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출범한 광주비엔날레는 미술계 관계자뿐 아니라 많은 관객들이 찾는 세계적인 미술축제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일반 관객이 방대한 규모의 전시를 온전히 즐기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다.
본 연재는《2024 15회 광주비엔날레》(2024.9.7-12.1)와 관객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좁히고자 하는 것이 기획의 의도이다. 본 지면에서는 ‘광주비엔날레’가 아닌 전시 참여작가의 ‘개별 작업’을 다루게 될 것이다. 이 글이 관객으로 하여금 작가의 작품 세계에 보다 가까워지는 경험을 선사하기를 기대한다.
《2024광주비엔날레: 판소리, 모두의 울림》작품론
15회 광주비엔날레: 판소리, 모두의 울림 2024 9.7 - 12.1
프리다 오루파보: 강탈된 이미지의 귀환
조소연
《제15회 광주비엔날레: 판소리, 모두의 울림 Pansori, a soundscape of the 21st Century》≫(2024)(이하 ‘광주비엔날레’) 본전시 1전시실에 들어서면 프리다 오루파보(Frida Orupabo, 1986-)의 작업이 눈에 띈다. 오루파보는 나이지리아계 노르웨이 예술가로, 노르웨이에서 태어나고 그곳을 거점으로 활동하고 있다.1) 그는 혼합 매체와 콜라주를 통해 흑인 여성의 정체성과 신체, 역사적 기억을 탐구한다. 2017년 단체전을 시작으로 활동을 시작하며 다양한 온라인 자료와 역사적 이미지를 활용하여 흑인 여성의 모습과 삶을 재구성하고, 인종, 젠더, 식민주의의 상흔을 드러내 왔다.
오루파보는 신체의 파편적인 이미지를 모아 자르고 결합하는 방식을 통해 새로운 정체성을 상상하고 그 복잡성을 재구성한다. 그는 역사적 자료뿐 아니라 이베이(eBay), 텀블러(Tumblr), 핀터레스트(Pinterest), 인스타그램(Instagram), 게티(Getty), 알라미(Alamy) 등 다양한 온라인 플랫폼에서 이미지를 수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온라인상에 표류하는 자료들은 식민주의 문법에 의해 형성된 흑인 및 소외된 타자들의 시각적 정체성이다. 또한 이 자료들은 사람들이 구경할 수는 있지만 쉽게 사용하거나 소유할 수는 없다. 오루파보는 자신이 이미지를 사용하는 행위를 ‘허가받지 않은 소비’라고 칭하며, 좀 더 직설적으로는 강도질의 한 형태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의 콜라주는 주변화되고 대상화되어 축적된 흑인 여성의 시각적 이미지를 다시금 그의 손으로 빼앗아 오는 행위인 것이다.
작가는 처음부터 예술을 전공하지는 않았다. 오루파보는 노르웨이의 사르프스보르그(Sarpsborg)에서 태어나 오슬로(Oslo) 근교에서 성장했으며, 오슬로 대학교(University of Oslo)에서 개발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개발학을 공부하며 오루파보는 그 내용이 매우 유럽중심적이라고 느끼고, 비판적 시선을 바탕으로 흑인 페미니즘 및 성별과 인종에 관한 비판적 연구를 접하게 되었다.2) 특히 학부 시절, 그는 커뮤니티와 돌봄에 관한 벨 훅스(Bell Hooks)의 저서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이러한 관심을 바탕으로 사회학 석사 학위를 취득한 오루파보는 졸업 후 성 노동자를 위한 센터에서 사회복지 서비스를 제공했다. 센터에 방문한 성 노동자들과 상담하고 소통하는 경험은 오루파보가 흑인 여성의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조건에 관해 깊이 고민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오슬로 대학교 재학 중 오루파보는 필름 사진을 디지털화할 수 있는 스캐너를 구입해 이미지를 편집하기 시작했다. 데이비드 해먼스(David Hammons)의 신체 프린트에서 영향을 받은 그는 가족사진을 스캔하여 레이어링 작업을 하고 그 콜라주 작업을 인스타 그램 계정에 업로드했다. 이를 작가 아서 자파(Arthur Jafa)가 발견하고, 2017년에 개최된 전시 ≪전혀 가능성 없는, 그러나 놀라운 해석들의 연대기 A Series of Utterly Improbable, Yet Extraordinary Renditions≫에 오루파보를 초청했다. 오루파보의 예술가로서의 공식적인 이력은 이 전시로부터 시작했다고 서술할 수 있겠지만, 실은 그의 작업에는 훨씬 이전부터 사회학자로서 배우고 훈련한 경험의 결과물이 녹아들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오루파보의 시선을 잘 보여주는 작업으로 이번 광주비엔날레에 출품된 작업 중 <파편 II Fragments II>(2022)을 제시하고 싶다. [도판 1] 자본주의 온라인 플랫폼에 묶여 있던 이미지를 훔쳐 왔다는 점을 강조하듯, 작업에는 홈페이지의 워터마크가 그대로 남아 있다. 왼쪽 위에는 여성의 유방 이미지가 위치해 있으며, 중앙에는 무표정하고도 깊은 눈빛으로 관람객을 응시하는 흑인 여성의 얼굴이 자리 잡고 있다. 여성의 얼굴에는 관객에게 당장이라도 말을 걸 듯한 묘한 고요함과 힘이 담겨 있다. 작업 전체에 걸쳐 각기 다른 각도와 위치에서 촬영된 모호한 이미지들이 불완전하게 이어져 있는 모습은 흑인 여성들이 역사적 맥락에서 어떻게 파편화되고 대상화되어 왔는지를 상기시킨다. 오루파보는 이 콜라주를 통해 흑인 여성의 다층적 정체성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며, 관객에게 이 파편들이 단순한 신체적 구성물이 아닌, 한 개인의 내면과 서사를 담고 있음을 환기한다.
또 다른 출품작 <사건수면 Parasomnia>(2022)에서는 한 여성이 남자의 몸을 껴안고 냉정한 얼굴을 내밀고 있으며, 악마가 여자 위에 앉아 있다. [도판 2] 이 작업은 18세기 화가 헨리 푸젤리(Henry Fuseli, 1741-1825)의 작품 <악몽 The Nightmare>(1781)을 떠올리게 한다. 푸젤리 작업에서의 여성은 붉게 상기된 뺨과 풍성한 금발 머리, 굴곡지고 탄탄한 몸매를 얇게 감싸고 있는 천 등 정형적인 백인 여성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여성은 악마의 아래에 무력하게 누워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반면 오루파보의 작업에 나타난 여성은 백인 남성으로 보이는 한 사람을 껴안고 있다. 안겨 있는 남성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있으며 뒷모습만 보여 그 사람의 주체성을 암시할 수 있는 어떤 요소도 없다. 그러나 이 작업에서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을 나타내는 가운데의 흑인 여성은 약간의 미소를 머금은 무표정으로 관람객을 무심히 응시한다. 이 작업에서의 여성은 더 이상 무력하지 않으며, 악마는 여성에게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듯 보인다.
상술한 작업에서 주목할만한 점은 흑인 여성들의 얼굴이 대부분 무표정, 담담한 표정으로 관람객을 응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루파보는 “시선이라는 요소는 강렬하다. 식민지의 역사에는 대상화되고 폭력적인 측면이 있다. 따라서 역으로 응시하는 시선은 저항과 힘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되돌아보는 것은 대상화를 거부하는 방식이다. 그것은 소리 없이 말을 하는 방법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3) 무표정하지만 힘과 깊이가 있는 표정으로 말없이 관람객을 바라보는 여성은 마치 페미니스트 슐라미스 파이어스톤(Shulamith Firestone)이 저서 『성의 변증법 The Dialectic of Sex』(1970)에서 언급했던 ‘미소 보이콧’을 떠올리게 한다. 파이어스톤이 제시하는 여성은 남을 기분 좋게 해주는 미소를 즉시 포기한다. 이제 그는 자신을 온전히 기쁘게 하는 일에만 웃으며, 식민지 역사와 같은 폭력과 저항의 역사를 바라볼 때는 담담하고 강렬한 무표정을 짓는다.
‘여성의 표정’이라는 맥락에서 오루파보는 흑인 여성의 복잡한 감정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작업을 전개하기도 했다. 2022년 《케이프 타운 Cape Town》 전시에 출품된 <헤어 롤러 Hair Roller>(2022)는 찌푸린 표정으로 헤어 롤러를 감고 있는 젊은 흑인 여성의 초상을 그려냈다. 작업에 나타난 여성은 붉은 바지와 커다란 셔츠를 입고, 파편화되어 겨우 맞추었기 때문에 잘 맞지 않는 손과 움츠러든 자세로 머리를 스타일링한다. 현대의 많은 흑인 여성들이 아프리카계의 문화적 유산을 상징하는 심한 곱슬머리를 일자로 펴거나 가발로 가린다. 이 과정에는 수많은 시간과 경제적 비용이 소요된다. 즉, <헤어 롤러>의 여성은 흑인 여성들이 자주 겪는 사회적 압박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이 작업을 통해 오루파보는 흑인 여성의 분노, 실망, 불편감 등을 날 것으로 드러내며 흑인 여성의 스타일링과 개성 표현에서 나타나는 복잡한 감정에 대해 이야기한다.
한편, 이번 광주비엔날레에서는 여성의 표정과 응시를 활용한 작업뿐만 아니라 여성의 파편화된 신체를 활용한 다양한 작업들을 볼 수 있었다. 오루파보의 <무제 Untitled>(2019)는 불완전한 입술 이미지 4개를 입술 부위를 클로즈업하고 있는 작업이다. 입술은 특정한 인종이나 성별을 지칭하고 있지는 않다. 말을 하려는 순간 찍힌 입, 이가 부러져 있는 입, 혀에 구멍이 뚫려 있는 입, 손가락을 입에 넣고 있어 불안하고 비위생적으로 보이는 입은 온전하다고 여겨지는 입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무제>는 ‘완전하지 않은’ 입술 이미지들을 통해 인종, 성별, 그리고 신체적 차이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여성주의적 서사를 제시한다. 입술에 빠진 치아와 혀의 구멍은 말과 표현을 제약하는 억압의 흔적으로 보일 수 있으며, 사회가 규정한 ‘온전함’과 ‘아름다움’의 기준을 거부하는 강렬한 비판으로 작동한다. 이러한 작업은 신체적 결함을 통해 오히려 주체성을 재구성하는 오루파보의 시각이다.
이처럼 오루파보의 작업은 흑인 여성의 신체와 정체성을 재구성하는 강렬한 예술적 실천을 드러내 왔다. 그는 그간 백인남성중심주의에 의해 형성되어 온 사회적 고정관념을 뒤엎고, 식민지 역사와 같은 역사적 억압 속에서 침묵을 거부하며, 대상화된 시선을 저항하고 갈취한다. 표류하는 이미지들을 재조합해 시각적 주체성을 창조하는 일은 어떤 틀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신만의 목소리로 흑인 여성의 복잡한 감정선을 드러내는 오루파보의 여정이다. 그의 작업은 그 자체로 저항이자 선언이며, 예술을 통해 우리가 마주해야 할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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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소연 (1996-) chelsea8672@gmail.com
이화여자대학교 일반대학원 미술사학과 수료. 이강소작업실, 대안공간 루프,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연구센터에서 코디네이터 및 연구용역으로 근무했다. 여성주의와 사회참여적 예술에 관심을 가지고 ≪호모 아르스 Homo-Ars≫(2022,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원본 없는 판타지 Fantasy without Original≫(2023, 온수공간) 등을 공동 기획했다.
1) 프리다 오루파보는 오슬로 대학교에서 개발학 학사를, 사회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의 작업은 노르웨이의 쿤스트할 트론헤임(Kunsthall Trondheim), 암스테르담의 후이스 마르세유(Huis Marseille),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쿤스트네르네스 후스(Kunstnernes Hus) 등에서 전시되었으며, 구겐하임 미술관(New York), 페레즈 미술관(Pérez Art Museum), 파리의 카디스트 재단(Kadist Foundation) 컬렉션 등에 소장되어 있다. 작가의 홈페이지와 인스타그램은 다음을 참고. https://fridaorupabo.com/ @nemiepeba
2) Frida Orupabo’s interview with Maya Binyam (April 25, 2022)
3) Frida Orupabo’s Interview with Karolina Modig (2024), https://bonnierskonsthall.se/en/utstallning/frida-orupabo/interview-frida-orupabo/
프리다 오루파보, <파편 II Fragments II>, 2022, 산성 없는 반광택 용지에 안료 인쇄, 플렉시 프레임, 175x117x6cm
프리다 오루파보, <사건수면 Parasomnia>, 2022, 자작나무 패널에 종이 핀으로 콜라주, 116x190cm
'미술사와 비평'은 미술사와 비평을 매개하는 여성 연구자 모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