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인터뷰 <김달진미술연구소장 김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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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인터뷰
김달진미술연구소장 김달진
藝人의 癖, 미술자료의 대가를 만나다
대담 : 송용근 (본지발행인)
글․사진 : 정민성
방대한 양의 미술관련 단행본, 연속간행물, 미술인 파일, 신문기사 등의 데이터베이스(DB)와 함께 각종 미술계 소식을 전하는 월간 『서울아트가이드』의 발간, 온라인상의 풍부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달진닷컴(www.daljin.com)의 운영 등으로 국내 미술정보센터의 요람이라고 할 수 있는 김달진미술연구소.
이곳 김달진 소장은 자료의 대가로 유명하다. 미술계에서 자료하면 김달진이라 통할 정도로 그가 지난 37년간 모은 자료들은 엄청난 양과 실적을 자랑한다. 김달진미술연구소에서는 4,000여 권의 단행본을 비롯해서 미술잡지 8종(24,995건), 폐간미술잡지 16종(4,046건), 미술학회지 24종(1,591건)의 정기간행물을 검색․색인할 수 있으며, 미술창작인과 비창작인을 비롯한 미술관계자 2,800여 명의 인명사전을 찾을 수 있다.
김달진미술연구소가 통의동으로 둥지를 옮기고 5월에는 일반에게도 개방하여 새로운 도약을 시도한다. 이를 앞둔 지난 4월 12일 서울 통의동 김달진연구소에서 미술자료계의 신화로 불리는 김달진 소장을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았다.
- 이번에 김달진미술연구소를 새로 이전하셨습니다. 그간 모아온 방대한 양의 미술자료를 일반과 대중에 공개하기로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정보화사회 시대가 되면서 예전보다 자료를 쉽게 찾을 수 있는 방법들이 많아졌습니다. 인터넷이나 디지털 검색 등을 이용하면 간단하죠. 하지만 자료라는 것은 1차적으로 실물을 봐야 하는 경우가 반드시 있습니다. 화집(畵集)이나 잡지는 이런 것이 더 중요한 데도 오히려 찾기가 어렵죠. 국립현대미술관이나 한국미술기록보존소 같은 곳의 경우도 물론 장서의 양이나 정리된 것으로 보자면 잘 되어있겠지만, 접근성의 측면에서는 용이하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동안 제가 모아왔던 4000여 권의 단행본 등의 자료를 공개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자료도 디지털화와 데이터베이스화가 중요합니다. 아직은 미흡하지만 지금 있는 책들의 분류 소프트웨어 작업도 다 끝났고, 누구라도 손쉽게 자료를 검색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놓았습니다. 작가 개개인에 대한 파일도 하나하나 정리해놓았기 때문에 이름만 가지고도 필요한 많은 것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런 자료들은 저 개인보다는 분명 사회적이나 공적으로 공유하는 것이 더 이롭고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번에 이곳 통의동으로 이전하면서 일반과 대중에게 공개하고자 마음먹게 되었습니다.
사실 자료 공개와 열람에 있어 유료화를 할 것이냐 하는 문제로 고민이 많았습니다. 저 개인의 자료가 아니기 때문에 고민이 많았죠. 이곳이 장소도 장소거니와 서울아트가이드를 만드는 등 업무 장소이기도 합니다. 체제 없이 공개되면 오히려 자료를 찾으러 온 사람들도 불편할 수 있고, 저희 업무도 지장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작은 돈이라도 입장료를 받으려고 합니다. 저만의 자료가 아니라고 늘 생각해왔기 때문에 사실 참 불편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영리를 위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상징적으로 자료의 소중함을 알고 더 소중히 다루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회원제나 예약제로 자료 열람신청을 받을 생각입니다.
- 미술자료라는 정의 자체도 생소했던 시절부터 금요일의 사나이걸어다니는 미술사전 등으로 불리며 자료수집을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어떻게 오늘에 이르게 되었는지요.
처음에는 모으는 재미였습니다. 자료라는 개념도 없었고, 단순한 취미가 천직이 된 거죠. 어릴 때부터 기념우표가 나온다고 하면 남보다 먼저 우체국에 달려가 구입했고,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각종 잡지에 소개된 미술 관련 자료들을 보이는 대로 모았습니다. 청계천 헌 책방을 뒤지고 그림 한 장 때문에 잡지도 낱장으로 팔라고 때를 쓰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자료를 모으다보니 집에서는 걱정이 많았죠. 공부는 안하고 이상한 것에 매달린다고요. 그래도 이 때부터 미술계로 나가야겠다고 마음먹고 자료들을 정리했습니다.
미술일을 하고자 마음먹고 각 일간지, 월간지, 박물관 등지에 저를 소개하는 내용을 보냈었는데 답을 주는 데가 없었습니다. 그 때 이경성 관장님(당시 홍익대 박물관장)을 찾아뵙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어린 녀석이 열다섯 분량의 스크랩북을 싸들고 찾아가 뵌 인연으로, 이후 관장님이 국립현대미술관장으로 부임하셨을 때 자료수집담당으로 저를 부르신 거죠. 그 때부터 15년 정도 자료정리와 수집을 했었고, 가나아트센터로 옮긴 이후에도 금요일이면 허름한 가방을 들고 인사동이나 전시장들을 돌아다니면서 도록이나 팜플렛 등을 다 모아서 집에 들어가곤 했습니다. 자료란 것은 정확함을 요구합니다. 팜플렛을 보면서 전시장을 들어서면 작품 하나하나를 셌습니다. 몇 점 출품이라고 되어있으면 정확하게 그것이 맞는지 확인하려고 그랬던 거죠. 미쳐야 뭐가 된다고 하지요. 그렇게 오로지 이것만 생각하면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사실 아무도 바라보지 않던 분야에 오래 일을 하다보니 자료에 대한 기억이나 정리가 머릿속에도 차곡차곡 쌓이게 됩니다. 웬만한 활동작가가 어디 출신이며 누구에게 사사하고 데뷔를 언제 어디서 했고 중요한 약력과 전시는 무엇인지 다 머릿속에 있습니다. 한 쪽에 집중하고 신경을 쓰다보면 자연히 그쪽으로 머리도 발달하는가 봅니다.
- 자료수집의 노하우가 있다면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에피소드들도 많을 것 같은데요.
지금 저는 운이 좋은 편입니다. 언론에 노출되면서 도움을 많이 받았지요. 월간『전시계』에서 사환급 기자로 일할 때나 국립현대미술관 시절에는 자료를 일부러 찾으러 간다고 선배들에게 눈총도 많이 받았습니다. 알아서 보내면 받고 아니면 전화로 보내달라고 하면 될 걸 왜 사서 고생이냐고요. 아무래도 당시 소극적인 공무원 사회에서는 제가 이상한 거였죠. 막상 전시장에 가서도 의아한 눈초리로 보며 도록이나 책자를 잘 주지 않으려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자료는 1차적인 것이 중요하고 정확성이 생명입니다. 발품을 팔아서 확인을 하고 손에 들어야 안심이 됐습니다. 결혼식 전날에도 중요한 전시가 있어서 꼭 봐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에 인사동을 돌아다녔습니다.
요즘은 인터뷰 등을 통해 연구소가 언론에 알려지면서 자료를 공유하고 제공받으니 그 때에 비하면 참 많은 발전이 있는 겁니다. 그래도 중요한 전시나 자리는 아직도 직접 다니고 발품을 팔아야 하는 것이, 이 일이 천직이라 생각됩니다.
- 미국이나 유럽의 선진국들이 대형 박물관이나 공공기관을 통해 대규모로 체계적인 작품관리나 자료수집을 하는 것에 비해 우리나라는 그 점에서 많이 미흡한 것이 사실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우리나라 정부도 정부 나름의 지원을 하고 있긴 합니다. 국립현대미술관이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자료와 정보를 모으고, 해외전시를 하는 작가한테 지원도 합니다. 그런데 정부가 작가나 갤러리에 해외전 지원을 하면서 화랑이 장사하러 가는데 왜 국가에서 지원을 하냐 라고 말한다는 것도 들었습니다. 지금도 정부 차원의 투자나 인식은 많이 부족하다는 겁니다. 해외전은 한국현대미술을 외국에 알리는 것인데도 단순한 지원이나 생색 수준에서 그치는 것이지요. 기초적인 지원이 필요합니다. 예산을 투입해서 사서를 늘린다든지 전시를 기획한다든지 전략적인 지원을 해야 합니다.
자료에 대한 투자 역시 미흡하지만, 자료는 기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료를 베이스로 해야 나중에 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자료의 정리와 보급, 확산, 축적 등이 순차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겠지요. 제가 하고 있는 일이 처음엔 좋아서 한 것이지만, 이런 자료의 수집이나 보급이 절대 개인의 일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지금까지도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셨지만 좀 더 정책적인 마인드를 가진 사람들이 일선에 나서서 문화적 지원과 후원을 하는 제도적인 보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 미술시장이 장기적으로 침체분위기에 있습니다. 서예계도 예외는 아닌데요, 작가가 아닌 객관적으로 서예계를 바라볼 수 있는 전문가 중 한 사람으로서 작가가 일반인(관객)과 함께 호흡하며 시장에서 생존하기 위해 현실적으로 어떤 것들이 필요할까요.
제가 보기에 서예계에서는 일반적으로 프로와 아마추어의 구분이 어려운 것 같습니다. 여기로 시작하시는 분도 공모전에서의 수상이 프로 작가로 평가하는 잣대가 되고, 전시가 있으면 일반인이 매입하기보다는 제자나 지인이 구입하게 되고, 이런 것들이 현실로 나타나기 때문에 변화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서예도 서예로서의 예술성을 일반인들에게 보급․계몽해서 작품을 인정받아야 합니다.
사실 글씨는 아무래도 형상성의 문제에서 그림이라든지 문인화에 비해 일반인에게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찾는 사람들도 같은 서예에서도 문인화를 선호합니다. 서예는 서예만의 독특함, 그림에서 담아낼 수 없는, 단 몇 글자 속에 뜻을 내포하는 사상의 함축성 등을 살려내 총체적으로 실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일반인들에게는 무언가 각인시켜야 합니다. 서예를 얘기할 때 딱히 서예가가 몇 분 떠오르지 않습니다. 서예계를 대표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어야 얘기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작품에 대한 서로의 잣대는 다르기 때문에 평가도 다르지만, 일반인은 작가의 이름만으로 작품을 평가하기도 합니다. 스타라고 하긴 그렇지만, 서예를 대표하는 작가가 필요합니다. 작가가 프로로서 자리매김하고 서예의 브랜드 네임 밸류를 갖추어야 침체된 서예가 살아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앞으로의 바람이나 목표하고 있는 계획이 있다면 말씀해주십시오.
제가 하고 있는 일은 결국 개인의 것이 아니고 나라의 것입니다. 지금 일반에 자료를 공개하기로 한 것도 어렵사리 장소를 마련했기 때문인데, 사실 이 정도도 많이 부족합니다. 자료들을 좀 더 국가적이나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도록 지원이 필요합니다. 문화관광부에도 찾아갔었습니다. 가지고 있는 모든 자료를 다 공개하겠다, 장소만 제공해달라, 헌데 그쪽에서는 예산 문제도 있고, 한 개인에 대한 지원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해서 난색을 하는 겁니다.
5월부터 연구소의 문을 열게 됩니다. 사람들이 정책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다면 머지 않아 국가적인 차원이나 기본적인 지원이 있을 겁니다. 가지고 있는 실체가 분명하다면 곧 국가적인 차원의 지원이 올 거라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모은 자료를 바탕으로 늘 준비하고 있어야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본격적으로 공유하고자 하는 욕심은 많지만, 의미를 생각해봤을 때 개인이 모아서 개인이 활용했던 것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준다는 것에서 저희 연구소가 가지는 메시지도 크다고 생각합니다. 미술전문사서로서 제가 가진 노하우(knowhow)를 알리고 싶고, 그보다 노웨어(knowwhere)― 앞으로는 찾고 있는 자료가 어디 있느냐 하는 검색 기술과 지식이 중요합니다 ― 이런 것들을 사회에 환원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판례를 만들어 가는 일, 그것이 제가 해야 할 일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 월간 묵가 2007년 5월호 P 58 - P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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