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20일 미국 뉴저지에서 관장님을 뵙고 오면서 언제 또 뵐 수 있을지 아쉬운 마음에 발길을 돌렸습니다. 물리적 나이 때문에 타계하신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조금 더 사셔서 한국 미술계를 위해 일해주셨으면 하는 마음에 아쉽고 서운함이 큽니다.”
김달진미술연구소의 김달진 소장이 3일 자신의 멘토 고 이경성 인천시립박물관 초대 관장의 유골함이 있는 시립박물관을 찾았다. 이날 하루 미국에서 온 이 관장의 유골함이 박물관에 있을 것이란 소식을 듣고 급하게 서울에서 인천으로 왔다. 문상을 마친 그는 유족들과 고인에 대해 이야기하며 고 이 관장을 떠나 보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스승을 잃은 슬픔과 함께 좋은 곳으로 가셨을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가득했다.
고 이 관장의 타계 소식은 유족 못지 않게 그의 가슴 한 쪽이 저려오는 소식이다. 까까머리 고등학생 시절 고 이 관장과 맺은 인연은 지금의 그가 자료수집전문가로 서 있기까지 그의 든든한 버팀목이 돼줬기 때문이다.
“처음 선생님을 마주했을 때 무척 떨렸어요. 전 아직 학생이었고 관장님은 한국 미술계를 이끄는 분 중에 한 분이셨어요. 그런 제가 관장님을 마주한다는 게 얼마나 설레는 일이었겠어요. 처음 뵙자마자 넙죽 절부터 하고 중학교 시절부터 모아 온 미술관련기사 스크랩북을 보여 드렸습니다. 만일 그 때 관장님이 제가 하는 일에 대해 타박하셨다면 저는 지금 이 일을 안 했을 거에요. 그러나 관장님은 정말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며 열심히 하라고 오히려 기운을 북돋아 주셨어요.”
그는 이 관장과의 개인적인 인연을 소개하며 “사소한 인연조차 업무적으로 대하기 보다 인간적인 면모를 발휘해 후배 하나하나를 보듬어 줬다”며 고인의 인간미에 대해 말했다.
그가 꼽는 고 이 관장의 가장 큰 업적은 미술전문가로서 처음 국립현대미술관장이 돼 큐레이터직을 만들고 미술관 작품 소장 기본계획을 만든 것을 꼽았다. 이를 통해 국립현대미술관의 기틀이 마련됐기 때문이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까지 국내 수많은 미술관의 관장으로 자문, 고문으로 활동한 것도 잊지 않았다. 김 소장은 고 이 관장에 대해 ‘미술관 문화의 산 증인’이었다고 회상했다.
능력 있는 후배 미술인들을 발굴해 낸 교육자요, 평론가로도 기억했다. 특히 그가 만든 석남미술상은 35세 미만 젊은 작가들로부터 가장 탐나는 상 중의 하나로 자리잡았다. 심지어 미술인들에게 “대학 교수가 되기 위해선 꼭 석남 미술상을 받아야 된다”는 근거 없는 소문까지 날 정도였다. 이처럼 그는 교육자로서, 평론가로서 국내 화단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미술계의 큰 어른이었다.
이런 그를 기리기 위해 김 소장은 이제 한국 화단이 할 일은 우선 우현 고유섭 선생처럼 고 이 관장의 전집을 만들어야 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국내 미술계의 모든 의견을 수렴해야 할 뿐 아니라 한국 현대 미술 자료를 모두 수집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고 이 관장의 모태가 된 인천의 경우 지역 미술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제시할 미술관의 필요성을 말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우현 고유섭 선생과 함께 한국 미술사의 양축이 된 고 이 관장을 기리고 한국 미술계에 평생을 바친 고인의 뜻을 기려야 한다고 말했다.
“한 시대 미술계의 고목이 쓰러졌습니다. 이제 남은 미술인들의 몫은 고인을 잘 평가해 한국 미술을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 시키는 일입니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누구도 비켜갈 수 없는 이치지만 그 빈 자리가 많이 아쉽습니다.”
최미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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