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수
박현기(朴炫基, 1942-2000)는 국내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로 불리며 비디오를 통해 1970년대의 한국 현대미술이 추구했던 물성에 대한 관심과 자신의 전통적 동양사상, 사고, 비물질성 등을 작품에 반영했다. 박현기는 비디오 작업 이전, 작품 활동 초기에 자신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돌(石)이라는 자연물을 통해 그의 동양적인 정신을 확인할 수 있는 돌탑 작업을 만들어냈다.
박현기, <무제>, 1978
1978년 7월 3일부터 9일까지 서울화랑에서 열린 개인전을 통해 박현기는 작품 <무제>(1978)(이하 <무제 돌탑>)를 선보이며 처음으로 돌탑 작업을 공개했다. <무제 돌탑>은 당시 박현기의 주요 관심사였던 실재와 부재 사이의 간극을 줄이는 작업의 연장선상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처음으로 투명한 사물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작품은 서로 다른 여러 개의 돌들이 수직으로 쌓여 있는 형태로, 둥글고 모나지 않은 자연물의 돌들 가운데 투명한 재질의 합성수지로 만든 ‘인공 돌’이 사이사이 끼워져 있다. 쌓여서 층을 이룬 모습은 무너질 듯 위태로워 보이기도 하지만 투명한 인공의 돌이 탑의 일부가 되어 중량감 있는 자연의 돌과 어우러져 안정감을 느끼게 해준다.
박현기, <무제>, 1978
박현기, <무제>, 1978
<무제 돌탑>은 박현기의 첫 개인전 외에도 몇몇 전시에서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선보이게 됐는데 자연의 돌과 인공 돌을 탑처럼 쌓아올린 모습은 동일하다. 또 다른 작품에서는 자연 돌과 인공 돌의 모습이 다른 작업보다 더 둥근 형태로 나타나며 돌탑의 불안정한 모습이 더욱 두드러진다. 또한 인공 돌이 2개인 것에 비해 자연 돌의 개수가 5개로 더 많이 쌓아올렸다는 차이점이 나타난다. 세 번째 돌탑은 《제 4회 에꼴 드 서울(Ecole de Seoul)》에 출품된 작품으로 다른 돌탑과는 다르게 좀 더 각진 형태의 돌들이 쌓여져 대조적인 모습을 보이며 자연 돌 5개와 인공 돌 4개의 구성으로 전체 돌과 인공 돌의 개수가 앞서 보았던 돌탑보다 많게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돌탑 작업의 바탕은 박현기가 어릴 적 피난길에서 목격한 돌무덤과 한국 전통 교육의 가르침을 받은 것이 주된 계기라고 할 수 있다. 6·25 전쟁 당시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박현기는 부모와 함께 당시 대구 피난길 고개를 지나며 피난민들이 크고 작은 돌멩이들을 정성스럽게 쌓으며 돌무더기 앞에서 소망을 기원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피난 행렬 속 돌에 소망을 의탁해 전쟁이 끝나기를 빌었던 피난민들의 모습은 그의 머릿속에 강렬한 기억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러한 행위는 어떤 영(靈)적인 힘을 믿는 간절함으로부터 비롯된다. 전시상황에서 돌이라는 자연물을 통해 자신의 소원 성취를 비는 것으로 이는 한국 기복 신앙(祈福 信仰)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다. 오래 전부터 돌무덤이라는 것은 신앙의 상징물 역할을 해오기도 했다. 그렇기에 돌탑 작업은 박현기의 작업세계에 있어 자연적이고 동양적인 무속적 세계관이 잘 드러난다. 돌이라는 자연적 물질이 ‘쌓기’라는 행위와 결합하여 토템과 같은 모습으로 자연신앙의 지점을 잘 보여줄 뿐 아니라 무속성과 긴밀한 관계를 갖기 때문이다.
피난길 광경 목격뿐만 아니라 박현기는 유년 시절 여러 계기를 통해 한국적인 전통 요소들과 샤머니즘적인 것들을 직접 경험했으며 20대에는 자신이 여태껏 받아온 서구식 교육에 제도적 모순을 느끼며 자발적으로 옛 어른들을 찾아가 한국의 전통 교육 및 사상들을 배워나갔다.
신들의 무덤, 거처같기도 하며 묘한 장소로 기억하던 돌무덤은 토템으로서의 돌탑 작업을 만들어냈고 돌무덤에 기원하는 행위는 한국의 기복 신앙으로서 돌탑을 영적인 존재로 만들어냈다. 결과적으로 박현기의 신앙의 상징물을 목격한 경험은 그의 동양적인 정신 사상과 결합하여 돌탑이라는 무속적 토템 속성의 의미를 갖는 작업을 완성하게 된다. 당시 사회적으로 서구 문화와 환경들이 유입되던 혼란한 시기에 맞서 휩쓸리지 않고 우리의 정신을 찾고 호기심을 가지며 어떻게 하면 이러한 사상들을 작품에 담아낼 수 있을지 끊임없이 연구한 것이 그의 작품 속에 고스란히 드러나게 되었다. 이는 훗날 박현기의 비디오 작업에까지 영향을 미쳐 그의 작업 중 가장 핵심적이라 할 수 있는 <비디오 돌탑> 시리즈의 주춧돌이 되어 한국 미디어 아트의 중요한 흐름 중 하나로 자리 잡게 된다.
김지수 acupofmojit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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