현대미술관과의 협업으로 맨해튼 빌보드 24곳에 게시됨으로써 공공장소(public)에서 대중(public)에게 감상되는 공공 미술(public art)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이때 <무제>는 침대라는 기성품을 보조관념으로 삼아 동성애와 삶, 에이즈와 죽음이라는 원관념을 은밀하게 전시함으로써 반 동성애적 행보를 밟았던 정부와 일반 대중의 혐오에 맞서는 작가의 성명으로 이해된다. 곤잘레스 토레스는 간접적인 발화는 권력 제도 내부에 바이러스처럼 침투하여 사회적 편견의 변화를 야기할 힘을 지닌다고 믿었다. 그는 비정상으로 간주되던 동성애자의 성애를 평범한 침대에 전이시킴으로써 동성애 역시 이성애와 마찬가지로 지극히 평범한 인간과 인간 사이의 정신적 교감임을 대중을 향해 역설하고자 하였다.
그렇다면 혹자는 흐트러진 침대 이미지만으로 작가의 의도를 대중에게 전달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과대평가라며 반기를 들 수 있다. 텍스트를 동반하지 않은 이미지가 명료한 의미를 생산하는 것은 어렵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타당한 지적이다. 그러나 <무제>가 작가의 정치적 견해를 피력하는 메신저의 역할을 온전히 수행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이를 실패작으로 취급하는 것은 옳지 않다. 미술사학자 권미원의 언급처럼 공공 미술로서 <무제>의 진정한 의의는 통일적이고 일관적인 작품 감상을 붕괴시키고, 대중을 구성하는 개인과 상호작용함으로써 무한한 개별적 의미를 산출할 수 있다는 점에 자리한다. 곤잘레스 토레스가 언론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하여 여러 차례 밝힌 바가 있듯이, 그에게 있어서 진정한 공공 미술이란 작품과 능동적으로 관계를 맺고 적극적으로 사유하는 대중을 탄생시키는 작업을 의미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무제>는 “예측 불가능하고, 변덕스러우며, 모순적인” 수많은 개인이 자유로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개방된 해석의 장으로 거듭난다. 비어 있는 침대의 이미지는 보는 이로 하여금 그 빈 공간 위에 각자의 사적 기억과 지식을 투영하여 자신만의 상상을 덧입히도록 초대한다. 고된 하루에 지쳐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빌보드를 본 누군가는 푹신한 침대에서의 안락한 휴식을, 누군가는 침대 위에서의 에로틱한 정사를, 작가에 관한 사전 지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사랑을 나누는’ 사적 영역에서도 자유롭지 못하였던 로스와 같은 동성애자들의 고통을 떠올릴 것이다. 이미 결정된 의미를 찾아 나가는 것이 아닌 지금부터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나갈 대중이 존재할 때에야 비로소 “무엇이든 개인적인 경험과 연관될 수 있어야만 의미가 창조된다”고 여긴 곤잘레스 토레스의 신념이 빛을 발하게 된다.
이와 같이 <무제>는 작가의 감정과 정치적 견해를 드러내는 지극히 사적인 작품임과 동시에 대중과 조우하여 새로운 의미를 창출할 때에야 완성되는 지극히 공적인 작품이다. 보행자의 이목을 끄는 예술성, 진정성 있고 독창적인 작가의 아이디어, 대중이라는 불특정 다수에게 자유로운 사유의 기회를 제공하는 개방성. 이러한 요소들이 앞으로 길거리를 채워나갈 조형물을 공공 ‘미술’로 만드는 최소한의 조건이지 않을까 조심스럽게나마 생각해본다.
박하은 pheun0507@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