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출범한 광주비엔날레는 미술계 관계자뿐 아니라 많은 관객들이 찾는 세계적인 미술축제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일반 관객이 방대한 규모의 전시를 온전히 즐기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다.
본 연재는《2024 15회 광주비엔날레》(2024.9.7-12.1)와 관객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좁히고자 하는 것이 기획의 의도이다. 본 지면에서는 ‘광주비엔날레’가 아닌 전시 참여작가의 ‘개별 작업’을 다루게 될 것이다. 이 글이 관객으로 하여금 작가의 작품 세계에 보다 가까워지는 경험을 선사하기를 기대한다.
《2024광주비엔날레: 판소리, 모두의 울림》작품론
15회 광주비엔날레: 판소리, 모두의 울림 2024 9.7 - 12.1
이 작품에서 등장한 모든 이름, 인물, 사건들은 허구이며,
실존하는 인물, 장소, 건물, 제품과는 일절 관련이 없습니다.
이 작품에서 등장한 모든 이름, 인물, 사건들은 허구이며,
실존하는 인물, 장소, 건물, 제품과 뒤섞이고 있습니다.
혼종적 연속 간행물로써의 콜라주: 캔디스 윌리엄스(Kandis Williams, 1985-)의〈백인들이 우리를 모두 죽이기 위해 만들어 낸 신과 괴물들〉(2024) 연작
유진
제15회 광주비엔날레 본전시 《판소리: 모두의 울림 PANSORI: A Soundscape of the 21st Century》의 첫 번째 섹션 ‘부딪침 소리 Feedback Effect’는 관람자를 으스스한 경계공간, ‘리미널 스페이스’로 초대한다. 리미널 스페이스는 201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인터넷 용어로 분명 친숙하게 느껴져야 하는 공간이 묘하게 이질적이거나 공포스럽게 느껴지는 현상 혹은 장소를 의미한다. 일상 공간의 익숙함과 이를 이탈하는 느낌을 동시에 자아내는 리미널 스페이스에서 대개 우리는 현실로부터 서서히 유리되는 듯한 감각을 느낀다.
본전시 제1전시장 초입은 어두컴컴한 좁은 복도에서 도시의 소리가 들려오는 에메카 오그보(Emeka Ogboh. 1977-)의 사운드 스케이프〈Oju 2.0〉(2022)와 낮은 천장의 버려진 사무실을 연상시키는 신시아 마르셀(Cinthia Marthelle, 1974-)의 설치작업〈여기에는 더 이상 자리가 없어요〉(2019-2024)로 구성되어 폐소공포증적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일종의 리미널 스페이스로 기능한다. 이들의 작업을 걸어서 통과하며 관람자는 이곳이 익숙하면서도 동시에 매우 이질적인 공간임을 느끼고, 현실을 넘어서 어딘가 초현실적인 차원으로 이동하는 듯한 경험을 한다. 그리고 리미널 스페이스를 지나쳐 나온 순간 관람자는 미국 볼티모어 출생에 현재 LA와 베를린을 오가며 활동 중인 캔디스 윌리엄스(Kandis Williams, 1985-)의〈백인들이 우리를 모두 죽이기 위해 만들어 낸 신과 괴물들〉(2024) 연작을 마주하며, 이 부딛침 소리 섹션의 반향실 내부가 허구와 실재의 웅웅거림이 뒤섞이는 혼종 공간임을 직감한다.1)
공포영화는 무엇을 반영하는가?
2016년 ‘카산드라 프레스 Cassandra Press’라는 비영리 출판사를 공동 설립하기도 한 윌리엄스는 <우리들을 죽이기 위해 백인들이 만들어낸 신과 괴물들 gods and monsters that white people make up to kill us all> 연작에서도 편집인으로서의 능력을 가감 없이 발휘한다. 그는 이번 연작에서 할리우드 공포영화와 탈식민주의 역사서 모두를 한데 묶어 편집하는 대담한 편집인이 된다. <우리들을 죽이기 위해 백인들이 만들어낸 신과 괴물들> 연작은 말하자면 ‘할리우드 리포터’와 ‘탈식민주의 연구’를 한 군데 실은 묘한 연속 간행물인데, 이 연작에는 미국과 유럽의 오래된 공포영화 속 괴물 이미지와 식민역사를 담고 있는 다큐멘터리 사진이 한 화면 안에 콜라주 되어 모여있다. 1931년 작 ‘드라큘라’의 드라큘라, 1931년 작 ‘프랑켄슈타인’의 프랑켄슈타인, ‘아메리칸 사이코’의 패트릭 베이트먼, ‘나이트메어’ 시리즈의 프레디 크루거, ‘스크림’의 고스트페이스 등등 아이코닉한 할리우드 공포영화 주인공들이 사탕수수 농장 여성 노동자들, 1967년 디트로이트 사건에 참여한 사람들, 흑인 군인의 동등한 임금을 옹호한 노예 출신의 작가이자 미국 남북전쟁의 종군기자였던 제임스 헨리 구딩과 함께 화면 안에서 뒤얽힌다.
리처드 뉴비(Richard Newby)가 기사 「두려워하라: 공포영화가 미국에 대해 말하는 것 Be Afraid: What Horror Movies Say About America」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세계는 언제나 두려운 것이었고, 우리는 태초부터 두려운 존재와 함께 살았다. 뼈에 스미는 공포를 ‘무서운 이야기’로 승화하기 위해 인류는 가면을 만들고, 설화를 말하고, 동굴 벽에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그 오랜 기능을 이제는 공포영화가 대체하고 있다. 뉴비가 기사에서 분석한 것과 같이 ‘드라큘라(1931)’, ‘프랑켄슈타인(1931)’ 등의 1930년대 초창기 할리우드 공포영화는 대개 유럽 공포 소설에 뿌리를 두고 있다.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지 백오십여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대중문화산업이 유럽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1940년에서 1950년대에 이르면 유럽 문학의 영향에서 벗어나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의 사회적 상황을 반영하는 공포영화들이 대거 등장하고, 그 이후로부터 미국 공포 영화는 매카시즘과 에이즈 팬데믹, 9/11 트라우마 등 사회적 공포를 즉각적으로 반영하는 방식으로 제작된다. 여기에서 주목해 볼 점은 바로 이 공포 영화들이 단순히 사회적인 공포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특정한 사회적 가치나 욕망 역시 내포한다는 점이다.
윌리엄스는 작업에 등장하는 공포 영화 주인공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우리를 죽이기 위해 백인들이 만들어낸 신과 괴물들이지만, 동시에 픽션의 주인공들로서 언제나 카타르시스를 위해 바쳐질 제물이기도 하다. 이들은 잔인하고 두려운 대상임에는 분명하나, 이들의 운명은 결국 관객의 심리적 해방을 위해 존재한다. 이러한 공포영화적 상상력은 우리가 아직도 백인 중심의 사회·문화적 질서에 붙잡혀 있음을 드러낸다. 그의 콜라주 작업에서 괴물은 어디에나 있다. 윌리엄스의 작업에서 괴물은 미디어에서 과잉 생산되고 있는 백인 관리자, 주인공, 단죄자이기도 하고 동시에 할리우드 영화산업에서 항상 괴물로 묘사되어 온 유색인종, 여성, 퀴어, 식민지이기도 하다. 실재를 넘어선 픽션의 세계에서 괴물은 언제나 혼종적 상태로 등장한다. 그는 우리를 먹고 우리에게 먹힌다. 그는 살았으나 동시에 죽어있다. 피학과 가학의 욕망이 삶과 죽음을 오가는 대중문화의 괴물들 뒤에서 작동한다.
네크로폴리틱스: 누가 죽어야만 하는가?
윌리엄스는 <우리들을 죽이기 위해 백인들이 만들어낸 신과 괴물들 gods and monsters that white people make up to kill us all> 연작에서 공포영화 속 주인공들을 특정 시대에 국한하지 않고 폭넓게 가져온다. 그는 초창기 할리우드 공포영화 주인공들부터 시작해서 이천년대 등장한 캐릭터들까지 대중매체의 괴물들을 다양하게 콜라주 함으로, 그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특정한 시대나 특정한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대중문화 속 괴물 이미지’ 자체라는 것을 드러낸다. 그리고 현재까지 이어지는 영화·대중문화사 전반을 걸친 괴물 이미지가 미국의 식민·인종차별의 역사적 사건들과 함께 병치됨으로, 이러한 사건이 한 시대에 국지적으로 발생하고 종결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을 거쳐 이어진 식민주의 영향 관계 안에 존재함을 드러낸다. 특히 작품 하단에 콜라주된 2015년 발매 비디오 게임 《언더테일》의 주인공 ‘샌즈’와 눈이 마주칠 때 아직도 우리가 그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윌리엄스는 이미지를 활자처럼 다루며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여기저기에서 발췌하고 인용해 하나의 지면을 꾸민다. 이를 통해 이미지가 뒤에 도사리는 압도적인 매혹의 힘을 분산시키고 이를 읽을 수 있는 대상으로 전환해 배열한다. 그의 작업은 작업 속 이미지가 지시하는 그 대상이나 그 순간으로 앞으로 우리를 데려가기보다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이들을 읽게 한다는 점에서 사진적이라기보다는 텍스트적이다. 대중매체를 통해 이미 너무 소진되고 소모되어서 단독으로는 잘 읽히지 않는 가난한 이미지의 사회·역사적 맥락이 그의 편집을 통해 보다 명료하게 드러난다.
윌리엄스의 이러한 편집에는 네크로폴리틱스(necro-politics, 죽음-정치) 개념이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네크로폴리틱스는 아쉴 음벰베(Achille Mbembe)가 미셸 푸코의 생명정치(biopolitics)를 비판적으로 계승하며 주창한 정치학 용어으로, 특정 집단을 살아있으나 살아있는 자의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고, 광범위한 죽음의 상태에 처하게 하는 정치권력을 말한다. 그는 특히 제국주의 식민 통치를 주요한 네크로폴리틱 상황으로 설명한다. 윌리엄스는 네크로폴리틱스에 희생된 사람들과, 현실과 허구를 모호하게 뒤섞어 실재에 대한 공포를 픽션의 카타르시스적 공포로 대체하는 할리우드의 신과 괴물들을 함께 배치함으로 네크로폴리틱스와 문화정치가 어떻게 엮여들어가는지를 우리가 읽게 한다. 음벰베가 자신의 저작 『네크로폴리틱스』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네크로권력 아래에서는 “저항과 자살, 희생과 구원, 순교와 자유 사이의 경계는 모호하게 흐려진다.” 마치 공포영화 속 신과 괴물이 한 몸이 되어 얽혀있는 것처럼.
시력 보호를 위해 화면에서 한 발짝 물러서기
그런데 윌리엄스의 콜라주에는 우리의 읽기를 당혹스럽게 만드는 지점이 하나 존재한다. 바로 화면 위를 떠도는 여러 색점들이다. 작품 안을 가득 채운 빽빽한 얼굴들을 읽어가다 우리는 문득 그 주위에 부유하는 색점들을 발견하는데, 색점이 발생시키는 파열과 정지의 지점에서 이들이 존재하는 공간이 단순히 가상의 백지, 타블로 라사가 아니라 디지털 화면이나 인쇄물 안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실재인가 아니면 허구인가?
윌리엄스는 2016년 맥스웰 윌리엄스(Maxwell Williams)와의 인터뷰에서 서아프리카 사람들의 심리적 무력감을 분석하고자 한 일군의 오스트리아 정신분석학자들의 자료를 인용하며 특정 집단의 심리적 문제가 그들의 문화적 기반과는 별개로 식민주의와 인종주의라는 외부 권력의 강압적 구조에 의해 발생함을 지적한 바 있다. 이처럼 우리를 정체화하는 특정한 이미지는 사실 실재라기보다는 대개 허구 서사에 기반하고 있다. 우리는 언제나 이미지와 실재 사이의 간극과 파열을 느낄 수밖에 없다. 윌리엄스의 작업은 픽션 이미지와 실재(혹은 실재라고 우리가 믿는) 다큐멘터리 이미지를 병치하고 그 위에 우리의 읽기를 방해하는 색점을 배치함으로, 대중문화 이미지 뒤에 숨겨진 죽음과 폭력의 권력 구조를 가시화한다. 색점들은 우리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저기 드라큘라도, 킹콩도, 식민지 사람들의 비참한 삶도 백인이 만들어 낸 것이라면, 당신의 존재 역시 어떻게 허구가 아닐 수 있는가?”
윌리엄스는 콜라주 외에도 퍼포먼스 등의 다양한 작업을 전개하는 작가이다. 그는 2016년에 LA에서 진행한 〈Affect: Network: Territory〉 퍼포먼스에서 관객들이 퍼포먼스를 휴대전화로 촬영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권장했다. 그는 이러한 파생실재와 실재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는 과정을 통해서 점점 더 파생실재가 실재를 압도하는 이 세계에서 우리가 어떻게 단순히 방관자가 아니라 ‘사건과 함께하는 존재’가 될 수 있는지를 모색하고 있다. <우리들을 죽이기 위해 백인들이 만들어낸 신과 괴물들> 연작 역시 우리가 어떻게 백인 중심의 두터운 사회문화적 구조를 넘어 저 멀리 죽음의 상태에 가두어진 존재들과 함께 할 수 있는지를 모색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콜라주 위의 색점을 통해 화면 안에 존재들과 멀어져 한 발짝 물러서게 되지만, 그 간격을 통해 우리는 사건에 뒤얽힌 맥락에 귀를 기울이며 그 안의 구조를 읽기 위해 분투하게 된다. 무엇이 픽션이고 실재인지를 구분하기보다 그들을 뒤섞는 권력의 작동구조를 보기 위해 한 발짝 물러서기. 그것이 윌리엄스의 혼종적 간행물이 제시하는 ‘함께 (목격)하기(wit(h)nessing)’의 자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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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진
ANTIEGG의 그레이 파트의 시니어 에디터이며, 독립기획자·비평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1) 캔디스 윌리엄스 인스타그램 @kandis_williams
캔디스 윌리엄스, 연작 〈백인들이 우리를 모두 죽이기 위해 만들어 낸 신과 괴물들〉 중 〈무제〉, 2024,
나무에 종이, 콜라주, 색상 견본 및 접착제, 167.6 × 119.4 cm.
작가 및 하이디 갤러리 제공, 제15회 광주비엔날레 커미션. 사진: 이선명.
광주비엔날레 제1전시장 전경. 사진: 이선명.
'미술사와 비평'은 미술사와 비평을 매개하는 여성 연구자 모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