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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아트] 걸어다니는 미술사전 김달진

관리자



#장면 1

1972년 여름 어느 날 홍익대 박물관장실. 어렵사리 이경성 관장을 만난 고교 3년생이 쑥스러운 표정으로 커다란 보따리를 끌러놓는다. 켄트지를 철끈으로 묶은 스크랩북 15권이 나온다. 지난 몇해 동안 잡지와 신문에서 오린 미술기사들이 빼곡하게 붙어있다.
"저는 미술자료 모으는 일을 아주 좋아합니다. 이런 작업이 의미가 있을까요." 이관장은 "훌륭한 일"이라며 "자네를 기억해두겠다"고 격려해 준다.

#장면 2

81년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실. 이경성 관장에게 한 청년이 찾아온다.
"자네가 그때 그 학생이로구먼." 청년은 부탁한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꼭 일하고 싶습니다. 화장실 청소라도 하겠습니다." 이관장은 그 자리에서 서무과장을 불러 "자리를 마련해보라"고 지시한다. 청년은 이듬해부터 일당 4천5백원의 일용잡급직으로 국립현대미술관 자료실에서 근무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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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걸어다니는 미술 사전''인간 자료실'로 불리게 된 김달진(47)씨의 첫 날갯짓이었다. 그는 몇년 안돼서 '국립현대미술관의 보배'로 떠올랐다. 96년까지 14년여 동안 일하면서 미술작가 3천5백명의 자료 카드를 정리해놓은 것 때문만이 아니다.

우편으로 접수되는 미술자료를 앉아서 챙기지 않고 직접 현장을 뛰어다니며 수집하고, 실제 전시와 팸플릿이 일치하는지 등을 살피고 꼼꼼히 정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붙은 별명은 '금요일의 사나이'. 전시 개막이 몰리는 금요일마다 커다란 쇼핑백과 가방을 양손에 들고 시내 미술관과 전시장을 순회하는 모습이 워낙 유명했기 때문이다.

82년에는 결혼식 전날 동숭동 문예진흥원 전시장에 자료가방을 메고 나타나 화제가 됐다.
"전시자료는 한주일 단위로 챙기고 정리합니다. 현장을 놓치면 큰일 나는 줄로 알았지요."

축적한 자료를 토대로 그동안 잡지와 신문에 1백20편의 글을 발표했다. '관람객은 속고있다''60여개 미술공모전, 그 실상과 허상''오류많은 문예연감'등은 미술계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이를 모아 95년 '바로 보는 한국의 현대미술'(발언)을 펴냈다. 꼼꼼한 연표와 수많은 참고자료를 싣고있어 우리 미술사 연구에 필수자료집의 하나로 꼽힌다.
출판기념회 때는 이두식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을 비롯해 미술계 원로.중진 3백여명이 참석했다. 10급 공무원의 출판기념회가 이처럼 성황을 이룬 것은 우리 사회에서 보기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미술계에 있으면서 김달진을 모르면 간첩'이라는 말이 생긴 데는 이유가 있다. 평론가든 작가든 그에게 미술자료를 빚지지 않은 사람은 드물기 때문이다.
요즘도 그에게는 하루에도 대여섯통의 문의전화가 걸려온다. 과거의 전시 팸플릿을 잃어버린 작가나 자신의 글이 실렸던 잡지를 확인하려는 평론가들의 전화가 많다.

그뿐 아니다. "지난해 국내에서 열린 미술전시회는 횟수는?" "최근 문을 닫거나 새로 연 화랑은?" "특정 작고작가의 생몰연대와 활동상은?" "미술인 동호회와 미술상 시상제도의 갯수와 특징은?" 이같은 질문들에 그는 답을 갖고있다. 웬만한 작가의 나이와 출신 학교.작품 경향 등은 모두 암기하고 있을 정도여서 '걸어다니는 미술사전'으로 통한다.

그는 96년에 기능직 10급 공무원 생활을 접고 가나아트 센터로 직장을 옮겨 5년여 동안 자료실장 등으로 근무했다.

지난 연말에는 자신의 이름을 딴 미술연구소(02-3217-6214)를 내고 독립했다. 이호재 가나아트 대표의 배려로 센터 자료실을 무료로 연구소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김달진 미술연구소' 의 첫 작품은 지난 1월 창간호를 낸 월간 '서울 아트가이드'다. 서울을 중심으로 전국 1백68개 전시장의 전시 정보와 토막 소식 등을 담아 3만부씩 발행하는 무가지다.

"미술계 전체를 위해 꼭 필요한 소식지입니다. 회원 가입 화랑과 광고가 늘고있어 멀지않아 적자를 면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연구소는 가이드를 3월호부터 현재의 12면에서 16면으로 늘릴 예정이다.

"연구소 운영이 안정되면 작가별 자료관리를 해주고 싶어요. 자료가 없어져서 잊혀지는 작가와 작품이 너무 많거든요. 작고 작가 인명록을 만드는 것도 시급한 과제입니다. 제가 1천2백명을 정리해놓고 있지만 아직 부족합니다. 미술계 주소록도 제대로 된 것이 없어요. 앞으로 풀어나가야 할 숙제들이죠."

*** 김달진 소장은…

"누가 억지로 시켰으면 절대로 계속할 수 없었을 겁니다. 내가 좋아서 취미로 시작했던 일입니다. 그게 직업이 되고 사회의 인정도 받으니 행복합니다. 천직이라고 할까요," 1997년 월간미술 대상 특별부문 장려상을 받았을 때 수줍어하며 한 말이다.

그는 기존 자료의 오류를 바로잡는 파수꾼으로 이름 높다. 월북작가 김용준(1904~67)의 중앙고보 시절 학적부를 발견해 한자 이름이 기존에 알려진 것과 다름을 밝혀낸 것도 그다.

지난해 이인성 회고전 때는 '노란 옷을 입은 여인'에 적힌 작가 사인과 제작연대가 사후에 추가된 것임을 밝혀냈다. 90년 발행된 한국 '근대회화 선집'에 작품이 실렸을 때는 사인이 없었다는 점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고졸이었던 그는 85년에 성균관대 한국사서교육원을 수료해 2급 사서 자격을 얻었고 93년엔 서울산업대 금속공예과를 졸업했다. 99년엔 중앙대 예술대학원에서 '국내 미술자료 실태와 관리개선 방안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박사과정 진학이나 대학강사가 된다는 꿈은 갖지 않는다고 한다.

'돈이 되지 않는'미술 자료에만 매달리다보니 지금도 서울 남현동의 18평짜리 단독주택에서 전세를 살고있다. 그는 아내와 아들.딸이 "훌륭한 일을 하시는 것"이라며 성원을 보내주는 것이 가장 고맙다고 한다.

글=조현욱.사진=박종근 기자

- 중앙일보 2002. 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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