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인숙 | 미술평론, 미학박사
예술가의 초상
하원․석정 천병근․한진수 아트리에 개관전
천병근, 한진수 ‘성북 아트리에’에서, 1962
한진수 ‘성북 아트리에’에서, 1962
1.
2023년 11월 강화군 선원면에 ‘하원․석정 천병근, 한진수 아트리에’(이하 ‘아트리에’로 칭함)가 개관했다. 아트리에 개관으로 천병근, 한진수 두 화가의 작품세계를 기릴 수 있게 되었고, 작품과 작가의 예술철학을 다각도로 조명할 수 있게 되었다. 아트리에 개관은 가족들의 염원이 맺은 결실이기도 하지만 두 작가의 작품을 언제라도 만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공적 기여도 상당하다. 천병근은 한국미술사에서 독자적인 초현실주의 풍을 남겼고, 한진수는 아카데미즘 양식의 범례를 한국미술사에 남겼다. ‘아트리에’를 통해 두 작가의 작품이 지속적이고도 안정적으로 소개된다면 작품과 작가연구는 물론 한국미술사의 폭을 넓히는데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요즘은 ‘아트리에’라는 용어는 잘 사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두 화백이 성북동과 아현동에서 운영하였던 미술연구소를 ‘아트리에’로 불렀기에, 미술관의 이름도 이 명칭을 사용했다고 한다.
‘성북 아트리에’ 안내지, 성북동 145-11번지, 1962
‘북아현 아트리에 천병근 미술연구소’ 안내지, 북아현동 1-319번지, 1963
아트리에의 개관전은 <예술가의 초상>이다. 두 화백은 무슨 마음으로 일평생 예술가의 길을 걸어왔고, 이들이 청년일 때, 그 열정과 작풍은 어떠했는지를 읽어보는 것이 이번 개관전의 취지이다. ‘예술가의 초상’이라는 표현은 자화상이나 초상화가 전시라는 구체적인 의미에 한정되기도 하지만 한 작가의 철학과 고유 양식 전반을 아우르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고 나아가 미술 자체를 지칭하는 용어로 이해되기도 한다.
아트리에 개관전 <예술가의 초상>은 두 예술가들의 청년기를 조망하는 전시회이다. 두 작가의 예술 여정에서 ‘초기’라 불러도 될 이 시기는 천병근에 있어 <삶>이 제작된 1953년 전후부터 1954년 첫 번째 개인전이 개최되고 이후 한진수와 결혼한 1960년 직전까지의 시기이다. 대략 1950년대 전개된 활동이 해당된다. 이 시기 천병근의 활동은 제1회, 제2회, 제3회 개인전과 1959년 <성미전>에서 확인된다. 한진수의 청년기도 1949년 대학 졸업, <녹미전> 결성, 대학원 진학으로 이어지며 어느 시기보다 창작에 몰두했던 시기였다. 한진수는 1945년 이화여자대학교 예림원에 입학함으로써 국내전문교육기관에서 수학한 최초 졸업생이 된다. 이번 전시에서는 1949년 이후부터 결혼이전까지, 대략 1950년대의 활동이 조명된다. 두 작가 모두 당시 20대의 청년이었다. 현대교육을 받은 전문가로서 이 시기야말로 청춘의 열정이 오롯이 담긴 풋풋하나 진지한 열정의 시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천병근의 대담한 실험과 한진수의 성실한 드로잉과 대상해석은 두 작가들의 역량이 얼마나 탁월했는지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천병근 < 자화상 >
Oil on Canvas, 46.5 x 26 cm, 1954
천병근, 도쿄 유학시절 아오야마 선교사 묘역에서, 1946년 경
청년 천병근과 한진수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현대미술에 천착해간다. 천병근은 재야의 성격이 짙은, 제도권의 외부 진영에서 활동을 전개해 가는 반면, 한진수는 국전을 통해 착실하게 화제(畵題)에 천착해간다. 천병근의 창작 방향은 1957년 제1회 현대작가초대전에 초청되었다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조선일보가 주최한 ‘현대작가초대전’은 국전의 아카데믹한 규범과 제도의 갈등을 넘어 국제적인 동시대성에 초점을 맞춘 최초 민전이다. 이외에도 천병근은 1950년대 개최된 현대미술 전시기획에 대부분 초청된 바 있어, 그의 개성과 현대성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김환기는 ‘병근 형’ 작품을 개성적이자 인간성에 본령을 둔 작품임을 강조하고 있고, 천병근 자신도 삶에 보람을 주는 것이 가치 있는 미술의 일이 아니겠는가 다짐하고 있다. 그에 반해 한진수는 서양화 도입에서 정착까지 한국에서 양화의 본령을 구축해갔다고 할 수 있다. 한진수는 동경미술대학교에서 유학한 심형구, 김인승에게 그림을 배웠다. 졸업전으로 반드시 자화상을 그리게 되어 있었기에 한진수 역시 자화상을 그렸고 주변 지인들의 초상과 인물을 많이 그렸다. 한진수의 작품은 드로잉, 펜화, 수채화, 유화 등으로 남아 있다. 한진수의 청년기의 작품들을 보면 성실한 수채화와 드로잉도 우수하지만 1970년대로 이어지는 정물도 조명할 만하고, 국전풍의 인물화 등도 일상에 머문 아카데미즘의 시선이 견고한 수작(秀作)이다. 무엇보다 한진수가 마주하는 사물은 모두 자신의 일상 속에서, 일상의 관계 속에 놓인 것들이다. 그의 일상에는 도시의 현대가 녹아 있다.
한진수 < 자화상 >,
Oil on Canvas, 44 x 37 cm, 1956
한진수, 이화여대 대학원 졸업전, 부모님과 함께, 1958. 3. 18 <한복 입은 여인>(우)과 <여인2>(좌)
제8회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경복궁 미술관, 右 한진수, 1959
2.
한진수(1927-)의 인물초상은 한국 아카데미즘의 전형을 보여준다. <한복 입은 여인>, <여인2>는 1958년 대학원을 졸업하던 해의 작품이다. <여인2>에서 한진수는 의자 배경을 추상적으로 거칠게 처리하고 오로지 인물의 안면과 스카프에 조명을 집중시킴으로써 인물의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의자에 정면으로 반듯하게 앉은 인물과 빛을 통해 한진수는 인물의 내면을 묘사한 것이다. <한복 입은 여인>의 경우는 측면으로 포즈를 잡은 인물화인데, 의자에 앉은 여인이라는 형식은 아카데미즘의 전형적인 포즈이다. 이 작품에서도 여인의 이마에서부터 핸드백을 잡고 있는 손가락 끝에 떨어지는 빛은 여인의 성격을 묘사하는 역할을 한다. 한진수의 빛 처리는 실내에 있는 인물을 관객의 관점에서 주목하는 마네의 빛 처리방식과 닮아 있다. 한진수 역시 도회지의 모던한 빛을 통해 개인의 내면 세계, 성격을 묘사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작가는 소박하게 자기 주변의 인물이나 사물, 대상에 관심을 두고 아카데미즘의 방식으로 묘출하고 있지만, 작품은 심리 묘사의 측면에서 현대적인 작가의 개성을 뚜렷이 보여준다. 실제로 한진수는 마리 로랑생의 ‘분홍빛 향기로움’ 속에 드러나는 작가의 독자성에 감탄한다. 한진수는 ‘살 것이 아니라 꿈 꾸어야 한다’는 마리 로랑생의 말을 반추하며 그녀의 개성을 매우 높게 평가한다. 피카소와 같은 거친 남성들의 세계에서도 마리 로랑생이 자신의 개성을 잃지 않고 자기 삶을 주도하며 대중으로부터 널리 인정받았다는 점 때문이다. 한진수 역시 자신의 개성을 한껏 발휘하며 화업을 통해 자신의 꿈을 이루고자 하였다. 그는 ‘그림에서 시(詩)를 찾을 수 있게’ 하고, ‘자연에 애정을 바치는’ 작업을 전개하였으며, ‘자연의 내적인 미’를 쫒아 자신의 작업을 추구해갔다. 한진수의 접근 방식은 아카데미즘 속에서 서양화를 구현하는 것이었고, 그녀는 결국 단단한 형식 속에 사물이나 인물의 성격을 실어내는데 성공한다. 1956년에 대학원에 입학하면서 제작된 <소녀>나 <자화상> 역시 추상적인 바탕을 배경으로 오롯이 안면에 집중하는데 그곳에서 인물의 성격이 드러난다. 성격을 묘사하는 이 심리극은 대상과 만남의 순간, 생생한 생명의 순간을 기록한 것이다. 한진수는 친지(親知)와 사물, 대상과의 관계에서도 보들레르처럼 순간의 조응(correspondence)을 시각의 언어로 보여준 것이며, 조응은 작가 한진수가 사물과 만나는 순간이자 생명의 순간이라 해석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한진수는 아카데미즘안에 있으면서 심형구와 김인승의 영향에서 벗어나 있다고 볼 수 있다.
조응은 ‘생생한 태곳적 생명의 순간’으로서 작가는 이것을 감각으로, 시각의 언어로 다시 구축한다. 한진수는 훗날 소녀의 모습에서 발견되는 ‘생기’를 찬탄하며 그 소회를 남긴 바 있다. 한진수가 스승의 영향 아래 화면의 구도나 소재의 선택을 전개해갔다면, 그 소재와 만난 감격은 일관성있게 뒷받침하는 ‘이미지를 구현하면서’ 회화공간을 구성한 것인 바, 이미지가 구축된 회화공간이 바로 한진수의 해석이자 감성인 것이다. 청년시기의 한진수는 대상과 이루어지는 만남의 순간에서 초래되는 감격을 시각 언어로 구조한다. 한진수는 기술에 충실한 성실한 보는 자로서 대상 내부로 길을 내는 화가라 할 수 있다. 얀 반 아이크가 묘사를 넘어 사물을 회화공간에 존재케 했다면, 한진수는 묘사를 넘어 내면의 진실을 화면에 살려내고 있다. 예를 들어 <한복 입은 여인> 등에서 보이는 인물의 성격 묘사가 바로 한진수 고유의 이미지가 아닐까 한다. 이런 의미에서 대상의 존재감을 기록하는 한진수는 최초 서양화의 유입으로부터 줄곧 전개되어 온 분야를 그 본령에 있어 심화하면서도 개성적으로 1950년대 아카데미의 고유 화풍을 남기고 있다.
천병근, 동생 병란과 함께 작품 〈삶〉 앞에서, 1953. 2.
제1회 개인전 《천병근 회화전》 목포 기독청년회관, 1954. 3. 27 - 31
3.
천병근(1928-1987)은 1945년 도쿄의 릿쿄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도쿄 YMCA예술원에 다니다 야마다 미노루에게 사사한다. 이후 1947년 4월에 귀국하여 목포공립중학교 미술교사로 교편을 잡고 남농 허건을 비롯하여 남도의 화가들과 폭넓게 교류한다. 1954년 26세때에는 목포YMCA기독청년회관에서 <삶>을 포함한 27점의 작품으로 제1회 개인전을 개최한다. 광주 미국문화원 화랑에서 1955년 8월 제2회 개인전을 개최한다. 개인전은 <광복절 기념 천병근 회화전>으로 총 22점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여기에 김환기의 ‘병근형의 예술’이 리플릿에 실린다. 김환기는 천병근 예술의 중심에는 무엇보다 ‘개성’이 자리 잡고 있고, 그 화풍이라는 것이 ‘향토적 냄새가 강렬’하다고 평가한다. 향토적 냄새는 결국 한국의 화가들이 성취해야 하는 숙명같은 과제이기도 하다. 한 해 뒤 김환기는 파리에서 보낸 서신에서(1956년) 예술의 최고 덕목이 ‘창조’임을 강조하며, 이를 대표하는 피카소가 얼마나 대단한지 언급한다. ‘뎃상’의 중요성을 모르는 우리 나라의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내용도 있다. 1950년대 전쟁 이후 한국미술의 상황은 국내전문교육기관에서 수학한 미술인구가 늘어나고 유럽이나 미국 등지로 유학을 가는 이도 점차 늘어난다. 해외 첫 기획전도 성사된다.(<한국현대미술전>, 1958, 이 전시에 천병근도 초대된다.(<귀향>, 1957) 방근택은 1959년 제3회 개인전에 부쳐 천병근의 작업을 ‘문서적 초현실주의’라고 명명한다. ‘문서적’은 문자를 활용하는 것과 추상화의 선적인 특성으로 인한 것인 듯하다. 초현실주의 운동은 문학과 시각적인 것이 혼융되어 문자, 영상이 모두 동등한 지위로 결합하는 방식이므로 ‘문서적’이라는 표현은 ‘문자’, ‘텍스트’ 등의 사건을 고려한 표현이라 파악된다. 방근택의 명명에서 볼 때 천병근의 작업은 한국미술사의 관점에서 볼 때 개성적으로 초현실주의를 전개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천병근 < 무제 >
Oil on Canvas, 91 x 45 cm, 1957
전쟁으로 피폐해진 현실 앞에 모두가 남루한 일상과 마주한 때가 1950년대이다. 전쟁 후 회복기를 거치면서 1950년대 후반부터는 세계적인 동향에 민감해지고 추상 경향의 작품들이 빠르게 수용되며 나름의 방식으로 추상이 실험되고 있었다. 해외 정보의 양도 많아질 뿐 아니라 교류도 자유로운 만큼 해외 미술동향에 대해 민감해진 것이다. 특히 피카소에 대한 관심이 상당했고 입체파적인 조형 실험들이 늘어나고 있었으며(예를 들어, 이수억, <6.25 동란>, 1954/ 김병기, <가로수>, 1956/ 박영선의 <파리의 곡예사>, 1957/ 한묵의 <가족(1957)등 도불 이전 한묵 작품들), 1950년대는 전반적으로 추상 경향의 작품들이 당대의 대표적인 흐름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와 더불어 조형적인 것에서 ‘한국적인 것, 향토적인 것’이 무엇인지 정체성에 대한 고민 또한 동시대 예술의 현안이었다.
천병근 역시 추상 경향의 작업을 전개하였다. 그의 추상성은 우연적인 흐름과 흐름을 타고 전개되는 운동에너지가 충돌하는 방식의 언어/이미지를 구사한다. 우연적인 흐름 속에 이미지나 기억을 길어내는 초현실주의의 방법이 자동기술법인데, 천병근의 형태들은 자동기술을 통해 이끌려나온 이미지들이다. 주제가 있는 경우라면 형상을 단순하게 추상화시켰고, 주제가 없는 순수 추상 작업의 경우는 형태간의 조응을 통해 화면을 전개했다. 면의 분할과 구성, 흐름의 충돌이나 부유하는 유동체, 분할면의 색채들 등이 천병근의 초기 작업에 전개되고 있다. 여기에는 입체파적인 화면구성이나 색채의 활용, 우연적인 만남과 에너지의 충돌 등 초현실주의의 기법들이 동원되었다. 천병근은 이런 자신의 작업에 대해 제3회 개인전의 작가노트에서 ‘붓은 캔버스 위를 춤추기 시작하고, 밤은 깊이 짙어만 간다.’고 술회하고 있다.
천병근 < 귀향 >,
Oil on Canvas, 45 x 91 cm, 1957
《한국현대미술전》 리플렛, 월드하우스 갤러리, 미국 뉴욕, 1957. 2. 25 - 3. 22 〈전설〉
천병근의 캔버스 위에는 항상 ‘향토적 냄새’가 물씬 담겨 있다. 토마스 A. 카실리의 감탄을 이끌어 낸 <삶>(1953) 그리고 <자애>(1956)에서 향토적 냄새의 면면을 확인해볼 수 있다. 한복으로 성장한 범부의 기도하는 모습이나 달항아리를 앞에 둔 모자상에서는 한복, 달항아리 등의 향토색 짙은 기물이 등장하고 있다. <자애>에서는 모자상을 통해 마리아와 예수의 모습을 묘사하고 화면에 성경의 구절을 적어 넣었다. 이런 방식은 양화도입과 근대식 제도의 도입으로 사라진 우리 전통서화의 찬(讚)이나 발(跋)을 적은 화중유시(畵中有詩)의 방식을 다시 살려낸 것 뿐 아니라, 매화꽃이 꽂힌 달항아리의 문자향(文字香)을 환기시킨다. 달항아리의 형태를 반복하고 있는 마리아 어깨 위의 태양과 분할된 선 그리고 색면 구성에서 천병근은 자신의 밤보다 깊은 향토색 냄새를 풍기고 있는 것이다. 한국 최초 해외 기획전에 초대된 <귀향>(1957) 역시 천병근의 고유한 화면 구성을 보여준다. 나목(裸木)이 기울어진 방향으로 구름이 흐르고 ‘우리의 집’ 형상은 길 잃고 집 잃은 난민의 처지를 대변하며, 강물에 비친 피란민들의 행렬은 형태의 반복과 반향을 통해 귀향의 정서를 깊이 각인시킨다. <귀향>에서는 반복과 반향이 형상을 통해 분명하게 제시되지만, 초현실주의 풍의 천병근의 다른 작품에서도 추상적 형태들이 반향되며 공통의 표현방법이 등장한다. 형태간의 반향과 조응을 통해 ‘초현실’을 화면으로 불러내는 방식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가 창안한 고유한 기법이다. <자애>에 등장하는 달항아리의 반향과 반복에서 형태간의 조응은 조선일보 주최 <현대작가초대전> 제1회에 초대된 <무제>(1957)에서도 읽을 수 있는데, <무제>에서는 색들 간의 반향으로 나타난다. <아가A>에서도 형태로 나타난 굵은 획들이 서로 조응하며 대응을 이루고 있다.
천병근 < 전설 >,
Oil on Canvas, 106 x 60 cm, 1959
작품 〈전설〉은 1959년 제3회 동화화랑 전시에서 발표되었다.
작품 하단에 적힌 글은 만해 한용운의 시 「알 수 없어요」이다.
독립운동가였던 부친 천세광 목사와 함께 독립운동을 펼쳤던
불교계 대표적 인물인 한용운에 대한 존경심을 작품에 담았다.
향토적 냄새로 표현한 우리 것의 표현에서 천병근은 종교적인 것이면서 동시에 회화적인 실험으로 내용을 전달하고 있고, 조응과 반향이라는 방법적인 실험을 이어가며 색면 구성을 통해 공간의 리듬을 창조한다. 천병근은 칸딘스키가 자신에게 타블로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고 하며, 마티스를 사모한 나머지 1954년 11월 3일 마티스의 죽음을 기념하여 특별한 세레모니를 거행하기도 했다고 한다. 마티스는 피카소 못지않게 색면의 구성을 통해 천병근에게 영향을 미친 작가이다. <전설>(1959)에서 천병근은 형태와 에너지의 반향을 표현하면서 절 표시와 집 형상을 결합시켜 동토를 표현하고 추상형상의 반향과 리듬으로 땅과 하늘의 조응을 구사하고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청년 천병근의 작품은 초현실주의 풍의 작품으로 향토색 냄새로 가득 찬 형태의 조응과 에너지의 반향으로 구성된 추상작업이라 할 수 있다. 1950년대 후반 이후에 전개된 드로잉과 수채화 등을 볼 때, 천병근은 호안 미로의 영향이 있었던 듯하다. 천병근이 초대된 전시의 바로 앞 전시에 호안 미로가 초대된 바 있었다는 점에 비추어보면 초현실주의 경향을 추구하던 천병근이 당연히 눈여겨보거나 탐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어째든 이후 전개된 추상화들은 프랑스 유학을 거쳐 말년에 다시 그리기 시작한 추상 경향의 원형들이다. 제주제일고등학교 재직 중 천병근은 강렬한 표현적인 어법으로 풍경을 구사하고 있다.
그렇다면 청년기의 천병근은 우리 것의 토대 위에 고상한 정신성의 추구와 그 명랑성을 상징화함으로써 자신이 추구했던 ‘미술의 보람’을 찾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천병근은 종교 화가로서도 훌륭하지만 그 도상의 깊이에는 고매하고도 진지한 미술인의 고민과 모색 그리고 방법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의 작풍(作風)은 전쟁이후 모더니즘을 구성해간 한국미술의 시대정신을 반영하면서도 그가 그다지도 중요하게 여긴 ‘개성’의 표현이 형태의 조응과 에너지의 반향이라는 두 가지 방법을 통해, 결국 한국적인 초현실주의 풍의 화풍으로 조성된 것이다. 에너지의 반향에는 유동적인 형상들의 반향(<전설> 1959)은 물론 색들의 구성을 통한 공간의 울림(<자애>, <무제> 등)도 포함된다. 천병근의 독자적인 화풍은 한국의 미술사 맥락에서 정확하게 자리를 잡아야 한다.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점은 방근택이 사용한 ‘문서적’ 용어의 의미에 관한 것이다. 천병근의 작업으로보아, 천병근이 문자나 시를 그림과 함께 구성한 것은 프랑스 초현실주의 운동의 이념과 같은 궤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향토적 냄새’를 풍기기 위한 조형적 고민이라 해석하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 왜냐하면 천병근의 작업에서 보이는 문서적인 것들은 의미를 무화시키기 위한 방법으로써 병치와 혼융을 활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김환기가 말하듯, 천병근의 ‘문서적인 것’은 ‘향토적 냄새’를 위한 것이다.
석정․하원 천병근, 한진수 아트리에의 초대전 <예술가의 초상>은 이 두 작가가 평생의 보람으로 키운 예술세계를 열어 보이는 출발점이다. 지금까지 두 작가와 관련된 여러 좋은 기획전이 있기는 하였으나, 전용미술관에서 섬세하게 예술가의 초상을 아주 찬찬히 들여다 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두 작가는 서로 다른 길을 통해 한국현대미술사의 두께를 만들고 있지만, 두 작가는 모두 사실상 ‘조응(correspondence)’에 천착한 것이 아닌가 한다. 한진수는 일상의 사물과 조응을, 천병근은 형태간의 조응과 반향을 전개하며 화면을 구사한다. 한진수의 청년기의 성실하고 진지한 수채화 풍경과 드로잉, 1970년대 내내 이어져온 정물 그리고 천병근의 제주 풍경, 자유로운 드로잉과 추상화, 종교화가 주는 드높은 정신성과 명랑성은 앞으로 ‘아트리에’에서 지속적이며 반복적으로 만나게 될 것이다. ■
■ 천병근·한진수: 예술가의 초상 [2023-11-01 ~ 2023-12-31] 아트리에하원석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